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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경 편 - ‘산장의 여인’으로 가요계의 프리마돈나 되다
권혜경 편
‘산장의 여인’으로 가요계의 프리마돈나 되다
1971.08.22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권혜경 편 입니다.

- 가버린 세월속에 묻혀버린 추억이건만 눈을 감으면 파노라마 처럼 되살아 나는 청춘의 꿈 잊을 수 없는 노래. 그 노래를 불러 우리에게 애틋한 추억을 심어 주었던 가수 권혜경. 권혜경은 `산장의 여인`, `호반의 벤치` 등 세미 클래식한 노래를 애정어린 목소리로 불러 대중의 감상을 깊숙히 파고 들었던 이색적인 가수이기도 했습니다. 국산 영화가 차츰 활발해지기 시작하던 1956년 그 무렵,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이 히트를 하고 있을 때, 가요계의 왕좌를 누비며 찬란한 각광을 받고 등장했던 권혜경. `산장의 여인` 이레 `청춘 일요일`, `첫사랑의 화원`, `사랑이 가기 전에` 등 거푸 히트곡 만을 내놓아 가요계에 프리마돈나라 불리우던 권혜경은 또 하나 영원한 청춘의 노래요 영원한 연인의 노래를 내놓았습니다. `호반의 벤치`.

- 젊은 연인들이 서로 부르며 서로 물어 보았던 `호반의 벤치`. 담백하면서도 애정어린 권혜경의 목소리 입니다.

- 세미 클래식한 노래를 불러 가요계의 프리마돈나라고 불리우기도 했던 권혜경은 1931년 11월 12일생 본명은 권오명. 세무소원이었던 아버지의 2남 4녀중 넷째로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부터 기막힌 천부의 소질이 있어서 모르는 노래가 없었던 권오명은 유치원에서 전부 아는 노래만을 가르쳐서 재미가 없다고 한 달 만에 그만 두었을 정도 였으며 9살 땐 그 무렵 유행했던 일본 유행가 까지도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의정부 국민학교를 거쳐서 서울 여학교를 졸업한 권오명은 조흥은행 의정부 지점에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이 마침 아버지의 환갑날 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환갑날이기는 했지만 이미 결심을 단단히 했던 권오명은 예정대로 kbs 전속 가수 2기생에 응모해 합격 했습니다. 천 명이 모인 가운데서 16명이 뽑히고 그 중에서 오직 한 사람 남은 가수가 된 권혜경은 kbs에서 6개월 정도 가요 공부를 마친 다음 황문평 작곡인 `꽃 중의 꽃`을 불러 일약 화제를 모으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자 각 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하자는 권유가 오기 시작 했으며 이윽고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산장의 여인`을 취입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권혜경의 나이 25세 작사자 반야월은 아직 마산 방송국에 재직 하면서 마산에 있는 국립결핵요양소에 위문을 다니기도 했던 시절 이었습니다.


- 경숙아.

- 왜 언니.

- 이렇게 쓸쓸하고 아무도 없는 산장에 홀로있지 말고 함께 내려 가자구나.

- 아니야. 싫어. 난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병든 여자인걸.

- 아휴 얜, 그렇게 애처로운 소리 말고 어서 함께 가자니까.

- 난 즐거웠던 추억만 가지고 살아도 돼. 죽는 날까지 풀벌레 소리만 들으면서 살테야.

- 아휴, 정말 내 가슴이 터지는것 같구나. 아 글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쓸쓸한 산장에서 어떻게 혼자 살겠다는 거야.

- 언니, 염려 마.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 분을 만나 볼 수 있는 날이 올런지도 모르니까.

- 아휴, 그렇게만 되면 오죽 좋겠니.

- 난 그걸 믿고 이렇게 외로움을 견디며 살고 있는거야.


- 쓸쓸한 산장에서 외롭게 사는 여인의 노래 `산장의 여인` 권혜경의 데뷔 곡 입니다.

- 취입한지 불과 20일 만에 가는 곳 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던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 `산장의 여인`을 부른 권혜경은 하루 아침에 스타의 정상에 올랐지만 그러나 완고 하기만 했던 부모님들의 성화 때문에 집을 쫓겨나야만 하는 슬픔을 안기도 했습니다. 희비가 엇갈렸던 그 시절, 권혜경은 그 무렵의 추억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 제가 이름을 바꿔가지고 나왔는데도 집에서 가수가 됐다는 것을 알고 뭐 반대 반대 하는것을 제가 무릅쓰고 나왔습니다만은 그래서 이제 어머니는 10만원 이라는 돈을 주면서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니까 나가라 그래서 이제 제가 조그마한 방을 내자동에다가 하나 얻어가지고 자취생활을 하면서 참 어머니, 아버지의 지금 내쫓는 그 당시의 부모의 심정도 이해를 하고 제 자신도 굉장히 참 비참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쫓겨 났으니까 저의 생활 상태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노래를 열심히 해서 부모에게 보답을 드려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에서 노래를 열심히 불렀고 또 그 노래를 취입하고 나니까는 내 취입을 아는데서 벌써 각 레코드 회사에서 내놨는지는 모르지만은 그 레코드 상점에서 굉장히 그 많이 흘러 나왔어요. 그 당시는 텔레비젼이 없고 해서 얼굴도 잘 모릅니다만 그 당시 백화점 앞에 가면은 `산장의 여인` 이 나오고 그 당시 이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 이 굉장히 히트 했었어요. 그 노래를 들을 때는 괜히 지나 가는데 내 노래만 나오면은 막 도망가고 누가 쫓아 오는것 같고 창피 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도망도 다녀보고 해봤습니다.

- `산장의 여인` 단 한 곡으로 가요계의 프리마돈나가 된 반면에 집에서 쫓겨나 홀로 자취를 시작 해야만 했던 권혜경. 어쩌면 권혜경은 이 때 부터 고독의 여인이기 시작 했는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때때로 고독 속에 묻혀야만 했던 권혜경은 그러나 `산장의 여인`에 이어 계속 히트곡을 내놨습니다. `산장의 여인`에 이어 가수 권혜경을 더욱 높은 스타의 자리로 밀어 올렸던 `첫사랑의 화원`.
어쩌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고독하기 마련이기도 한 세상 이지만 그러나 유독 서로 사랑 하면서도 맺어 질 수 없는 사랑을 해야만 했던 권혜경은 더욱 쓸쓸해야만 했고 그래서 그가 부른 `첫사랑의 화원`은 더욱 애절하게 사람의 가슴을 울려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때는 오직 사랑하는 그 사람 한 사람만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권혜경. 권혜경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 첫사랑의 연인 얘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 참 창피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가수 되기 전에 아저씨 아저씨 하던 분이 계셨어요. 근데 제가 커 가면서 `산장의 여인` 부르고 난 다음에 제가 처음으로 첫사랑을 해봤습니다. 그 당시 26살인데 저는 연애라고는 전혀 몰랐구요. 한 5년간 플라토닉 러브를 해봤습니다. 이 정신적인 연애라는건 해보시지 않은 분은 잘 모르실 거에요. 그래서 그 분을 위해서 제가 언제든지 무대에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노래를 부른 일도 있습니다만 여러 팬들이 들으면 좀 서운 하실지 몰라요. 그 당시는 극장에 오신 관중들 보다는 한 사람의 얼굴을 생각 하고서 노래를 불렀던 것은 사실이에요. 지금은 다 잊어 버렸습니다.

- 그 무렵, 시공단 공연에선 거푸 몇 번이고 앙콜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부를 노래가 없어서 절절 매기도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인기의 성좌을 누리기 시작한 권혜경은 노래 뿐만 아니라 능숙한 제스츄어와 세련된 무대 매너로 선배 가수들이 무색하리 만큼 앞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거리를 가다가 자기 노래가 나오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는 권혜경. 그러나 권혜경은 노래를 부를 때는 노래 그 자체에 도취 돼 저절로 제스츄어가 나오고 노래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자기가 부르는 노래에 대해 여간 신경을 쓰기도 했던 권혜경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노래만을 골라 일년에 4곡 이상을 취입 하지 않은 개성적인 가수 이기도 했습니다. 후라이 보이가 사회를 하고 박춘석 악단이 반주를 하는 오아시스 그랜드 쇼와 함께 지방 공연에 돌아 다니면서 때로는 뜻 밖의고생을 해야만 했던 권혜경은 과로 때문에 폐를 앓고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동심초` 그 때 한창 인기 절정에 있었던 현희가 주연하는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 권혜경의 원숙한 목소리 입니다.

- 1961년 부터 66년 까지 여러 병원을 전전 하면서 치료를 했으나 신통한 효음을 보지 못하고 낙담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권혜경은 이윽고 더 이상 치료를 해도 고칠 수 없다는 의사들의 말에 절망을 느끼고 조용히 외로운 산장을 찾아 갔습니다. 강원도 산골에 있는 만월사.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만월사에 홀로 있으면서 권혜경은 자기가 불렀던 `산장의 여인`이 들려오면 홀로 목이 메 울기도 했었습니다. 어쩌면 그 `산장의 여인`이란 노래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권혜경. 권혜경은 그 무렵의 추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습니다.


- 제가 병원에 몇 년 동안 입원하고 있다가 의사들도 못 고친다고 그래가지고 산 속에 들어가 있었을 적에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그 당시 제가 도착하자마자 엽서를 각 방송국에다 다 띄웠는데 이 동아방송이 처음으로 `3시 다이얼` 이라는게 생기던 날이었어요. 그 날에 최정옥 씨가 병에 대한 성원의 편지를 보내주라 하면서 `동심초`가 상당히 유명 했을 때 제가 산 속에서 마당에 서서 그 노래를 들었을적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제가 막 울었어요. 그 당시 제가 한 달간 요양 하면서 그 무서운 판막증을 고쳐서 나와서 다시 무대에 섰었을 때 모든 열광적인 박수를 줬을적에 여러번 울었습니다.


- 그러나 결코 아주 낙담해 버릴 수 만은 없던 권혜경은 죽기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노래를 들려 주기로 다짐을 하고 수척한 몸을 이끌고 인근에 있는 부대로 위문을 다니기 시작 했습니다. 무대나 방송에 출연을 못 하는 대신에 군 위문에 주력하기 시작한 권혜경은 군 위문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고 1966년 12월엔 월남으로 위문 공연을 가서 2년 가까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한 번 위문 공연에 나서면 한 달에 100회 정도의 공연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후두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명동 아줌마` 반석같은 스타의 자리를 누리고 있을 무렵에 권혜경의 목소리 입니다.

- 1967년경에는 모든것을 잊고 결혼 해 버릴 생각으로 여러차례 맞선을 보기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 버렸고 문제의 인물 이수근과의 결혼설이 한 때 떠돌기도 했지만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권혜경은 한 때 청계천 2가에서 한식점을 경영 했으나 역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지금은 남가좌동 130-23에 있는 집에서 혼자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결코 외로운 여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권혜경. 권혜경은 이루지 못했던 알뜰한 첫사랑의 추억 속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무대 보다는 오히려 조용한 농장을 갖고 싶다고 말하는 목가적인 여성 입니다. 사진에 남다른 취미가 있고, 엽서, 우표 그 밖에 엽전 등 일종의 수집광이기도 한 가수 권혜경은 무대 보다는 농장을 원하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노는 9월에는 교포 위문을 하기 위해 일본에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고독하되 고독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서도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러 온 이색적인 가수 권혜경. 권혜경이 불러 준 세미 클래식한 노래의 여운은 아마도 영원히 우리들의 추억속에 남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는 더욱 많은 노래를 불러 줄 것입니다.

- 흘러 간 세월속에 묻혀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권혜경 편으로 출연에 손정아, 고경선 그리고 해설에 안정국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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