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타 앨범
- 이제는 영원히 가 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이인권 편 입니다. 두 손목 마주 잡고 헤어지던 앞 뜰엔 지금도 피었구나 향기 높은 다리야. 임은 헤어졌어도 노래는 남아있고 헤어진 님은 만날 수 없어도 노래만은 들을 수 있는 미사의 노래.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고 노래까지 불러 주었던 가수 이인권. 가수이자 작곡가요 작사가인 이인권은 영화음악을 개척 했으며 레코드를 제작하고 권투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재다능한 가수 이인권. 어느 때는 화려하게 어느 때는 쓸쓸한 철새처럼 기복이 심한 인생 역전 속에서 그러나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투지의 사나이 이인권. 가수 이인권이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고 노래까지 불러 주었던 미사의 노래. 20년 전에 히트했던 곡 입니다.
- 150여 곡의 노래를 부르고 400여 편을 작곡 했으며 50여 편의 작사를 남긴 가요계의 실력자이 이인권은 1919년 11월 5일 생 함경북도 청진이 그의 고향 입니다. 수산업과 운송업을 하는 아버지의 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난 이인권은 본명 그대로 이인권 입니다. 청진 보통 학교에 다닐 때 부터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가졌던 소년 이인권을 음악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우등생이기도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음악 학교 가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사업을 하는 부모님들의 권유로 상업 학교에 진학 해야만 했던 이인권은 상업 학교가 다니기 싫어서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지만 그러나 완고한 부모님들 때문에 결국은 졸업 할 때 까지 다녀야만 했습니다. 청진 상업 학교를 졸업하자 동경 음악 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고 출발하기 직전 역시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이인권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싸 매고 독학을 하기로 결심 했습니다.
- 그래서 이제 집에선 반대하고 하니까 뭐 독학이라도 해서 한번 음악을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말이야 하고 있는데 마침 그 빅타서울 영업소에서 처음 연주단이 왔어요. 와서 제가 말하자면 제 스승이지요. 사이도 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 한테서 이제 음악을 배우고 있을 땐데 거기에 이제 노래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제 선배되는 분 이지요. 그 사람들이 이제 빅터 연주단이 왔으니까 가수가 되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숙소에 가서 노래 테스트를 받는건데 저는 이제 구경차 같이 쫓아 갔지요. 쫓아 갔는데 이제 그 사람들이 노래를 하는데 아마 그 때 전술희 선생이 계셨는데 썩 신통치 않았던 모양 이에요. 그니까 이제 저 보고 이제 노래 한마디 해라 이렇게 됐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직 뭐 실력도 부족하고 하니까 좀 더 있다 좋은 시기에 한번 해보겠습니다. 했더니 아 괜찮다고 노래 한 마디 하라 그래서 이제 할 수 없이 했지요. 그 때 이제 일본 노래를 했지요 그 때는. 했는데 아무 소리가 없어요. 그래 모두 이제 나오는데 지금 돌아가신 엄앵란 씨의 이제 부친 되는 분 엄재근 씨 라고 있었는데 그 분이 우리 고향 분 이에요. 그 분이 불러요. 불러서 저만 이제 부른단 말이에요. 그래서 들어갔더니 주소를 적어 놓으라고 전술희 선생이 그래요. 왜그러냐 했더니 곧 서울가서 취입이 있으니까 취입 때 연락을 할테니까 와서 취입을 하자고. 아 저는 꿈 같은 얘기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어서 다시 재확인 해가지고 아 기뻐서 집에 돌아가서 누님하고 의논을 했더니 아 누님도 반가워 하시고 그래서 연락 오기를 기다리고 이던 차 됐는데 바로 얼마 있다가 오케이 연주단이 왔어요. 오케이 연주단이 왔는데 저를 찾는다 그래서 갔더니 그 사람들이 또 그 노래 테스트 하러 갔는데 아마 신통치 않았던 모양 이에요. 그니까 이제 그 때는 누가 계신고 하니 손봉희 선생하고 박신 선생님이 다 계실 땐데 저 보고 노래 하라고 또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인제 빅터 하고 약속이 돼있으니까 여기서는 노래 할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아 뭐 상관 없다고 노래 한 마디 하는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고 이러면서 이제 하라고 해서 노래를 했지요. 했더니 또 그 때 이철 사장님이 계셨는데 아 그 분이 뭐라고 또 그랬는지 그냥 아 그냥 자꾸 저한테 교섭이 들어오는데 누님하고 의논 했지요. 의논 했더니 빅터 보단 지금 현재 오케이가 나으니까 그 쪽으로 가는게 좋지 않겠냐 누님 말씀이 그래요. 그래서 밤에 이제 밤잠 못 자고 생각타 못해서 마음에 결정을 보고 그 이튿날 아침에 가서 이철 사장 앞에서 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요.
- 동무 따라 강남 가 듯 덤으로 가서 테스트를 받고 픽업 된 이인권은 그 후 수 많은 히트곡을 냈습니다. `추억의 백마강` 은 그 중에 한 곡. 1942년에 대히트한 이인권의 노랩니다. 그 때 나이 19세 함경북도 성진으로 오라는 말과 함께 여비까지 받은 이인권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그 해 7월 25일에 집을 떠나니 그것이 가수 이인권의 가수로서의 첫 출발이기도 했습니다. 성지을 거쳐 서울에 온 이인권은 오케이 레코드에 지정 여관인 광교 여관에서 취입 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심신에서 빅타 레코드에 들리자 고만 붙들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빅터 레코드에 붙들린 이인권은 거기서 전속 계약을 맺고 이명일 이라는 이름으로 `얄궂은 운명` 등 10여 곡을 취입 했으며, 이미 가 계약을 맺은 오케이 레코드에선 이인권이란 본명으로 `눈물의 춘정` 을 첫 취입 했습니다. 그래서 두 레코드 회사에서 갈등이 생기고 명실공의 화려한 무대에 데뷰한 이인권은 그 당시 돈화문 근방에 큰 집 한 채가 1500원 할 때 며칠 사이에 1000여 원을 벌었으며 명시자 공연에서 인기를 독차지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소위 대동아 전쟁이라는 싸움이 벌어지자 대륙붐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가숭 이인권도 가수를 청산하고 대륙으로 비약 할 꿈을 꾸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자 태평 레코드에서 취입 교섭이 와 `천리 전장` 과 `은혜냐 사랑이냐` 두 곡을 취입 했는데 그 중에서 `은혜냐 사랑이냐` 는 공존의 히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인권의 나이 스물 세살 때 `은혜냐 사랑이냐` 의 히트로 금일봉의 특별 사례까지 받은 가수 이인권은 품었던 포부대로 대륙으로 건너 갔습니다. 대륙으로 건너 가서 천진과 북경 사이를 왕래하며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보았던 이인권은 그 당시의 추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 맨 주먹으로 건너 갔는데 고생도 할 각오 하고 떠났습니다. 가서 처음에 가니까 뭐 환영이 대단 했어요. 어디 뭐 놀러 가면 그저 샴페인도 와서 환영 한다고 터뜨리고 하는데 그것도 석 달 지나니까 시들해 지더군요. 그 다음부터 이제 고생이 시작 된거죠. 고생하고 있는데 안 이라고 성이 안 씬데 나하고 천진에서 처음 아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제 아편을 제작하는 그룹의 자본주 예요. 거물 이지요. 북조선 아편 제작 하는 사람 중에서 이제 거물급인데 이 사람이 내가 고생 하는걸 보니까 안됐던 모양인지 우리 그룹에 들어오라 뭐 돈 내는 것도 아니고 한 몫만 끼겠다 하면 내가 봐 줄 테니까 들어오라 그래서 뭘 내가 하느냐 그랬더니 수송 담당만 해라. 이렇게 돼서 인제 그러면 내가 한 번 해 보마. 그래서 인제 북경서 그 땐 천진선 못 만들 땝니다. 아편을. 그래 북경서 만들 땐데 수송 담당을 제가 했지요. 해서 북경서 천진까지 가자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한 패가 여덟명인데 8분지 1이 내 몫이 되는 거지요. 막대한 돈 입니다 그게. 8분지 1이라도요. 그래서 그걸 이제 수송을 했어요. 아 참 아슬아슬 했습니다. 그게 서부할극 같은거 보는거 같고 뭐 길 없는데로 트럭을 막 끌고 그냥 돌아댕기고 그러다 이제 천진까지 그래도 무사히 도착을 했는데 그걸 이제 천진까지 가지고 와서 이제 우리 한 그룹이 이걸 상해에 가서 팔자 그래서 이제 상해로 떠났는데 그 때는 인제 서주에서 같은 중국이라도 여권이 있어야 상해 갑니다. 그래 여권 수속을 한다고 서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한 3개월 되니까 그 돈이 다 달아나고 말았어요. 막 그냥 돈을 뿌리다시피 했으니까. 그것으로 서주에 머물러 있게 됐지요.
- 북경과 천진을 오락가락 하던 이인권은 다시 중부 중국에 있는 소주로 자리를 옮겨서 그 곳에서 한동안 곡식 군납을 하기도 했으며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되자 중국에 있는 광복군 제3지대에서 음악 교관을 하기도 했으며 신탁통치 운운으로 광복군이 해체 되자 귀국차 상해로 옮겨 왔습니다. 귀국선을 기다리기 위해 상해에서 5개월을 머무르다가 1946년 5월 25일에 부산에 도착, 그리운 조국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 무렵 부산항에는 일본에서 중국에서 혹은 남방에서 귀국하는 귀국선과 귀국 동포들로 연일 붐비고 있었습니다.
-보소! 저기 배가 또 들어 옵니데이.
- 저 아저씨예, 저 배에는 형님도 틀림없이 돌아 오겠지예?
- 틀림 없을 낍니다. 북해대에서 오는 배라카니 형님도 탔을거 아닙니꺼.
- 꼭 돌아와야 할낀데.
- 창식아!
- 아주머니, 저기서 형님이 날 안 부릅니까?
- 창식아! 나 데이.
- 오메. 정말이구마이.
- 형님!
- 여보!
- 창식아!
- 손노훈과 이재우가 이러한 광경을 직접 보고 작사 작곡한 노래 `귀국선` 이인권의 목소립니다.
-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 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던가 타국살이, 몇 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소리 건설은 크다
- 부산항에 도착 한 가수 이인권은 기차표 한 장과 쌀 한 말 값쯤 되는 일금 천원을 받아 들고 때마침 부산에 와 있는 악극단 친구들에게서 여비를 더 얻어 그리운 서울로 돌아 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이인권은 제일 극장에서 백민 악극단과 함께 귀국 공연을 하고 뒤이어 이인권과 그의 악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작곡 편곡을 하는 한편 기타도 치고 섹소폰도 불며 노래도 부르고 그야말로 다양하고 화려한 무대 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빅토리 악극단의 악장과 무궁화 악극단의 악장으로도 활약을 했고, 한편 럭키 레코드에서 `선죽교` 라는 노래를 취입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6·25 동난이 일어나고 미쳐 피난을 하지 못한 이인권은 기막힌 고생을 해야만 했으며 국군이 수복하자 곧 84단 21연대 군예대로 서영은 등과 함께 종군에 최전방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1·4후퇴로 국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자 이인권도 대구로 내려와서 오리엔트 레코드에서 `귀국선` `미사의 노래` 등을 취입하고 송죽 극장에서 휘망 음악회라는 연주회를 개최해서 성공 하기도 했습니다. 햇님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획득한 `마부와 박서방` `꿈이여 다시 한 번` 등 50여 편의 영화음악을 담당 하기도 했던 이인권. 음악을 좋아하는 소년 시절에 이미 권투에 취미를 가졌었고 프로복싱 해설을 맡기도 했었던 가수 이인권은 부인과 사이에 남매를 두었고 아들은 이미 장가를 들어 손자가 두 명, 을지로 4가 대림 아파트의 단란한 보금자리에는 부인과 딸 하나와의 세 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영화 음악의 권위요 400여 곡의 작곡가임과 동시에 작사가 50여 편에 이르는가수 이인권은 스스로 노래 150여 곡을 불렀고 지금도 오아시스 레코드에 전속 작가로서 다양한 활약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요계에 거인적 존재인 가수 이인권, 그는 아직도 더욱 많은 일을 하게 될 것 입니다.
(입력일 :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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