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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앨범
이은주 편 - 열일곱에 ‘수심가’ 가락으로 심금 울려
이은주 편
열일곱에 ‘수심가’ 가락으로 심금 울려
1971.12.12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추억의 스타 앨범.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 있는 그리운 추억.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이은주 편 입니다.

-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세월은 흘러가고 한잎 두잎 낙엽이 쌓이듯 추억은 묻혀 버렸어도 인생의 허무를 노래 한 `수심가`의 가락은 영원 하듯이 어린 나이에 그 `수심가`를 불러 심금을 울려줬던 명창 이은주. 이은주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수심가`를 불러 장안을 요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태평가`를 스스로 작사 작곡해서 창을 부른 다재다능한 국악인이기도 합니다. 향가의 1500년 역사와 더불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민요. 그 중에서도 어느 덧 부녀자들의 흥얼거림 속에서 자라온 민요는 부녀자 자신들이 노래를 받아들일 선천적인 자질도 있었거니와 그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너무나 지나치게 속박을 당했기 때문에 신세타령으로 발전하기도 했던 민요. 인생의 허무와 쓰라린 운명을 흐느끼듯 슬픈 율조로 부르는 회한의 노래.

이은주 씨가 부르는 `양유가` 입니다.

- 열일곱이란 어린 나이에 어쩌면 청승스럽다고 하리만큼 `수심가`를 애처롭게 불러 장안을 요란하게 했던 명창 이은주의 본명은 이은단. 1925년 8월 26일 생으로 경기도 양주가 그의 고향이며 양주에서도 손꼽히는 부농의 3남매중 장녀로 태어 났습니다. 9살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해서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집에서 독선생을 모시고 시조와 가사 공부를 했으며 독선생으로 모신 원경태 씨로 부터 5년동안 국악의 기초를 익히기도 했습니다. 어릴적 부터 꾀꼬리 소리 처럼 목소리가 아름답고 노래를 부르면 은방울이 굴러가듯 영롱하기까지 했던 명창 이은주. 이은주는 너무나도 목소리가 고와서 17살때 경성 방송국 출연 교섭이 왔었으나 완고한 부모들의 반대로 진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대중가요가 인기는 있었으되 아직은 창의 인기가 더욱 높아서 그 무렵 개관했던 우미관에 개관 축하 공연이 그야말로 여류 명창들의 판소리로 판을 치던 시절 독선생을 모시고 시조와 가사를 배웠으되 무대에 서는것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서 이은주는 이윽고 경성 방송국 마이크 앞에 나와서 생방송을 하기 시작 했으며 그것이 명창 이은주의 데뷰이기도 합니다.
`몽금포 타령` 이은주 씨가 부릅니다.

- 우리나라 창은 신라시대의 화랑에서 부터 시작 됐다고 하지만은 한때는 천대를 받기도 했고 그러나 대원군 시절에는 명창들이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아 그때의 신재효는 종2품의 5위장 벼슬을 하사 받기도 했으며, 최선, 허금파, 김녹주, 배설향, 이화중선 등 기라성 같은 여류 명창의 뒤를 이어 등장한 소녀 이은주는 완고한 부모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인천 흥명극장 무대에서 `수심가`를 해내 국악계의 혜성이 됐습니다.


- 그러니까 열일곱 살인가요? 그 쪽에 제가 인천 그 흥명극장이라고 있어요. 있는데 거기 가서 인제 극장에서 각 팬들을 내가 처음 갔으니까 나라는 사람을 아직 모르지만은 나이가 원채 어리고 그런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한번 좀 만나봐야겠다 그런 뜻으로 해서 한번 왔는데 제가 제일 느낀것이 뭐냐 하면은 그전 옛날에는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는지 몰랐어요. 인력거를 타고 앞에서 노란 옷들을 전부 입고 꿍꽝 꿍꽝 쳐가면서 소라를 불어가면서 앞에서 그냥 말하자면 지휘자로 그 음악을 쳐가면서 뒤에는 뒤를 전부 따라서 그렇게 가더군요. 그래서 인제 지금도 키가 조그맣지만 그때는 더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기 때문에 그냥 그 인력거를 타고 그 시내 마을을 전부 하고 돌아나니니까는 그 꼬맹이가 저거 뭘 하고 돌아다니나 하고 전부 손가락질을 하고 껄껄대고 웃어요. 여러 사람들이. 그래서 그 난 한쪽으로 생각 했을땐 나이가 어려도 그저 그런가보다 아주 보통으로 생각 했지요. 지금 같으면 부끄럽다고 하지만은 그래서 그냥 그렇게 그냥 그 인천 그 시내를 그냥 그 인력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얼굴에다 그냥 안갱이 칠을 해가면서 돌아다녔거든요. 그래가지고 투표저로 그냥 인제 우리가 그 극장에 들어가서 하게 됐는데 나는 그때는 우리 어머니가 시골가 그냥 계시기 때문에 극장을 어머니까 좇아 오시지도 않고 부모네가 없었어요.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부모네들이 다 좇아 와가지고서는 1등 2등을 다투는 여기에 나는 하나도 없는데 제가 나이가 어리고 노래를 원채 잘하고 그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하필 왜 날 갖다가 뭘 하라느냐고 그 `수심가`를 하라 그래요. `수심가`를 하면 너는 당선이 될테니까 너는 그거나 좀 해달라고. 아이고 안된다고 그러니까 해달라고 그래서 할수 없어서 거기서 그걸 하게 됐어요. 하고 나니까 박수 소리니 뭐니 괭장 했었어요. 그 쬐금해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목소리가 좋으냐고 말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그냥 그 뭐 그땐 나이가 어리니까 그저 박수만 받는거만 좋아서 그저 껄껄대고서 하면 그저 그냥 신나게 했지 뭡니까.


- `수심가` 같은 서도민요만이 아니라 경기민요에도 능했던 이은주는 오케 레코드, 태평 레코드, 신세계 레코드, 고려, 빅타, 콜롬비아 등 당시에 이름 난 레코드 회사에서 매일과 같이 창을 취입 했으며, 경성 방송국에도 거의 매일과 같이 출연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은주 씨가 부르는 `강원도 아리랑` 입니다.

- 인천 흥명극장 공연에서 `수심가`를 불러 인기 투표 2위로 자개장을 부상을 받기도 했던 이은주는 어느때는 하루에 방송국 출연을 다섯차례나 해서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방송 기술도 방송 프로도 발달하지 못해 녹음테잎도 없고 레코드도 제대로 없어 의래히 생방송을 위주로 했던 시절, 그러나 그때 이미 엽서로 희망곡을 접수하고 있던 경성 방송국에서는 성화같은 팬들의 희망곡 요청으로 명창 이은주를 하루에 너댓번씩 불러내야만 했고 마이크 앞에 서는것이 무작정 좋았던 이은주는 방송국에서 부를 때 마다 인력거를 타고 달려 가기도 했습니다. 6·25 동난 후에는 대구로 피난 가서 `태평가`를 손수 작사 작곡해 부름으로써 갈채를 받고 이채를 띄우기도 했습니다.
역시 이은주 씨가 부릅니다. `태평가`

- 수곡 후 서울에 돌아와서는 국악인 30여명이 단성사에서 경연을 벌였고, 이때 이은주는 인기투표에서 당당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미남자의 끈질긴 애정공세로 19살때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생활에 주부이기도 했던 이은주는 세월이 흐르자 어느덧 후배 양성에 뜻을 둬야만 했고 그래서 1970년에는 안비취, 목계월 등과 함께 충무로에 한국민요연구회를 설립 부회장으로 공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은주, 김옥심 두 사람의 창 입니다. `닐리리야`

- 친근한 성격에 내성적이면서도 한번 무대에 나서면은 놀랄 정도의 매너로 팬들의 심금을 울려줬던 이은주는 4년전에 종로 2가에 마야미 다방을 내 안정된 생활을 모색하기도 했으며, 1961년도에 안비취 들과 함께 2달간 일본에서 교포 위문을 시작한 후로는 거의 해마다 일본에 건너가 교포 위문을 계속 했고, 올해의 교포 위문 공연은 지난 12월 초순부터 시작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개인 교수와 같은 독선생을 모시고 국악의 기초를 일으킨 다음 비교적 순탄하게 국악계의 정상에 올라 서도민요와 경기민요에 능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기도 했던 명창 이은주는 시내 종로구 권릉동에서 딸과 함께 노모를 모시고 있으며 아직도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해외에 까지 나가서 우리나라 고유의 창을 불러 겨레의 얼을 심고 있습니다.

- 흘러간 세월속에 묻혀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이은주 편으로 구성 최호영, 아나운서 우재근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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