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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은 고별방송을 하루 앞둔 11월29일 ‘동아방송을 끝내면서’라는 제목의 사고(社告)를 동아일보에 냈다. 다음은 그 마지막 부분.
“…동아방송이 문을 닫음에 즈음하여 우리는 겸허한 자세로 지난날의 족적을 회고하고 이번 조치가 우리 언론은 물론 국가 사회의 발전적인 계기와 밑거름이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면서 우리의 지난날 공과는 후일의 심판에 맡기고자 합니다.
지난 18년동안 한결같이 귀를 기울여 주신 동아방송 애청자 여러분에게 이제 정중한 고별의 인사를 올립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진리를 새삼 되새기면서 그동안 베풀어주신 유형 무형의 지도와 성원에 충심으로부터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끝으로 동아방송을 아끼고 사랑하여주신 외부 출연자와 광고주 및 사회 각계각층 인사 여러 분에게도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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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전송을 받으며 KBS로 떠나는 방송동우들(8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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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의 영광과 회한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동아방송 주조정실은 스위치가 꺼지면서 무거운 적막에 싸였다. 개봉동 송신소에서는 김성열 상무의 선창으로 송신소 모든 직원이 “동아방송 만세” 를 외쳤다.
누가 틀었는지는 몰라도 ‘한 500년’의 구슬프고 애절한 가락이 하루종일 사내방송을 타고 흘러 나왔다.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는 동아방송 직원들은 11월30일 고별특집 방송을 들으며 구내식당에 마련된 ‘석별의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9시 동아일보사 임직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버스에 실려 KBS로 떠나갔다.
동아방송의 주파수는 90년 6공정권이 ‘공민영 체제’로 방송정책을 전환하면서 SBS로 넘어간다. 방송을 통폐합할 때 신군부가 내세웠던 ‘공영체제’라는 명분이 한낱 허울이었음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한승헌(韓勝憲) 변호사는 95년 11월 NEWS+(현 주간동아)에 이렇게 썼다.
“…권력이 강탈한 동아방송이 장물이라면 KBS는 첫번째 장물취득자요 또다른 민간방송은 두 번째 장물취득자라 하겠으며 5, 6공 정부는 이중으로 장물을 처분한 셈이다. 당시 세론대로 6공 실세와 검은 거래가 있었다면 그것은 장물매매에 다름아니다. 6공정부와 그 책임자들의 부도덕성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정권이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는 일이 개혁의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80년 언론대학살’의 장물격이 된 동아방송의 원상회복은 필수적인 과제다.… ’
DBS가 첫 전파를 쏘아 올린 지 꼭 35년이 되는 98년 4월25일, 동아방송 개국35돌 기념식이 그리운 옛 얼굴들이 모인 가운데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열렸다. 이 날 유재천(劉載天) 한림대 교수는 동아방송을 ‘민주방송’으로 표현했다.
“…방송사에서 동아방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동아방송은 민간방송이라는 위치에서, 그것도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이 알고 싶어하는 뉴스를 과감하게 전달해주었다. 민주화를 위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고 결국 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한 방송이라고 생각한다. 신군부가 ‘공영방송’ 체제라는 이름 아래 동아방송을 강제로 폐국해버린 것도 동아방송이 ‘민주방송’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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