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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추억의 스타앨범
박시춘 편 - 남인수,황금심 등 길러낸 가요계의 아버지
박시춘 편
남인수,황금심 등 길러낸 가요계의 아버지
1972.01.16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추억의 스타 앨범.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추억. 세월은 흘러 갔지만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돌이켜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작곡가 박시춘 편 입니다.

- 세월은 덧없이 흘러 연륜만이 쌓이고 추억이 묻혀있는 강가에 새 봄이 올 적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처럼 잊혀지지 않고 들려오는 정다운 노래. 그 정다운 노래를 수도 헤일수 없을 만큼 작곡해 주었던 박시춘. 작곡가 박시춘은 `애수의소야곡`, `총각 지정서`, `항구의 선술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등 잊혀지지 않는 수많은 가요를 만들어 낸 작곡가임과 동시에 남인수, 이난영, 황금심, 고복수, 장수영, 이화자 등 기라성 같은 가수를 길러낸 가요계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1세기 동안에 한 사람 나오기도 힘들다고 하리만큼 총애를 받았던 가수 남인수가 이직 강문수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시에른 레코드에서 출반한 `눈물의 해협` 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작곡가로서 데뷰한 박시춘. 이 `눈물의 해협`은 다음에 오케 레코드에서 `애수의 소야곡`으로 이름을 바꾸어 히트를 날림으로서 박시춘의 대표곡이 되기도 한 노래 입니다.
박시춘이 처음 작곡했던 `애수의 소야곡` 남인수의 목소리로 들어 봅니다.

♬ 애수의 소야곡 - 남인수

- 일본에서 유명했던 여배우 토도로키 유키코가 아이슈우노우 세레나데로 번역해 부르면서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일본까지 휩쓸었던 이 `애수의 소야곡`을 작곡한 박시춘은 경상남도 밀양이 그의 고향으로 1912년생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박시춘의 본명은 박순동. 박순동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위었기 때문에 밀양에 있는 보통학교에 다닌 것이 그의 학력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박순동은 7살때 청년회 브라스 밴드에서 드럼을 쳐 갈채를 받기도 했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든고향을 등지고 드럼을 치며 돌아다니는 유랑극단의 나그네가 됐습니다.


- 제가 7살 때 우리 고장의 청년들이 악기를 구입 해가지고 보통학교 그때는 보통학교 입니다. 보통학교 운동회에 연주를 하게 됐는데 북 칠 사람이 없었어요. 어떻게 됐는지 그때부터 리듬은 7살때 부터 알았습니다. 알아가지고 제가 가서 북을 쳤는데 북을 치기는 치는데 저쪽 관중이 멀리서 보니 북소리는 나는데 사람이 안보인단 말이야, 사람이. 그래서 하도 신기해서 어째서 북소리가 나나 하고 와보니 뒤에 앉아가지고 조그만 애기가 앉아가지고 치고 있는걸로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요 귀엽다고 해서 모두 그 시골 사람들이 와서 업고 가서 그때 그 노점 장국밥집 비빔밥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점심을 사주고 그런 일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14살 때 가출을 했습니다. 가출을 해가지고 쭉 방랑 생활을 하다시피 해서 무슨 영화 활동사진 순업대에 편입해서 영사 기사도 하고 또 음악도 배우고 이렇게 해서 몇번 일본도 수차례 왕래하고 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고 생각 됩니다.


- 쓸쓸하고 외로운 유랑생활 5년 후에 소년 박순동은 스무살이 됐고, 뜻밖에도 일본으로 건너 갈 기회가 생겨서 전격적으로 연애 활동의 기반을 닦기 시작 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중앙음악학원에서 상설 공부를 한 다음 상설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박순동은 예명을 박시춘으로 고치고 처음 내 놓은 것이 `애수의 소야곡`. 거푸 히트곡을 날린 다음 이어서 내 놓은 것이 `왕서방 연서`. 1934년 박시춘 작곡으로 김정구가 불러줬던 노랩니다.

♬ 왕서방 연서 - 김정구


- 나일로니아 레일론 이라는 옷감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모처단이나 호박단 양단 같은 비단이 판을치던 시절. 음식 장사가 아니면은 비단장사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던 화교들의 탈선을 풍자하는 가사에 코믹한 곡을 붙여 삼척동자까지도 불러 그야말로 히트곡 중의 히트곡이 된 `왕서방 연서`는 오케 레코드와 함께 박시춘, 김정구의 이름을 정상에 올려 놓았으며 박시춘의 전성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때 작곡가 박시춘은 나이 불과 20남짓한 애숭이로 너무나도 어려서 만나는 사람을 실망케 하기도 했으며 역시 18살 밖에 안되는 남인수와 명콤비가 되어 가요계의 군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드럼을 치고 나중에는 바이올린을 켰으며 작곡가로서 대성을 한 박시춘은 일이 끝나면은 반야월, 조춘영 씨 들과 함께 회현동에 있는 낙양집에 들러서 정종 다섯톱을 예사 마시는 애주가이기도 했으며 술에 취하면은 노래를 한 곡조 뽑아 가수들을 무색케 하기도 했습니다. 다재다능하여 팔방미인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던 박시춘.
해방 후 상해에서 돌아 온 현인의 히트곡이었던 `신라의 달밤`도 박시춘이 작곡해 주었었습니다.



- 초창기의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 하면서 `애수의소야곡`, `감격시대`, `왕서방 연서`, `항구의 선술집`, `꼬집힌 풋사랑`, `신라의 달밤`,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센프란시스코`, `가거라 삼팔선`, `애정 산맥`,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삼다도 소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히트곡만 300여곡을 작곡하고, 그동안 길러 낸 유명한 가수만도 남인수를 비롯해서 이난영, 황금심, 고복수, 장세정, 이화자, 박향림, 송달협, 김정구, 백설희, 이미자 등 헤일수가 없는 박시춘은 싱그러운 5월의 하늘처럼 파란색을 좋아하며 밤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 낭만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28세 때 18세의 부인과 결혼해서 지금은 3남 3녀의 아버지요 벌써 두 사위의 장인영감님이기도 한 박시춘은 지구 레코드 전속으로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한국 연예협회 이사장으로 연예인들의 상호 친목과 권익을 위해서 힘을 기울이는 정열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1953년 수복된 서울에서 히트했던 박시춘 작곡의 `센프란시스코` 백설희가 불러 줍니다.

♬ 센프란시스코 - 백설희

- 1미터 65센치의 자그마한 키에 언제든지 단정하게 빗어 넘긴 앞가르마가 인상적인 작곡가 박시춘은 술을 매우 좋아하지만은 그러나 그 술 보다도 후배를 더욱 사랑하고 애들이 엄마를 더 좋아 한다고 용돈을 주어 가면서 인심을 사기도 하는 로맨스 파파 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제 늙어서 후배들이 좋은 노래 만들어 내는 것을 지켜나 보아야겠다고 겸손해 하는 박시춘은 정중동의 자세로 작곡 활동을 쉬고있는 중이지만은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또 한번 가요 팬들이 놀랄만한 히트곡을 작곡해 줄 것입니다.


-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추억. 세월은 흘러 갔지만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돌이켜 본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박시춘 편으로 지금까지 구성 최호영, 아나운서 원창우 였습니다.

(입력일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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