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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앨범
박재홍 편 - ‘울고넘는 박달재’ 대유행의 주인공
박재홍 편
‘울고넘는 박달재’ 대유행의 주인공
1971.07.18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박재홍 편 입니다.

-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세월은 흘러가 버렸어도 잊지못할 추억과 함께 그 노래를 불러준 가수 박재홍. 박재홍은 건장하여 무뚝뚝한 인상을 주는 수도 있지만 그러나 가장 의리깊고 또 다정다감한 사나이 이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을 태운 버스가 기중기에 매달려 끌려가던 부산 정치파동. 딱벌떼, 해골단 등이 난무하던 시절에 뒤거래를 읊은 `물방아 도는 내력`. 벼슬도 싫다 만은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길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 보련다.
피난시절에 항도 부산에서 이 `물방아 도는 내력` 을 불러 일약 톱싱어의 왕좌에 올랐던 박재홍. 박재홍이 부른 이 `물방아 도는 내력` 은 당시 도미도 레코드가 푸짐하게 돈을 벌었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부산 국제 시장이 아직 불타기 전 시장 골목골목 마다 어른 아이 할거 없이 입에서 옮아갔던 `물방아 도는 내력`. 이 노래를 불러 불멸의 가수가 된 박재홍은 1924년 4월 7일 생,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109번지가 그의 고향 입니다. 토목건설 청부업을 하는 아버지의 두 형제 중 맞이로 태어난 박재홍은 시흥에서 보통학교 3학년 때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신흥 보통학교로 전학을 간 후 아버지의 사업장을 따라 여러 군데로 전전 하면서 학교를 옮겼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 하기는 했으나 역시 아버지의 사업장을 따라서 전전하는 동안에 학업을 제대로 계속 하지 못하고 단계 수력 발전소, 수풍 수력 발전소 등에서 전기 기술을 습득 하기도 했던 박재홍. 해방되던 해 서울에 있는 조선 전선 주식회사에 시험을 보고 입사한 박재홍은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46년 중앙극장에서 개최된 오케이 레코드가 주최하는 전국 콩쿨에 당당 1등에 당선 됨으로써 비로소 가수로서 등장하기 시작 했습니다. 무려 4000여명이 모인 가요 콩쿨에서 당당 1등에 당선한 박재홍의 데뷰곡은 `눈물의 오리정` 입니다.
박시춘, 김해송, 남인수 등의 심사를 받고 4000명 중에서 1등을 한 박재홍은 오케이 레코드에 전속이 돼 `눈물의 오리정` 을 비롯한 `불사를 일기장` 등 수 많은 노래를 취입하고 3년 후엔 서울 레코드로 자리를 옮겨 `마음의 사랑`,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 등 거푸 히트곡을 취입 했습니다.
해방 후 작사가 반야월은 남대문 악극단을 창설해서 공연차 지방으로 순회 하던 중 단원들과 같이 충주행 버스를 타고 비 나리는 박달재를 넘던중 고개마루에서 버스가 고장이 나서 쉬게 됐는데 그 때 박달재 고개 마루에 있는 성황당 앞에서는 뜻밖에도 어느 농촌 부부의 애절한 이별 장면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 여보, 그래 꼭 떠나셔야만 하갔시유?

- 그럼 같이 앉아서 굶어죽잔 말인가?

- 허기사 그러기는 허지만서두.

- 떠나는 나도 오죽 하겄는가베. 눈 딱 감고 떠날 것잉께 임자도 마음 단단히 묵고 어린것 잘 키우면서 3년만 기다려 달라고.

- 고향에 남는 나야 고생을 해도 참을 수 있갔지만 여보, 그래 당신은 어디를 갈 참이지유?

- 어디 오라는데가 있어서 가는것도 아니고 우선 발길 닿는데로 가 봐야 겄어.

- 아유 참 하나님도 무심 하시지. 어쩌자고 흉년이 들어갔고 이렇게...

- 자자자 비도 오고 난 가기는 가야 할 것잉께 임자도 돌아서라고.

- 여보!

- 앗따 3년만 기다리랑께. 내 꼭 돈 많이 벌어가지고 올 것잉께.

- 여보!


- 애절한 이별의 사연이 담긴 `울고넘는 박달재` 박재홍이 불러 줍니다.

- `물레방아 도는 내력` 과 함께 박재홍의 대표 곡이라 할 수 있는 이 `울고넘는 박달재` 는 한동안 대유행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때의 추억을 아쉬워 하고 있는 박재홍이 그 무렵의 얘길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시방도 6·25 때니 만큼은 잊어지지가 않는군요. 한 두어달 됐는데 유행이 한참 돼고서 6·25가 터지지 않았어요? 그래 이제 다들 피난 보따리를 다 메고 애들 데리고 나가는데 실질적으로 제가 박달재를 부르긴 했습니다만은 박달재가 어디 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나가는 길에 그리로 좀 가볼까 했는데 경상북도 어디 뭐 문경 쪽이라고 그래서 가보지도 못하고 피난민 하고 같이 내려 가면서 그 사람들이 박달재를 불러요. 그럼 나도 따라서 같이 부르지요. 그래 그 사람들은 내가 부른건줄 모르니까. 그래서 부산까지 내려가느라고 고생도 했습니다만 그 당시에 뭐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그래서 그 박달재가 특히 그 6·25 때 나왔기 때문에 아주 그 잊혀지지가 않아요.


- 서울 레코드에서 고려 레코드로 옮긴 후 6·25 동난을 맞이한 박재홍은 부산으로 피난을 해서 한때 국제시장에서 유신전기상회라는 상점을 차리고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별명이 물소인 박재홍, 박재홍은 그야말로 물소처럼 말수도 적고 화내는 법이 없었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을 때에도 박재홍의 가게는 화재를 면했는데 주위에서는 박재홍이 물소처럼 다소곳 하고 또 온정이 있어서 아마도 신이 지켜주었을거라고 하리만큼 박재홍은 온화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전기상회를 하다가 도미도 레코드에서 `물레방아 도는 내력`, `향수` 등 일대 히트곡을 낸 박재홍은 다시 미도파 레코드로 옮겨가서 `경상도 아가씨`, `비에젖은 주막집` 등을 내놓아 더욱 놓은 인기의 정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미도파 레코드에서 100여곡을 취입한 박재홍은 서울로 돌아와서 신신 레코드 소속이 됐는데 그 때 재정난으로 쓰러져 가는 신신 레코드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 때문 이었습니다.
`돌아가자 하동포구`, `꿈에 본 대동강` 등과 함께 신신 레코드에서 `유정천리` 를 불렀던 그 시절을 지금의 박재홍은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 있습니다.

- 제가 이 가수 생활을 하기 전에는 닭 같은거나 이 무슨 하여튼 이런걸 내 손으로 잡기도 했지만은 시방은 버러지를 내 손을 하나도 죽이질 못해요.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고, 이 여러 그 우리 같은 서울의 시민들이 울고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그냥 보고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유당 말기 때도 그 당시에 뭡니까 그 해원성신이 돌아가시고 또 얼마 안돼서 또 이 조 박사님이 돌아가셔서 참 아주 슬픔에 잠겨있을 때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참 무대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 많이 울었지요. 울면 이제 학생들도 많이 같이 따라서 부르고 막 울다시피 해서 하는데 가사를 실질 제가 바꾸지 않았는데 학생들이 많이 바꿨어요. 뭐 조기선거 왠 말이냐 하면서 뭐 또 벽사지공 왠말이냐 해서 자유당에 비가 오고 민주당에 꽃이 핀다고 한건 제가 한게 아닌데 부산 극장에서 한번 하는데 부산에 내려가서 그 당시에 ....김 선생님이 같이 내려갔을 땐데 아 학생들이 그냥 그 가사 바꾼걸로 한번 하라고 소동을 해서 한번 제가 바꿔서 한번 해본적이 있어요. 이러니 그냥 전 관중이 아우성을 치는데 좋다고 하지만은 끝나고 나오는데 모퉁이에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냥 대가리를 뭐가 치는데 보니 몽둥이를 쳐서 내가 까무라친 적이 있는데 그래서 한 이틀 출연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제가 많이 좀 자유당 한테 혼도 좀 났고 그래서 `유정천리` 잊어지지 않고, 그 당시에 4·19 학생들은 제가 나가면 아이 저기 `유정천리` 온다고 그럽니다. 하하하.

- `유정천리` 에서 히트를 한 박재홍은 다시 신신 레코드에서 `휘파람 불며 언덕을 넘어가자` 그 밖에 200여곡을 취입 했으며 얼마 후에는 박노식, 최성호, 강미혜, 최지희, 배수남, 임희춘, 서영복, 고대원, 금사양, 방태원 등 지금도 쟁쟁하게 이름을 날리는 황금 멤버로 `오아시스 쇼` 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단장으로 있으면서 흥행에도 열의를 보였던 박재홍. 박재홍은 너무나도 다정다감해서 노래를 부를 때는 그야말로 수도승과도 같이 모라경의 표정으로 함께 슬프고 함께 눈물을 머금으며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박재홍의 노래는 모두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파람을 불며 가자 언덕을 넘어 송아지가 엄마 찾는 고개를 넘어 아가씨가 그네 뛰는 정자나무 지나서 휘파람을 불며 가자 어서야 가가 아카시아 꽃잎 향기 풍기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
박재홍이 불러주는 경쾌한 노래 `휘파람 불며 가자`

- 우리에겐 고유의 가요가 없다고 아쉬워 하고 있는 박재홍. 그래서 건전한 창작 가요가 나오기를 염원하고 있는 박재홍. 모방을 하는 가요에는 발전이 없다고 갈파하는 가수 박재홍. 어지러운 가요계의 풍토를 개탄 하면서 유능한 가수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가수 박재홍은 최갑식, 은방울 자매, 박경원 등의 후배 가수를 마음껏 지원 하기도 했습니다. 19세의 전기기사였을 때 16세 나는 아가씨와 친척의 중매로 결혼한 박재홍은 20세에 첫 애를 두어 지금은 이미 손자가 있는 할아버지 이기도 합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멀리 일본에 가서 여러번 교포 위문을 했고 이번 8월 12일에 또다시 일본으로 교포 위문을 떠난다는 가수 박재홍의 자녀 6남매는 모두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음악 가족이기도 합니다. 섭섭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래를 부르는 자녀는 없지만 피아노와 전자 오르겐을 하는 6남매와 함께 박재홍은 78세의 노모를 모시고 정성을 다하는 효자 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신촌에 있는 양옥에 살면서 레코드 재료를 무역하는 사업을 하는 한편 아직도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 박재홍은 역시 아직도 다정다감 하고 물소처럼 화를 내는 법 없이 정다운 노래를 불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건전한 창작 가요와 유능한 후배 가수가 나오기를 염원 하면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 입니다.

(입력일 :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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