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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부는 73년 9월7일 아예 가을철 기본방송 개편 방향을 만들어 각 방송국에 시달했다. 방송국의 고유권한인 편성과 제작권까지 손에 쥐겠다는 의도였다. 75년 5월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이나 개정 주장 등을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9호가 발동한 뒤에는 기관원이 무상으로 방송국을 드나들었고 툭하면 전화를 걸어 무슨 기사는 빼고 무슨 기사는 고치라는 ‘요청’을 서슴지 않았다.
모든 방송이 유신의 서슬에 움츠러들었지만 동아방송이 겪은 시련은 누구보다 컸다. 특히 보도 프로그램과 사회비판 프로그램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DBS리포트’와 ‘오늘의 맥박’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뉴스 쇼’가 도중하차했고 ‘라디오 석간’이 축소됐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도 퇴진했다.
전화 리퀘스트 등 신선한 아이디어로 다른 방송을 압도했던 심야방송도 된서리를 맞았다. 최신 팝송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0시의 다이얼’이 우리 가곡과 국악을 내보내는 교양 프로그램으로 바뀌었을 정도다.
대신 등장한 것이 이른바 ‘유신 프로그램’. 새 질서 확립과 새마을운동에 부합하는 정규 프로그램, 유신체제를 홍보하는 중계방송, 천편일률적인 특집좌담 등이다. ‘새마을 행진’ ‘나의 제언’ ‘마이크 르포’ 등이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유신 프로그램 대부분은 방송국에 노상 출입하는 기관원이 사실상 제작을 좌우했다. 좌담 프로그램 출연자를 정부기관에서 미리 찍어줄 정도였다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이다.
동아방송은 뉴스를 방송의 생명으로 삼았다. 그랬기에 유신체제 아래서 겪은 고통은 더욱 컸다. 주요 프로그램이 차례로 퇴장했고 긴급조치의 갖가지 제약은 그동안 쌓아 올린 ‘뉴스는 동아’라는 명성을 위협했다.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는가. 탈출구를 찾기 위한 회의가 연일 열렸다. 서울권 뉴스와 생활뉴스 스포츠뉴스의 개척과 확장, 동아방송은 일단 유신체제하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이렇게 잡았다.
# ‘탈출구를 찾아라’
74년 1월1일 김성열 방송국장이 취임하면서 뉴스1, 2부와 뉴스편집부를 정경부, 사회문화부, 보도제작부로 개편했다. 이어 3월 김진현 보도담당 부국장이 취임한 뒤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수원, 의정부, 성남을 잇는 수도권 보도체계를 갖추고 편성부 소관이던 스포츠 중계업무를 사회문화부로 통합했다.
보도기능 강화는 이 해 4월1일의 기본편성에서 나타났다. ‘오늘의 기류’ ‘알기 쉬운 생활경제’ ‘스포츠 하이라이트’가 신설되고 ‘뉴스 쇼’와 ‘DBS리포트’가 근 2년 만에 부활했다. 6월의 임시개편에서는 ‘서울권 뉴스’가 탄생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담당 데스크나 취재기자들이 직접 진행을 맡아 공신력과 개성을 살렸다. ‘서울권 뉴스’의 박미정 천승준 김현정, ‘생활경제’의 이승 강황석, ‘스포츠 하이라이트’의 천승준 이광 등이 그들이다. 당시 보도기능을 강화하려 애쓴 김진현의 말.
“당장의 과업은 좌절감과 욕구불만으로 침체해 있는 사기와 분위기를 어떻게 일신하며 제한된 여건 속에서 동아방송의 보도역량을 어떻게 살려갈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서울권 뉴스를 위해 서울시 취재팀은 물론이고 경찰 취재팀까지 투입하면서 영등포 경찰서도 이때 처음 직접 커버했습니다. 또 교통부 출입기자는 서울 철도청에, 문교부 출입기자는 서울시교육위원회에 더 비중을 두는 식으로 총력전을 폈습니다. 생활경제뉴스 개발은 청취자들의 경제뉴스에 대한 선호도를 높였을 뿐 아니라 경제기사의 문장을 쉽게 풀어 쓰는 데도 기여했지요. 스포츠 중계업무까지 사회문화부로 흡수시킨 것은 스포츠 보도의 폭을 넓히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
동아방송이 활로를 찾아 고군분투하던 74년 12월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가 터지고 무더기 광고 해약사태는 동아방송에도 파급됐다. 이듬해 1월11일 보도 프로그램의 광고가 모두 해약됐다. 한 달 뒤인 2월 7일에는 프로그램광고 3개, 스포츠광고 22개만 남아 탄압 이전과 비교할 때 금액으로 91.7%가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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