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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추억의 스타앨범
김윤심 편 - 재담으로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던 만담가
김윤심 편
재담으로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던 만담가
1971.07.11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만담가 김윤심 편 입니다.

- 세월은 아득한 언덕을 넘어 영원히 흘러가 버렸지만 아직도 우리의 추억속에 남아있는 만담가 김윤심.

김윤심은 한 때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그러나 재담으로 더욱 열광적인 갈채를 받은 만담가 였습니다. 사직골 어느 골목 안엔 아직 박꽃이 하얗게 이우는 초가 지붕이 많았던 그 시절. 당시 동양극장에서 보름 동안이나 롱런을 치고 기생이란 기생은 모두다 구경을 가고 없어서 요리집이 텅텅 비었었다는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 가 한창 인기가 있었을 때, 막간에 나와서 재담을 늘어놓는 소녀 김윤심의 인기 또한 그에 못지 않았으며 그 무렵 김윤심의 만담과 함께 막간의 갈채를 받았던 노래 중에는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아직 홍안 소년 이었던 가수 남인수가 막간에 나와 불렀던 `애수의 소야곡` 입니다.

- 막간 무대를 주름잡고 인기 절정에서 갈채속에 살았던 만담가 김윤심의 본명은 김윤옥. 그의 고향은 황해도 수안 1914년 12월 24일 생 입니다. 금강으로 유명한 수안에서 토목점을 하는 아버지의 3남매 중 가운데로 태어난 김윤옥은 금강촌이기 때문에 예수교도 먼저 들어오고 머리 깎은 사람도 많은 문면의 혜택을 남다르게 먼저 받고 자랐습니다. 수안 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숭애 여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소녀 김윤심은 이미 노래와 연극 등 굿거리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부모님들의 성화같은 꾸중에도 불과하고 굿거리에 도취된 소녀 김윤옥은 여학교 3학년 때 고만 용단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때마침 평양 금천대에 와서 공연을 하는 연극호의 단장 이종철을 찾아갔던 김윤옥. 만담가 김윤심은 아직 김윤옥이었던 그 시절은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 있습니다.

- 또 그 때는 극장에 갔다가 또 들키면은 아주 퇴학이거든. 그러니까 그 부인 스타일을 해가지고 가니까 이종철 씨가 와서 이제 아 그 덤블링을 넘더군요. 그걸 보니까 굉장히 내가 그 이 선생님을 아주 음모하게 됐지. 그 다음 부터는 이제 거기에 나가기로 작정을 했어요. 그 다음에 이제 저는 이제 방학 때는 유치원 보모 노릇을 하고 그 다음에는 이제 학교 공부를 하는 순서가 됐었어요. 그러니까 역시 고학 이었겠지요. 아버님 일찍 세상 떠났으니까 오빠가 이제 돈을 보내주니까 이제 거 지금으로 말하면 뭘까 아르바이트를 하는거지. 아 그래 이제 갔는데 그걸 보고서 반해 가지고 그 단체는 아니고 또 그 희락자는 단체가 또 있어요. 거기로 발을 들여놨죠. 이제 이종철 씨 찾아 갈려고. 거길 가가지고 시험을 보니까 그 땐 가수로 알았어요. 노래를 곧 잘 했던 모양 같아요. 그래 나가서 이제 이제로 생각 하니까 세미 클래식을 했지. 그래가지고 이제 이종철 씨 있는데로 어떻게 전전 따라 갔어요. 따라 가니까 이종철 씨 부인이 아주 아름답더만요. 그걸 모르고 이제 철 없느 마음에 열 아홉살인데 뭐 있어요? 그래 따라 가니까 아름다운 색시가 있으니까 그냥 그 역시 그 그래도 교육을 받았다고 보겠죠. 그 때는 여학교 다니는 사람이 지금 신은봉 언니하고 복혜숙 언니하고 저 밖에 없었어요. 그래 단념 했지요. 그리고 가수로 뻗어 나갔죠. 가수로 뻗어 나가서 지금 이석우 선생님 한테 픽업 됐어요. 이 선생님이 제게 참 피아노까지 주시면서 노래 연습을 하라구요. 그래 노래연습 하라고 했는데 아 일본 가서 취입을 하는데 아따 박자를 경을치게 못 마추내요 제가. 그래가지고 목소리는 특수한 목소리를 가졌는데 가수로 출세 못한것은 박자관념이 나빴고, 또 그것보단 역시 제가 아마 아름답지 못하게 생긴 까닭으로 해서 그 저 작곡가들이 탐을 안냈을런지도 몰라요.

- 그 때 김윤심의 나이 19세. 만담가가 아니라 가수로서 첫 발을 내 디뎠던 것입니다. 그 때 가요계에선 고복수의 `짝사랑` 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타향살이` 로 데뷰해서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고복수의 `짝사랑`.
변사로서 이름을 날리던 조하수와 전옥의 남편 최일 등과 함께 폭소대공연에 참가하는 한편, 김윤심은 빅터 레코드에서 `화류 팔면상` `가정쟁이` `피장파장` `인간척도` 등의 만담을 취입 하기도 했습니다.
애초엔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던 김윤심은 만담 전문으로 전향한 당시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 있습니다.

- 아 그 동기는 이제 그 신무대라는 단체에서 `조선의 어머니` 라는 연극을 하게 됐어요. 그 참 애국적인 그 땐 왜정치하니까 `조선의 어머니` 라는걸 했을 때 그 막간이 이제 나왔는데 `조선의 어머니` 하고 막간에 이제 신불출 이라구요. 지금 이북 가 있죠. 우리나라에서는 만담 처음 하신 분이죠. 그 분이 이제 그 막간에 나가서 연설을 한다구요. 항상 이렇게 오셔 주셔서 감사 합니다. 내일은 뭘 하겠습니다. 뭐 어쩌고 저쩌고 연설을 하는데 이 양반이 살짝 새 버렸다고. 근데 그거 저는 그저 처음에서 부터 마지막까지 그 무대에서 하는거 다 알고있는 였거든요 그 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날 보고 막서를 하라 그 말 이에요. 그래서 이제 젊은 김에 나가서 그 선생님 하는 얘길 그냥 하나에서 열까지 꼭 같이 그냥 읊었어요. 아 그랬더니 잘 한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또 조하서 씨 라고 있어요 또. 그 분은 우리나라에서 이제 활동사진 변사를 하는 분 인데 그 분 한테 이제 또 픽업이 됐어요. 만담을 하면은 이건 와따다 말이야 노래도 잘하고. 그래서 그 때 `화류팔면상` 이란 만담을 썼어요. 거기에서 이제 동기가 됐지요. 지금 생각 하기에는 무대에서 환영 받는거는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는게 지금 별로 그렇게 보아지지 않아요. 제가 저를 과찬하는 그렇게 돼서 그저 여류만담가가 되죠. 아 그런데 이제 그 우리나라 이제 그 팔도 사투리 그 그 때는 아무도 못 했습니다. 이거 해방이 되고나서 이제 6·25 동난이 나고 나서 사투리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때는 사투리 하는 사람은 저 하나 뿐이었어요. 그래서 그 화류팔면상 이라는데서 팔도강산 기생 아가씨들을 데리고 노는 어떤 풍류객이 얘기 할 적에 그 기생들이 모여 앉아서 얘기하는 각도 팔도 기생들의 얘기와 팔도강산 노래를 다 부르고 팔도강산에 그 거장에 대한 하나의 시가 흘러 나옴으로써 그 때로써는 멋있었지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자가 처음 나가서 그렇게 거침없이 내려 읊었다는게 이제 하나의 이거지. 지금이야 뭔 그 사투리 하는거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때는 그게 굉장했어요. 경상도 말 한번 하고, 전라도 말 한번 하고, 평양 말 한번 하면 뭐 갈채에 갈채 게다가 또 아 평양이면 수심가요 경상도면 간가요 뭐 육짜배기 모두다 거침없이 내놓으니까 좀 그랬나봐요 그 때. 그래서 환영 받았겠지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

- 빅터 레코드에서 만담을 취입하는 한편 폭소대 단원이었던 김윤심은 김연실, 나풍심, 문일화 등과 함께 주로 여자들로만 구성되는 악극단 `기라성` 을 조직해서 전국을 누비기도 했습니다. 조선 예술자 신무대 등 1930년대에 쟁쟁한 극단과 어깨를 겨누고 악극단 기라성을 이끌던 김윤심의 만담은 청중들로부터 우뢰같은 환호와 갈채를 받았으며 특히 팔도 사투리를 구사해 엮어 나가는 재주에는 감탄을 마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귓전에서 맴을 도는 김윤심의 만담 화류팔면상. 재치와 유머에 넘치는 김윤심의 만담 화류팔면상을 다시 한번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 그 이제 어떤 그 이제 시골 풍류객이 대자연을 구경하고 나서 이제 서울 이제 그 요리집 한복판에 떡 들어가 앉아 이제 팔도강산 기생 아가씨를 떡 불러 앉아 놓고 하시는 말씀이 얘들아 그 너희 좋은 노래 한 곡조 불러주면 내 좋은 선물 하리러 왔다 했더니 언제든지 그 평안도 사람들이란 성질이 좀 급해서 평양에서 온 색시가 홀랑 일어 나면서 아이고 아주버니 내 한 마디 하갔시외다. 아 그 자넨 어디서 온 색시인데? 난 평안도 평양서 왔시요. 아 그 참 좋은 곳에서 왔구만 그래. 청산명월 하더니 자네를 두고 한 말이야 양덕 명산서 부터 흘러져 내려오는 대동강서 부터 수심가 인들 오죽 잘 하겠는가. 그거 한 곡조 하구려. 아이고 아주버니도. 수심가만 잘 하갔시요? 노래라고 생긴건 고조 무슨 노래든지 고조 잘합니다래. 아하하. 그래 그래 한 곡조 불러봐라 했드러니 함경도 색시가 톡 튀어 나오면서 하는말이 이 나그네 날 좀 봅세 내 한 곡 하람? 아 지금 평안도 색시가 한 곡조 할려고 하는데 평안서 온 안까이 그 소리 못하고마. 내사 요새 값싸 저고리로 해 있고용 하이까라 아이겠음둥? 아 이 노래를 할려는데 함경도 색시가 이러니까 화가 난 평양색시 하는 말이 야야 에미나이 그러디 말라우. 너 왜 이래? 너 나 어케 생각하고 이래. 응? 내가 이래뵈도 말이야 평양 대동강물 훑어먹고 모란봉 깎아먹은 내야. 왜이래? 왜 ... 하게 굴디 말라우. 이러면서 평안도 그 수심가 한 곡조를 내놓는데. 청산 녹음은 새새연연이 푸르 우리 인생은야 시시때때로 누나. 아 이렇게 한 곡조 하니깐 함경도 색시 퉁 내면서 내 한번 하겠소 그만. 돈 그리워서 죽은 무덤은 한복판에다가 묻고요. 님 그리워 죽은 무덤은 우리집 복판에 묻어... 아 이래가면서 한 곡조 부르니까 전라도 색시 나오면서 하는 말이 헤헤 웃어 작살하겠네. 내사 한 번 할 것이고만 그려. 아 그 자넨 어디서 왔노. 내 전라도 전주군전 대추나무골에서 왔어라우. 아 그래 한 곡조 해봐라. 사풍설... 라더니 섬세할 손 네로구나. 구만장천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가을 바람에 나부끼는 코스모스 같이 생겼다. 그래 한 곡조 불러봐라 했더니 이 색시 한 곡조 나오는데. 사람이 살면 내...

- 재치와 유머가 있고, 구수한 멋과 개성이 있는 팔도 사투리를 섞어서 엮어 나가는 김윤심의 만담이 막간의 인기를 한창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을 때 막간 가수들도 이에 질새라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무렵, 김윤심의 만담과 함께 인기를 많이 모았던 노래에는 신카나리아의 `아, 님이시여` 였습니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전성시대를 이루었던 악극단 시대도 1940년대로 넘어 서면서 차츰 사양길을 걷기 시작해 1941년 12월 8일 이른바 대동화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의 가요인들은 일제의 채찍질을 더 받아야 했고 일본말로 군가를 불러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차츰 검은 그림자가 밀려들기 시작하자 봄이 와도 봄 같지 아니하고 한 잔 마시는 술에도 취하지 않는 쓸쓸한 시절 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김윤심의 만담은 더욱 인기가 높아 갔으며 가요계에도 만요조의 붐이 일기 시작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무겁고 어두운 시대 속에서 잠시나마 소탈하게 웃고 즐겨 보자는 안타까운 심리작용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박력있는 목소리로 데뷰한 김정구의 만요조의 노래가 인기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 사양길을 걷던 악극단을 이끌고 고생을 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한 김윤심은 독립척송회, 애국부인회 등의 부녀 운동회에 참가해서 주로 문화부의 일을 맡아 보기도 했으며 6·25 후에는 대한 여자 청년단 군경 원어국작으로 주로 위문 사업에 전념 하기도 했습니다.
한 때 이난영과 함께 KPK악극단에도 참가했던 김윤심은 환도 후 간장병으로 6년 동안을 병상에 있었으며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무대의 정열을 아쉬워 하면서 요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습니다.

- 요새는 이난영 씨 딸이 와가지고 좀 많이 돌봐 줬어요. 그래가지고 그저 이렁저렁 살지요 뭐. 요새 방송 코메디 원고도 이름 안 내놓고 몇 내놔서 방송 좀 하고 조금 돈 있는거 가지고 요래저래 해가지고 살지요 뭐. 근데 그 의혹이야 남았죠.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활이라는건 갈채에 미친 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자기가 잘했든 못 했든 잘 한다는 거기에 도취해서 일평생 고생하고 사는게 우리들의 생활일거에요. 그 갈채를 떠나서 있다는 것은 내 생명이 살았다 하더라도 나는 죽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 이 시간 참 선생님이 저를 찾아줘서 얼마나 반갑고 즐거웠고 눈물을 흘리면서 왔는지 몰라요. 나는 이 시간은 살았구나. 나도 찾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왔어요. 예술인이 자기가 가졌던 무대에서 멀어진다는건 죽은거나 같지 않겠어요? 그래 서글프지만 어느 땐가 내가 실력 있으면 살 수 있겠지 하고 그냥 살았어요. 왜 한국 사람들은 예술은 짧고 인생을 길게 보는가. 남들은 인생은 짧고 예술을 기렉 보는데. 그저 이건 조금만 나이 먹으면 그 사람이 하는 사색까지 자꾸 늙었다고 봐주니 어떡하면 좋은가 하는 생각 뿐이에요.

- 여학교 3학년 때 집을 뛰쳐나와 무대에 서기 시작한지 39년. 그 동안 오로지 무대에 서서 관객의 갈채에 파뭍혀 살아 온 김윤심. 만담가 김윤심은 자기가 무대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 할 만큼 무대를 사랑하고 아직도 무대에서 살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21세 때 연애결혼으로 맺어졌던 결혼 생활은 파탄되고 오직 하나 있는 아들은 지금 서독에 가서 수학 중이며 수유리 시장 근처에 있는 집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김윤심은 언젠가는 다시 한번 무대에 설 날이 올것을 희망하며 또 염원 하면서 아직도 마음 속으론 무대를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 흘러 간 세월속에 묻혀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만담가 김윤심 편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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