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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쇼’의 이동수 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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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에 접어들면서 ‘격조 높은 민족의 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사건 세계사’ ‘심야의 명상’ 등 중후한 프로그램이 등장했으며 이 해 4월 개편에서는 ‘한국독립투쟁 비화’ ‘모닝 쇼’ ‘젊은이의 행진’이 탄생한다. 뉴스 프로그램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굳힌 ‘뉴스 쇼’가 등장한 것도 이 해 10월 개편에서다.
동아방송 성장기 편성의 특징은 우선 뉴스와 보도 프로그램의 증가다. 뉴스는 개국 당시의 하루 13회에서 71년 18회로 늘었으며 보도 프로그램도 67년 4.1%로 급격히 증가했다.
두 번째는 사회교양 프로그램이 점점 줄면서 생활정보 프로그램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생활 정보 프로그램은 TV시대에 라디오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 ‘다이얼 1230’ ‘동 아 스코프’ ‘서울 패트롤’ ‘나는 모범운전사’ 등이 그 예였다.
# ‘닐리리도 흥겹게’
셋째는 다큐멘터리 드라마와 라디오 캠페인 확충이다. 동아방송 최초의 캠페인이 ‘걸어서 가자’였다면 두 번째는 우리 고유의 민속예술을 되찾고 이를 보급하자는 의도에서 방송된 ‘닐리리 보급운동’을 꼽을 수 있다.
65년 10월4일 15분짜리 프로그램 ‘닐리리도 흥겹게’로 시작된 ‘닐리리 보급 캠페인’은 67년 3월 폐지될 때까지 1000여 곡에 이르는 닐리리를 제작해 우리 고유 가락을 되찾고 대중가요에 새 지표를 정립하는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다.
‘닐리리’라는 단어는 독일의 리트,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소네처럼 우리 가락으로 작·편곡된 대중가요라는 뜻으로 동아방송이 처음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김세레나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갑돌이와 갑순이’가 우연히 술집 접대부가 읊조리는 것을 듣고 만든 대표적인 닐리리였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 밖에 널리 애창된 닐리리로는 ‘월하의 수심곡’ ‘단종애가’ ‘아리랑 춘풍’ ‘아리스리 살짝궁’ ‘봄타령’ ‘댕기타령’ ‘새타령’ ‘금강산 아리랑’ ‘신 도라지타령’ ‘배나무골 처녀’ ‘나리나리 날나리’ ‘오동추야’ ‘물방아 타령’ ‘한양 아가씨’ ‘도라지꽃’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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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응접실의 방송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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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국내 최고의 석학과 지성인들이 고정출연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던 ‘유쾌한 응접실’도 빼놓을 수 없다. 동아방송의 개성과 품격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란 평을 받은 ‘유쾌한 응접실’은 공개오락방송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한국방송사에 획을 그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 출신인 극작가 이서구와 동국대 교수 양주동(梁柱東)은 이 프로그램의 단골 손님이었다. 연속방송극 ‘장희빈’으로 안방 마님들을 울리면서 ‘장희빈이 방송될 때는 여자 목욕탕이 텅텅 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공전의 인기를 누린 멋쟁이 노신사가 이서구였다.
그리고 ‘국보(國寶)’라는 별명의 양주동. 그의 박학다식은 진작부터 정평이 나 있었지만 화술과 유머 또한 뛰어나 그가 입만 열면 방청석은 온통 웃음바다였다.
“아, 요즘 명함에 보면 직업이니 직함이니 하는 걸 잔뜩 써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요. 허지만 내 명함엔 내 이름 석 자밖에 없어요. 아, 국보 양주동박사 모르면 쌍놈이지.”
‘유쾌한 응접실’은 방송시작 때부터 10여 년 동안 청취랭킹 3위 이내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 동아방송 개국 때부터 폐국 때까지 계속 방송된, 최장수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유쾌한 응접실’의 명사회자였던 전영우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풍성한 대화야말로 유쾌한 응접실의 중심요소였다. 여기에 즉흥적인 발상과 서민의 애환 및 개성, 유머와 위트가 자연스럽게 교차한 것이 청취자들을 끌어당겼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코미디나 억지는 배제했고 이야기 손님들간에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배려가 자리잡아 항상 화기넘치고 품위있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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