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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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추억의 스타앨범
박귀희 편 - 슬픈 소리조로 심금을 울려 주었던 명창
박귀희 편
슬픈 소리조로 심금을 울려 주었던 명창
1971.12.05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추억의 스타 앨범.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추억.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박귀희 편입니다.

세월은 흘러 영겁속에 사라졌어도 소리는 남아있고 유구한 전통과 함께 우리나라 고유의 고전으로써 민족의 향기를 이어 온 국악. 목 메듯 슬픈 소리조로 가곡을 불러 심금을 울려 주었던 명창 박귀희. 박귀희는 채선, 허금파, 이화중선에 이어 1930년대에 등장한 정통적인 명창으로서 수 많은 가곡을 남겼으며 `일목장군` 이라는 창곡의 주연으로 명성르 떨친 연기자이기도 합니다. 고전의 향기로운 매력에 끌려 죽어도 소리요 살아도 소리란 명창의 길. 피를 토하는 백일공부가 몇 번 인가 되풀이 된 후에야 비로소 풀려 나오는 계면조. 가장 많이 불리던 `춘향가`, `심청전`, `흥부전`, `수긍가`, `적벽가`의 다섯마당 외에 `쟁기타령`, `배비장전`, `숙영낭자전` 등을 불러 판소리의 청중들을 마음대로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던 박귀희. 명창 박귀희가 불러주는 녹음.. 입니다.

김녹주, 백설향, 이화중선 등 여류명창의 뒤를 이어 등장한 박귀희의 본명은 오계화. 1921년 2월 6일 생으로 경상북도 칠곡이 그의 고향 입니다. 여섯살 때 외가가 있는 대구로 와서 여덟살 때 대구국립고등학교에 입학 했으며 이때부터 학교에 다니는 길가에 있는 손광재 국악 연구소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창에 흥미를 갖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국악 연구소에서 노래를 불러 연구소 소장인 손광재를 놀라게 했고 얼마 후 손광재는 대구극장에 공연차 내려온 이화중선에게 박귀희를 소개하기에 이르렀으며 14세의 소녀 박귀희는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고 무대에 올라 만장의 박수를 독차지 하기 시작 했습니다.
소녀 명창이었던 박귀희가 불러주는 `골패타령`

손광재의 소개로 이화중선과 함께 무대에 서서 인기를 독차지 했던 박귀희는 그 후 1년 동안 부산, 경주, 울진을 비롯해서 전국을 순회함으로써 소녀 명창의 기반을 굳혔으며 이듬해에는 본격적인 창의 수련을 쌓기 위해 대구 항원에 있는 용인사에서 조학전 씨의 사사로 백일공부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쏟아지는 폭포 밑에서 어느 때는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서 소리치며 피를 토해야만 했던 쓰라린 추억을 박귀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 아침밥 먹고 나면은 한 시간 쉬고 점심밥 먹고 들어올 때 까지 하고 또 점심 먹고 한 시간 쉬고 저녁밥 들어올 때 까지 소리하고 또 저녁밥 먹고 한 시간 쉬고 밤 좌정 12시 1시 까지 소리를 하고 또 잠시 한 서너시간 자고 4시부터 일어나서 아침밥 들어오기까지 소리 합니다. 그럼 하루에 적어도 5번이나 4번 하는데 그 소리가 3시간 2시간 계속해서 공부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나중에 배가 붓고요 눈이 붓고 역시 목구멍에서 피가 그냥 나오는게 아니고 가래에 뭉쳐서 피가 묻어 나옵니다. 그러면 인제 100일 공부를 하게 되면은 목이 쉬다가 쉬다가 인제 지치지요. 그랬다가 인제 그 목이 쉰 그 사이에 실성음 막 하면 이렇게 나오는 그 성음에서 구성이 붙어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인제 그 구성 소리에 자기 소리에 자기가 반해가지고 시간 가는줄 모르게 그냥 몇 시간씩 할 수가 있단 말이야. 그래 인제 백일공부를 하고 떡 집을 내려오면 목이 쉬어서 말이 안나오지요. 그러면 인제 몸을 전향을 해야지 몸이 그만큼 쇠약해가지고 있는데 그럼 인제 보약도 먹고 인제 목도 살살 풀어야지 그때는 되게 심하게 하면은 안되니까. 그리고 이제 두서너달 지나야 본격적이 소리가 나옵디다. 그럼 두서너달 지나고 인제 완전히 선생님들이 북을 잡고 소리를 시키면은 백일공부 들어가기 전하고 백일공부를 하고 난 후 하고는 하늘과 땅 입니다. 그런것을 누구라고 말 듣는 분들은 참 그런 고패를 몇십번씩 다 당하고 몇 번씩 다 해야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말씀 드리기는 지금 아이들이 소질은 우리보다 더 잘 타고난 아이들도 많습니다. 목 구성 이든지 머리든지 그 재주가 말이지요. 하면은 그만한 공부를 안해요. 말하자면 그렇게 지독한 우리 시대와 같은 공부를 안해요. 우리는 또 못한 편입니다. 옛날 선생들의 얘기를 들으면 토굴을 파고 가서 3년을 공부를 해가지고 나와서 시골 가서 소리 아는 사람 한테는 안한답니다. 시골로 가서 머슴을 한마당 불러놓고 멍석을 깔고 막걸리 받아놓고 돼지 잡아놓고 밤새도록 소리를 한답니다 그 사람들 듣는데. 촌 머슴들 듣는데 소리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하면은 그 사람들이 더 소리에 도취가 되어가지고 잠을 안자고 밤새도록 들으면은 선생이 아 인제 내가 성공이다 하고 나오고 그 사람들이 그 소리를 안 듣고 자면은 역시 내 소리가 모자라는 구나 하고 또 토굴을 파고 들어 갔답니다. 네. 그러니 지금 공부의 실력이라는게 그마만큼 어렵고 지독스레 해야만 어떤 것이고 예술이나 뭣이나 그렇게 지독스럽게 해야만 누구란 말을 듣고 이름을 얻는다는것 그걸 제가 참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 용인사에서 백일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다음해에 다시 이화중선과 그 일행에 참가해서 무대에 서기 시작 했으며 차츰 더욱 원숙해져가는 목소리는 어느때 이화중선을 능가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노들강 초록물` 박귀희, 김소희가 불러 줍니다.

18살때까지 이화중선과 함께 전국 각지의 무대를 누비던 박귀희는 다시 한번 자신의 목소리를 다듬기 위해서 전남 담양에 있는 채실산중으로 입산, 당시 함께 명성을 떨치던 김소희와 더불어 또 한번 백일 공부를 했습니다. 담양 산중에서 백일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곧 상경해서 오케레코드에서 `단가`와 `심청가`를 취입 했으며 다음 해에는 한양 창극단에 입단한 후 다시 3년 동안 단체 생활을 하고 22살 때 스스로 동일 창극단을 창립 했습니다. 그 당시 오케레코드의 전속단체이던 조선악극단은 국내 뿐만아니라 멀리 만주, 일본, 중국 등지에서도 인기를 모았으며 그 밖에 성보가극단, 약초악극단 등이 기세를 벌이던 시절 22살의 경상도 아가씨인 박귀희는 당시에 명창이던 임방울, 박초월, 한용숙, 강난정 등과 함께 동일창극단을 만들고 만주 지방으로 진출 했습니다. 그 무렵 동일창극단에 가장 인기 있었던 레파토리는 `일목장군`, 물론 남장을 한 미인 박귀희가 주연으로 일목장군 역을 맡았으며 향수에 젖은 만주 일대의 교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습니다. 창극 `일목장군`은 매회마다 초만원을 이루었고 극단 이름보다 박귀희의 이름이 더욱 유명했으며 박귀희가 남장을 한 미녀란 것을 모르는 여성 팬들이 떼지어 사랑의 쟁탈전을 벌임으로써 웃지못할 넌센스를 빗기도 했습니다.
`새타령` 박초월, 박귀희가 불러줍니다.

해방 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국악단체인 여성국악동회를 창립하고 김소희와 함께 눈부신 국악 활동을 하였으며 명창 박귀희는 다시 돈암동에 민속예술학원을 만들어 8년동안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1959년에는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창립했으며 다음해에는 일본 도쿄 시부야 구에 한국무학원을 세우고 원장에 취임했을 뿐만아니라 한국 가무예술단을 이끌고 일본 각지를 순회하면서 교포 위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귀희, 김소희가 불러주는 `꽃타령` 입니다.

현재는 서울 종로구 운이동 79-1에 살면서 동대문구 석관동에 있는 한국국악예술학교 상무이사이며 또한 일본 도쿄에 있는 한국무학원 원장이기도 한 명창 박귀희. 창 만이 아니라 작곡에도 능해서 `달님`, `뽕 따러 가세`, `애수의 가을밤`, `꽃타령`, `노들강 초록물` 등 개성적인 창을 많이 남겨준 명창 박귀희는 지금 후진 양성으로 동분서주 하고 있지만은 언젠가는 다시 한번 그의 독창적인 창이 나와서 팬들의 심금을 또 한번 울려 줄 것입니다.

흘러간 세월속에 묻혀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사람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박귀희 편으로 구성 최호영, 아나운서 우재근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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