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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아 편 - ‘찔레꽃’… 첫번째 취입곡 스타덤
백난아 편
‘찔레꽃’… 첫번째 취입곡 스타덤
1971.06.13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이제는 영원히 가 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백난아 편 입니다.

- 그 옛날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갔는지 청춘은 추억에 묻혀 가버렸지만 지금도 귓가에서 맴을 도는 그리운 노래,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노래를 불러 준 가수 백난아. 백난아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 이기도 했습니다.
아리랑 이라는 말로 상징 되기도 하는 흘러간 반 세기 가요의 은하수에 별 처럼 빛나는 백난아. 봄이 오는 아리랑 고개, 님이 오는 아리랑 고개, 가는 님은 밉상이요 오는 님은 곱상 이라네. 백난아의 히트송 `아리랑 낭랑` 입니다.

-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미모로 그 당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멀리 일본, 만주, 중궁에서 까지 관중들의 환호를 받고 인기를 독차지 했던 백난아.
백난아는 1927년 5월 16일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수산물 가공업을 하는 아버지에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백난아의 본명은 오금숙. 오금숙은 타고난 천재의 가수요 타고난 천성 못지않게 노래를 좋아 하기도 했습니다.
레코트 파을 시계점이나 모자점에 위탁 판매 하던것은 아련한 옛날. 오금숙이 보통 학교에 다닐 무렵엔 레코드 상점에 아치가 서고, 스피커에서 새로운 유행가가 마냥 흘러나오기도 했습니다.
학교 보다도 세끼 밥 보다도 노래가 좋았던 소녀 오금숙. 오금숙은 그 무렵 집 근처에 있는 레코드 상점에서 노래를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것이 세상없는 재미요 보람이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덕 보통학교 6학년 때 14세의 소녀 오금숙은 그 악기점 주인의 추천을 받고 콜롬비아 레코드가 주최하는 콩쿨 대회에 나가서 무난히 1등 당선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북성여중에 입학한 오금숙은 다시 리타 레코드에서 주최한 콩쿨 대회에서도 1등 당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보수적이던 그 무렵, 완고한 집안에서 가수로 데뷔하는 것을 허락 할리 없었습니다. 참고 견디며 1년을 보낸 소녀 오금숙은 다음 해에 상경, 부민관에서 태평 레코드가 주최하는 콩쿨 대회에서 또 다시 1등에 당선 했습니다. 검정 구두에 갑사 저고리 아직 단발머리 소녀였던 오금숙은 가수 박향림이 불렀던 `청춘 극장` 을 불러 아직 가수가 되기 전에 우뢰 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 때 2등에는 작곡자 나화랑 씨, 3등에는 영화배우로 이미 고인이 된 남춘역 씨, 가수 백난아는 그 무렵의 추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저는 부모님 몰래요. 참 주위에 그 간은 동창들이나 여러 그 동네 어른들 아는 분에 한해서 너만은 나가면 절대로 당선 될것이다고 말이지 이렇게 해줘도 참 저는 그 용기 가지고 정말 해봤는데 당선 됐어요. 됐는데 그 시절에는 어떻게 또 학교에서 또 그런걸 이해를 못하구요 참 벌도 많이 서고 제가요 참 야단도 많이 맞았고 퇴학도 몇번 당했습니다. 당했다가 사정사정 해서 또 어머님이 가서 저걸해서 또 다시 그냥 그대로 진학하고 인제 이랬는데. 참 그 이후에도 당선이 돼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저에게 축복을 가져왔는데 저를 반겨줄 사람은 정말 부모님이나 형제분이었어야 하는데 저는 그것이 제일 두렵고 무서웠다는거요. 레코드가 나오고 모두 이래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참 모두 이러니까 그 때 모두 가족들도 모두 참 반갑게 저를 맞이해 주고요 도 이해가 갔었다는걸요. 저는 그렇게 그 시절 생각을 하면 그것이 추억이 아득 합니다.

- 한 마디 말 못하고 눈을 감고 가신 님아. 절계로 맺은 사랑 누굴 위해 바쳤던가. 잔디풀 뜯으면서 해지도록 불러 보아도 적막한 흰 들판에 뻐꾹새만 슬피 우네. `님 무덤 앞에` 백난아의 목소립니다.

- 세 번 연거퍼 일등 당선을 한 오금숙은 이윽고 `황하 다방`, `무명초 항구`, ` 직려승`, `찔레꽃` 등 네 곡을 취입한 다음 태평 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었습니다.
첫 취입 기념 회식 때 작곡가 김교성은 오금숙의 살결이 희고 달덩이 처럼 예쁜데다 난초를 좋아한다 해서 이름을 백난아라 지어주었습니다. 그 때 나이 꽃다운 열 여섯살.
도라지 돈 도라지 산에 들에 도라지 갑사등기 팔랑팔랑 숫기없는 도라지. 네 나이 몇 살이냐 대답이나 살짝 하려마. 아이 답답해. 아이 답답해. 정말 답답해. 도라도라지 도라지가 낫구려. 도라도라지가 돈 도라지가 나는 나는 좋아요.
함경도 청진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태평 레코드 회사를 돈 더미 위에 올려 놓은 소녀가수 백난아.
도라지 낭랑, 백난아의 인기가 더욱 절정에 오른 반면에 다른 가수들의 그림자를 흐리게 했던 노래 이기도 합니다.
`황하 다방`, `무명초 항구`, `직려승`, `찔레꽃` 등 첫 번째 취입곡으로 단연 스타덤에 오르고, 활화산과도 같은 열광적인 갈채를 받은 백난아는 뒤이어 `망향초 사랑`, `갈매기 쌍쌍`, `아리랑 낭랑`, `직려승`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불러서 그 당시에 같은 전속 가수였던 백년설, 진박남 등과 더불어 태평레코드의 전성시대를 이룩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면인들이란 으레히 유명세를 지불하는법. 하늘과 같이 높은 인기와 활화산과도 같은 열광적인 갈채속에 파묻혔던 백난아도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유명세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 아가씨.

- 네?

- 손님이 왔어요.

- 음. 누굴까?

- 어린애랑 무슨일이냐니까 꼭 백난아를 좀 만나게 해달라고 고집을 부리는군요.

- 들어오라고 하세요.

- 이리 들어오세요.

- 실례 합니다.

- 누구시죠?

- 당신이 백난아 씨 군요?

- 그런데요?

- 미안하지만 이 어린애 좀 맡아줘야 겠어요.

- 아, 왜요?

- 이 애 아빠가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만 요즘 당신 노래를 듣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단 말이에요.

- 그런데요?

- 애 아빠가 나갔으니 먹고 살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대신 우리 앨 좀 길러줘야 겠어요.

- 네?


- 정말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유명세. 소녀가수 백난아가 그 무렵 불렀던 노랩니다. `내 고향 해남도`

- 물안개가 자욱한 구비구비 산 구비. 떨어진 동백꽃은 눈물 이러냐. 쌍돗대, 청돗대 정처없이 떠도냐. 외로이 깜박이는 등대만 서 있다. `내 고향 해남도` 백난아의 노래였습니다.

- 가수 백난아의 전성시대, 레코드 회사가 기업적으로 성공하자 새로 생겨나는 회사도 많았고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수들에 대한 스카웃 작전 또한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의 백난아는 아직 어리고 순진하기만 했습니다. 노래만을 좋아하고 또 노래만을 부르는데 여념이 없었던 소녀가수 백난아는 이러한 스카웃 열풍에 휘말려들고 말았습니다. 당시 태평 레코드에 전속 되있던 백난아를 톨리돌 레코드에서 본인도 모르게 전속 계약을 맺고 노래를 취입해버렸던 것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겪으로 난리가 난 태평레코드. 백난아는 결국 1년 반의 취입 금지를 당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취입 금지를 당한 백난아는 박시춘 악단에서 남인수, 장세정 등과 함께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만주, 중국 등 각지를 순회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갈채를 받았습니다.
중국 상해에서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돌아와 대구에서 귀국 공연을 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됐고, 해방 후에는 그 동안 틈틈히 익혀 두었던 양재 기술을 살려 중부소 앞에 아담한 양장점을 내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 해 12월 스무살에 결혼해서 스위트 홈을 이루고 1941년에 태평 레코드에서 취입했던 `찔레꽃` 이 다시 한번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꿈에도 그리운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백난아의 `찔레꽃`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만주, 중국 등 멀리 상해 북경 소주에 이르는 지평선을 넘어서 아시아 대륙 각지에서 노래를 불렀고 낭만의 꽃을 피웠던 백난아. 하지만 백난아는 불운한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10년 동안 계속되었던 결혼 생활은 파탄되고, 충무로에서 경영하던 수도 예술학원이 화재로 타버리는 등 한 때는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타격이 심했고 무척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다시 일어나 파라다이스 쇼단을 만들어 1969년 까지 운영했고 1970년 10월 13일에 교포를 위문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 갔다가 지난 3월 13일에 귀국한 백난아는 요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글쎄요. 그건 뭐 인생이라는 거는 저 뿐 아니라 한 시절의 화려했던 시절은 누구나 그 어느 정도냐 이것 뿐이지 그 현실에다 비교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과거나 현재를 갖다 연결시켜 볼 때는 `참 그 시절이 좋았다` 네? 언제든 우리 시절이 지나가면 또 오는 시절도 몇 번 `그 때가 좋았다` 누구나 다 저는 그렇게 생각 하리라고 생각 합니다. 오늘날까지 제가 느껴 본 점에. 그래서 저는 그런것을 과거에 좋았다는걸 느껴도 과거에 현실을 느껴가지고 고민하거나 그건 안합니다. 고민 안하고 현실은 현실대로 나는 달려 나간다 말이야. 좀 더 명랑한 그러한 기분에서 전 죽을 때 까지 그 기분이에요. 제 원래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좋았다는거야 느끼죠 뭐. 좋았다는거야 느끼지만 조금도 슬퍼하지 않아요. 물론 그 때 만이야 지금 못하죠.


- 진달래 꽃 피어나는 범바우 고개. 누구를 만나러 가만히 넘느냐. 두메골 처녀. 꽃 다래끼 옆에 끼고 남들이 볼까 말까 두근두근 뛰는 가슴 두메골 처녀. `두메골 처녀` 백난아가 부릅니다.

- 그 옛날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갔는지. 청춘은 추억에 묻혀 가버렸지만 지금도 귓가에서 맴을 도는 그리운 노래.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노래를 불러 주었던 백난아. 아름다운 그 목소리와 아름다운 그 얼굴의 주인공 백난아.
백난아는 지금 사당동 예술인 마을에서 언니의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와 함께 그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습니다.

(입력일 : 200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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