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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장은 입을 다물었고 이사장이 반론을 폈다.
“공영화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는 거요.”
“우리는 그런 거 모릅니다. 정부 방침입니다.”
“우리로서는 주주총회 결의가 없이는 서명할 수 없소. 만일 우리 마음대로 도장을 찍는다 면 배임이 되는 것이오.”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포기하셔야 합니다.”
승강이는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3시간 반이 지났다.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온 이대령이 김회장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것 보시오. 삼성도 TBC를 내놓았습니다. 포기각서를 쓰지 않더라도 어차피 동아방송은 거덜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회사 사장들은 이미 제출하고 나갔습니다.”
그가 내보인 것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서명한 동양방송 포기각서였다. 그때까지 줄곧 말이 없던 김회장이 이사장을 향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소. 쓰지.”
이대령이 준비하고 있던 포기각서를 불러주었다. 이사장이 그대로 받아 썼다. 6개항으로 된 동아방송 포기각서였다. 이사장과 김회장이 차례로 서명하고 무인을 찍었다.
언론 통폐합을 어떻게 진행했는가. 80년 당시 문화공보부 소속 공무원으로 ‘언론대책반’ 에 근무했던 김기철이 펴낸 ‘합수부 사람들과 오리발 각서’에 당시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정리돼 있다. 80년 3월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權正達) 대령의 지시로 구성된 언론대책반이 문공부에서 기안한 ‘언론 역기능 간행물 정화계획’을 토대로 ‘건전언론육성안’을 작성 했다. 이를 허문도(許文道) 청와대 비서관이 ‘언론창달계획(안)’으로 최종확정해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집행했다는 것이다.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서 언론사 사주들의 포기각서를 받으라는 지시를 받은 이상재 보안사 언론대책반장은 이들을 보안사 2, 3층에 있는 각 처장 사무실에 분리 수용해 포기각서를 받았다. 보안사는 언론사 사주들을 협박 회유하기 위해 서빙고 분실의 유능한 수사관 13명을 보안사 식당으로 불러 포기각서를 받는 방법을 교육까지 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진다. 포기각서 원안은 당시 문공부 공보국장 허만일이 만들었다. 이 원안에 ‘보기’로 써 넣은 언론매체는 ‘주식회사 동아일보’ ‘주식회사 동양방송’ 등 2개사. 당시 신군부가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기 위해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을 대표적인 통폐합 대상으로 삼았음이 드러 나는 대목이다.
전국의 63개 언론사(신문28, 방송29, 통신6)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44개사(신문11, 방송27, 통신6)를 대상으로 한 통폐합 조치에 따라 동아방송 동양방송 서해방송 전일방송 한국FM방송이 KBS에 흡수통합되고 기독교방송은 복음방송에만 전념하게 됐다. 반면 문화방송은 21개 지방방송의 주식 51%를 인수해 전국 방송망을 갖추게 된다.
# 역사 속으로 지다
통폐합조치는 동아일보사에 청천벽력이었다. 10·26과 12·12사태, 개헌논의와 3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정국 속에서 80년대를 맞아 지방국과 TV국을 설치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동아방송이기에 더 그랬다.
당시 동아방송은 기술부와 송신소 간부들로 구성한 기술대책팀을 부산, 대구, 대전, 전주, 광주, 춘천, 강릉, 제주 등 8개 도시에 보내 현지답사케 했고 80년 1월4일에는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 김상기 부회장이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해 지방국과 TV국 설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동아방송의 새 키스테이션이 될 여의도별관 증축공사도 활발히 진행돼 회사 전체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사태는 모든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정치 사회적 혼란에 대처한다는 미명하에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10호에 따라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언론검열을 강화하면서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 것이다. 11월15일 언론사 통폐합 방안이 발표되자 동아일보사 임직원들은 치솟는 분노와 허탈감으로 망연자실했다. 방송국 각 부서에서는 격앙된 나머지 책·걸상이 뒤집어지고 이곳 저곳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통폐합주’라는 새 이름의 음주 풍경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다. 언론인들은 허탈감을 잊고 빨리 만취하기 위해 소주에 막걸리를 타거나 맥주에 양주를 타 들이켰는데 이를 통폐합주라고 불렀다. 요즘의 ‘폭탄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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