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 스타 앨범.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금사향 편 입니다.
- 낙엽이 뒹구는 쓸쓸한 언덕을 넘어기나긴 세월은 덧없이 흘러 갔지만 앳된 목소리의 여운은 지금도 남아있고, 눈을 감으면 귓가에서 맴을 도는 그리운 노래. 그 노래를 불러 준 금사향. 가수 금사향은 굴러가는 방울 소리를 연상케 하는 앳되면서도 감미롭고 달콤함 목소리로 `님 계신 전선`, `홍콩 아가씨`, `앵두골 옥이`를 불러 전국에 가요 팬들을 열광케 했던 만년 꾀꼬리 이기도 합니다. 구름다리 넘을 때에 몸부림을 칩니다. 붉은 입술 깨물면서 몸부림을 칩니다. 차라리 가실 바엔 맹세는 왜 남겼소. 아 부산차는 떠나 갑니다. `눈물의 부산차` 금사향의 목소리 입니다. 청초한 모습, 아직도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가수 금사향이 인기의 정상을 향해 발돋움을 할 그 무렵에 돈과 사랑과 술이 술렁되는 국제 항구 홍콩이 곧 잘 노래의 소재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한들거리는 귀걸이 꽃 처럼 아름답고 티 없는 순정을 간직한 꽃 파는 아가씨. 아직은 보이지 않는 님에게 애타게 호소하는 방울같은 목소리.
- 꽃 사세요. 꽃 사세요.
- 이 봐.
- 어머나.
- 뭐라고 했지?
- 꽃 사라고 했어요.
- 무슨 꽃 인데?
- 영란꽃이에요.
- 영란꽃?
- 네.
- 얼마야?
- 어머, 저 많이 취하셨군요?
- 뭐라구?
- 아 저 이러지 마세요.
- 이리 오라구.
- 이러지 마세요.
- 잔소리 말고 따라와.
- 이거 봐요.
- 당신 누구요?
- 많이 취하신 모양인데 공연히 그러지 말고 돌아 가시오. 어?
- 아아아 아니 뭐뭐 뭐라고?
- 아가씨.
- 네?
- 자, 이젠 어서 가서 꽃을 팔아요.
- 네.
- 염려 말고 어서 꽃을 팔러 가라니까.
- 저어...
- 내가 여기서 지켜 줄 테니까 염려하지 말아요.
- 저 이 꽃 한송이 드리겠어요.
- 음? 오! 아주 아름다운 꽃이네.
- 정말이세요?
- 음. 향기도 좋고.
- 고마워요.
- 하하하하. 뭘.
- 홍콩의 밤거리를 무대로 중국풍의 무드가 살짝 가미된 이재호 작곡의 `홍콩 아가씨` 금사향의 대표적인 히트곡 입니다.
- 1952년 아직 6·25의 전운이 가시지 않은 피난 도시 부산에서 님 계신 전선을 불러 각광을 받기 시작한 금사향이 이 `홍콩 아가씨`를 내놓자 잠시 동안에 부산항을 휩쓸고 이어서 전국을 섭권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 그 당시에는 어떻게 된건지 연습으로 노래를 해도 발수 갈채가 많았었어요. 그런데 그 `홍콩 아가씨`는 그 때 당시 이제 김광수 씨 밴드가 두각을 나타냈었을 때지요. 부산에서 한창. 그 때 인제 하는데 그 선생님 자신도 이 `홍콩 아가씨`는 좋은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고 알송달송한 곡이라고 했는데 하면은 할 수록 그런데로 매력이 있는 곡이라고 하더니 뜻하지 않게 히트가 됐어요. 그래서 그 때 `페르시아 왕자` 허민 씨 그 노래 하고 이제 겨뤘는데 한복남 사장님 말씀이 그랬어요. `페르시아 왕자`로써는 이제 기와집을 받고 `홍콩 아가씨`로써는 벽돌집을 지었다고 말했어요.
- 남들은 외롭고 괴롭기만한 부산 피난이었지만 자기는 오히려 인기의 정상에서 인생의 환희를 맛볼수 있었다는 금사향은 1929년 1월 30일생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곧 서울로 이사해서 종로구 돈의동에서 자라난 서울 아가씨 입니다. 양복점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두 남매 중 딸로 태어난 금사향의 본명은 최영필. 소녀 최영필의 아버지는 보성전문 출신으로 재학시절엔 음악부장을 지냈고 양복점을 하면서도 바이올린을 잘 켜는 아마추어 음악가 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빠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로 코리아 심포니의 퍼스트 였으며 최영필 역시 아버지나 오빠에 못지 않은 음악적 재질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굴러가는 방울 소리를 연상케 하는 맑은 목소리는 어렸을 때 부터 그의 장기이기도 했습니다. `님 계신 전선`, `홍콩 아가씨`에 이어 불러 준 금사향의 `앵두골 옥이`
- 음악적 분위기속에서 자란 소녀 최영필은 서울 교동 국민학교를 졸업한 다음 부모님들을 따라서 중국 북경으로 이사 그곳에서 여학교를 졸업 했습니다. 북경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8·15 직전에 귀국한 최영필은 곧 타이프 학원에 들어가 타이프 치는 것을 배운 다음 상공부 서미국에 취직해서 4,5개월을 지냈습니다. 거리는 환희에 넘치는 조국 광복을 맞이하고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이 한창 유행하고 있던 그 무렵, 단조로운 타이프 소리에 실증을 느낀 최영필은 어느 날 갑자기 무대에 올라섰습니다. 럭키 레코드로 이름을 바꾼 오케이 레코드가 주최한 가요 콩쿨의 무대, 천재소녀 최영필은 이 가요 콩쿨의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4500명 모인 가운데서 12명이 뽑히고 거기서 다시 1등에 당선 했습니다. 타이피스트에서 하루 아침에 가수가 된 금사향은 박시춘 작곡의 `첫 사랑`을 취입하고 원방현, 송민도, 옥두옥, 이예성 등과 함께 KBS 전속 가수 1기생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트란지스터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방송국에선 방송을 해도 전기 사정이 나빠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없는 당시로써는 금사향의 목소리도 스튜디오에서만 울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수 금사향은 서울 레코드의 김교성에게 픽업 돼 99만원을 받고 전속계약을 맺었으며 뒤 이어 `호들기의 꿈`, `가랑비 연사`, `안개 낀 부두`, `이동극단 아가씨` 등을 내놨습니다. 금사향이 부르는 `이동극단 아가씨` 입니다.
- 금사향이 24살 때 그 해도 저물어 가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택해 금사향은 사랑해주는 님과 더불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부산극장에서 진행되고 있던 연말 대공연 때문에 신혼의 단꿈도 제대로 꾸지 못하고 쓸쓸한 첫날 밤을 보내야만 했던 금사향은 자기의 결혼과 이혼의 매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요. 이제 그 때가 24살 되던 해에 12월 24일 이지요. 결혼 상대자는 뭐 말씀 드리면은 아시겠지만 제가 말씀 안 드리겠어요. 원래는 그 분이 인제 한 4년 짝사랑을 했다고 바깥에서는 소문이 났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가 소박을 당했으니까 나중에는 제가 울게 되었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가만히 생각하면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그럴적에 빠져 죽으라고 뒀으면 좋았을걸 제가 빠진거나 마찬가지 였어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둘이 다 바쁜 사이였었기 때문에 결혼 첫날 밤에도 부산극장 그 총연습 때문에 첫날 밤 혼자 이모님 하고 촛불을 켜고 독수공방을 했어요. 그러더니 결국 이혼 한 후에 제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다방에서 김호길 선생님이 사향이가 짝사랑을 했군. 그러면서 애틋한 노래를 하나 작곡을 해줄까. 그래가지고 그 선생님 작사 작곡으로 짝사랑이라는 노래를 한 번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 보통 때는 말 소리가 저음이고 또 느린 편이지만 한 번 무대에 올라서기만 하면 빠르고 또 높아져 만년 꾀꼬리 혹은 은방울 아가씨 라는 애칭으로 불리우기도 했던 금사향은 한동안 양계, 양돈을 해보기도 했으며 심금을 울려주는 애절한 노래를 좋아하는 감상적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피난 도시 부산에서 한복남의 도미도 레코드에 `님 계신 전선`, `홍콩 아가씨`, `남북의 처녀` 등을 취입해 계속 히트를 했던 금사향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랑의 상처를 안고 실의를 느껴보기도 했으며 짝사랑 아닌 짝사랑의 시름으로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금사향에게 작곡가 김호길은 정말 `짝사랑`이란 노래를 작곡해 주기도 했고 선배 가수들의 위로를 받기도 했으며 계속 무대와 방송으로 자신을 다짐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금사향은 자기가 사람보단 오히려 노래와 결혼한 노래의 애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고, 피로를 모르는 군 위문공연에 나서기 시작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에겐 은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금사향. 금사향은 자기가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죽음 아니겠는냐고 말하리만큼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를 사랑하는 끈질긴 가수이기도 했습니다. `임 가신 사이공` 군 위문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온 금사향이 태평양 레코드에서 취입한 노래 입니다. 태평양 레코드에서 취입한 이 `임 가신 사이공`과 `앵두골 옥이`가 마지막 취입이 된 금사향은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다녔던 군 위문공연에 얽힌 추억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 네. 참 재밌어요. 군 위문은 왜 재밌냐 하면 이 후방에서는 모든 조건이 다 구비돼 있기 때문에 꽃다발 같은 것도 받을 수 있고 그렇지만 최전방 같은데서는 푸른 소나무 가지를 끊어 가지고 백지에 아무렇게나 싸서 그냥 아무 노끈으로나 매가지고 말이에요 크고 좋은 꽃다발 같은 그런 효과를 가지고설랑 노래하면 전주간주가 나가도록 손을 붙들고 놔주질 않아서 애 먹은 적도 있구요. 한참 또 인제 진해에 그 해병대 해병대라고 그러지만 ...병대라고 그러잖아요? 근데 인제 그 해병대에 극장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한창 손석우 선생님 작곡으로 돼있는 `마도로스 와이프` 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데 어떤 군인 아저씨가 한 분이 오시더니 그 때는 제가 연보라색 등이 많이 파여진 드레스를 입고 나가서 불렀는데 얄밉게 생각이 됐는지 어쨌는지 등을 바나나 같은 손으로 탁 때려 가지고 바나나 자국인지 단풍 자국인지 모르게 크게 자국을 내서 그 해군 헌병대에서 와가지고 잡아간다 그래서 제가 너무너무 좋아서 그런거니까 그냥 두십시오 그랬어요. 눈물이 나도록 아팠지만 말이에요. 그 군인 아저씨들이 그런 기백이 없으면 또 전쟁을 할수가 없지 않을거 아니에요?
- 극장 간판에 자기의 얼굴이 나오면 부끄러워 자기의 얼굴을 지워 달라고 했던 금사향. 그래서 금사향은 선배 가수들에게 귀여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무대위에 오르기만 하면 전혀 딴 사람처럼 알뜰하게 노래를 불러 터질듯한 갈채를 받기도 했습니다. 금사향은 항상 이웃동 치마에 실키 구두를 신고 무대에 나섰으며 고등어 반토막이라 불리우리만큼 자그마한 몸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차분하고 알차고 귀여운 아가씨였던 금사향. 이제는 고등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 심도면 동살리에 있는 알뜰한 보금자리에 언젠가 양계, 양돈을 해봤던 취미를 살려서 양계와 양돈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도 축산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또 하나의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피난도시 부산에서 `홍콩 아가씨` 한 곡으로 하루 아침에 스타의 자리에 올라갔던 금사향은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높고 든든한 자리에 이르렀을런지도 모르는 천부의 가수 였지만 여러번 불운은 맛 봐야만 했고 때로는 고독 해야만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월드컵, 타이거 같은 곳에 출입 하면서 죽는 날까지 무대에 서기를 다짐하는 불사조의 가수요 집착의 가수이기도 합니다.
- 글쎄요. 너무 그 동안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게 돼있기 때문에 별로 열아홉 살 때나 지금이나 남들이 그 당시에는 제 후배가 없었기 때문에 제가 언니라고만 전부 불렀지 저를 보고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는데 인제 세월이 갔다는 것은 요즘엔 언니라고 부르다 아줌마라고 부르는거 그것이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느끼고 하루도 빼 놓지 않고 들여다 보는 거울이었었지만 얼굴 형체가 바뀌어 졌다는거 그것으로써 느끼지 그 바쁜 시간 때문에 별로 느껴보질 못했어요. 근데 앞으로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 까지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저는 노래하고 결혼한 사람이나 마찬가지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에요. 그런데 이 다음에 더 늙어서 할 수 있는것은 역시 화초 가꾸기 같은거 금붕어, 새 그런거 소리 안나고 조용한걸 길러보고 싶어요.
- 지금도 아직 데굴데굴 굴러가는 은방울 같은 목소리로 달콤하고 간지러운 여운을 남기며 불러주는 금사향의 노래는 영원히 우리들의 귓가에서 맴을 도는 노래가 될 것이며 가요사에 빛나는 가수가 될 것 입니다.
(입력일 : 2007.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