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 스타 앨범. 한번 가면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세월속에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그는 갔어도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앨범. 오늘은 추모 특집으로 고복수 편입니다.
- 속절없는 세월 속에 못다 이룬 꿈을 묻혀 버리고 이제 이승을 떠나 몸은 유명을 달리 했을지라도 잊지 못할 추억과 함께 영원히 남아 있을 정다운 노래. 가슴을 파고드는 애수어린 정감으로 노래를 불러 수 많은 사람들 가슴속에 추억과 낭만을 심어주고 훌쩍 떠나가 버린 고복수. 그는 이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 말만 들었지 내가 닥쳐 보니까는 이렇게 가슴 아픈건 처음 봤어요.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아마 마지막 같아요. 아휴 고 선생님 노래를 어떻게 들어요.
- 1955년 8월 8일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밤이었습니다. 고복수의 은퇴공연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국립극장에서는....
- 꿈과 같이 흘러가 버린 세월. 어언 30년. 지나간 시적 그 화려했던 추억과 낭만들. 휘황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서 있는 고복수. 가슴은 메어지는것만 같았고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지나간 세월들.
- 고복수. 1912년 11월 19일생.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서리가 그의 고향입니다. 기계국수집 맏아들로 태어난 고복수. 유성기에 매달려 노래만을 부르면서 그는 꿈많은 소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꿈많은 소년 고복수. 무성영화와 함께 멋들어지게 넘어가는 변사의 목소리가 그를 매혹시키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 중학교 2학년 18살때. 부산 공예당에서 열린 콩쿨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을때. 고복수의 마음은 이미 서울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철사 끝에 엿을 붙여 부모 몰래 금고에서 빼낸돈이 60원. 그 60원을 움켜쥔 채 고복수는 밤열차에 몸을 싣고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멀어져가는 고향. 낯설은 서울. 검정두루마기에 하얀 장갑을 끼고 고복수는 서울 공예당 무대에 섰습니다. 지정곡인 `두견새 우는 밤`과 자유곡인 `처량한 밤`을 구성지게 불러 넘기고. 고복수는 콜럼비아 레코드가 주최한 콩쿨대회에서 2등을 차지 무대를 향한 그의 첫 꿈을 키웠습니다. 쌀 한가마니가 5원하던 시절. 작곡가 손목인의 권유로 고복수는 계약금 천원 월금 80원에 오케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전속가수가 되어서 처음으로 취입한 노래가 `타향살이`였습니다.
- 간도 용정땅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무대를 온통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다는 `타향살이`
- 이 노래 하나로 고복수는 하룻밤 사이에 일약 스타로 등장한 것입니다. 공연이 끝나면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 속에 파묻혀 어쩔 줄 몰라했던 고복수. 지금 국립극장 자리인 명치좌에서 공연을 끝내고 나올 때의 일입니다.
- 저 고복수 선생님 이시죠? - 왜 그러십니까? - 저 이런 사람 옳습니다. - 재경경상남도 친목회 총... - 네. 그렇습니다. - 그런데요? - 사실은 오늘 밤 우리 친목회 모였는데 고선생께도 잠깐만 참석해 주시길 모두 원하고 있습니다. - 아. 그래요? - 저 시간이 없으시겠지만 고향친구들의 간청이니까. 특별히 고려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음 가십시다.
- 그런데 고복수가 안내된 곳은 다방골 어느 조용한 기생집.
- 아니 이게 어찌된 셈이지? - 서방님 죄송합니다. 소옥이가 죽어도 꼭 한 번 서방님을 뵙고 싶어서 모셨사오니 용서하시옵소서. - 뭐라구?
- 고복수는 괴씸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밉지 않은 얼굴.
- 음. 기왕 왔으니 하는 수 없지. 한 잔만 마시고 가지. - 감사합니다. - 그 대신 니게 속아서 온게 아니라 내가 널 보고 싶어서 온 것으로 해두겠다. - 어머나. 호호. 그럼 어서 한 잔 드시어요. - 오냐.
- 이렇게 되면 여자가 기생인지 고복수가 기생인지. 어떻든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는 고복수였습니다.
- 그리고 한번 순회돌 때마다 이제 대략 한 서너달 합니다. 돌아오면 편지가 거짓말없이 무려 수백통이 와 있습니다. 그 때 그 시절 그 만큼 돈도 있고 인기도 얻고 모든 삶이 전부 고복수 고복수 하던 그 시절. 욕심이라기보다 단 하루라도 다시 그 시절이 한번 나에게 와 주면 얼마나 반가우리 이 생각 뿐입니다.
- 부러운 것도 아쉬운 것도 없었던 그 시절. `타향살이`에 이어 내 놓은 고복수의 두번째 히트곡은 `사막의 한` 이었습니다. 자고나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 인생을 카라반에 비유해서 고달픈 인생역정을 푼 노래 `사막의 한`.
- 노래와 함께 청춘을 불태웠던 고복수. 그러한 고복수의 노래와 함께 잊지못할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극작가 이서구 씨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 그 때 그 이의 인기가 한창 클때가 이제부터 한 35년전 쯤 됩니다. 저도 그 때 30대로 한참 그 여인에게 ...쫒아다닐땐데 그 때 고복수가 남한지방에서 올라왔어요. 올라왔는데 키가 호리호리 한데 목소리가 바리톤인데 구수해요. 우리나라 옛날 그 참 좋아하던 음성이에요. 그러더니 이러쿵 저러쿵 하다가 `타향살이`라는 곡조가 나왔습니다. 이게 이제 오케레코드에서 그것때문에 전속계약도 하고 또 고복수는 그 때 사장 이철영이가 놓지않고 붙들었는데 곡조를... 부르는 그 음성이나 구수하고 서글픈 맛이 나는 것이 그 때 우리 한민족들이 일본한테 압박받아가지고 눌려가지고 살면서 그 원한이 가슴에 사무친거를 풀어주는 그런 목소리가 나왔어요. 그건 아마 고복수 자신도 모르고 나왔지만 그렇게....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타향살이`는 듣고 울고 부르고 울고 부르고 나서 울고 그러한 굉장한 히트였습니다. 그래가지곤 이제 무제 실연을 나가는데 지금 저 국회자리죠. 그 때 이제 무대실연이 많았습니다만. 고복수가 이제 한복 쫙입고 머리 찔근 매가지고서는 전라도 멋쟁이 스타일로 나오면 키도 훌씬하고 어떻게 목소리가 구성진지 굉장해서 고복수는 아마 학생들서부터 기생 할배 어쩌니 하는 사람들 없이 아마 전시민이 모두 좋아했을거에요. 그 이제 요점이 뭐냐면 그 목소리가 그 때 우리의 원한을 대변하기에 알맞은 목소리였어요.
- 1936년 글자 그대로 고복수의 황금시대를 이루게 했던 노래는 `짝사랑`. 카페 생유리창 너머로 낙엽이 뒹귀는 벌판에서 이름없는 주막집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부르던 노래 `짝사랑`. 고복수의 세번째 히트곡입니다.
- 땅도 꺼지고 하늘도 무너질것 같은 짝사랑. 가을에 우는 새소리가 으악이라 들려서 으악새라고 이름 붙였다는 짝사랑.
- 꿈처럼 흘러간 세월. 조국은 해방되고 빅터가극단의 여왕이었던 황금심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 그 때 고복수는 37살. 황금심은 꽃다운 19살. 그러나 1950년 격동과 수난 속에서 슬픔을 씹으며 6·25를 격고나니 고복수의 나이는 마흔을 넘고 1955년 8월 8일 아직 마음은 젊다 하지만 어쨌든 은퇴공연을 마지막으로 고복수는 무대를 떠났습니다. 무대를 떠난 고복수는 학원을 차려 후배양성도 해봤고 영화사를 차려 영화제작도 해봤지만 남는 것이라고는 쌓이는 빚더미와 그리고 허전한 마음 뿐. 뇌심경 고혈압으로 숫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노래에 집착했던 그의 의지와 함께 그가 부른 노래는 우리들 곁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 흘러간 세월속에 묻혀버린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앨범 오늘은 추모특집 고복수 편으로 해설에 안종국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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