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영원히 가 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 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황금심 편 입니다.
- 지금은 영겁의 저 쪽으로 밀려 간 세월과 함께 그 세월 속에 묻혀 간 청춘의 미련과 함께 잊혀져 가는 노래. 누군가 노래는 추억의 묘비명이라고 했다지만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 나는 노래. 노래는 축음기의 발달과 함께 자라 왔습니다. 유성기와 소리판 이라고 불리워 졌던 축음기가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 온 것은 1920년.
- 자, 어서 오십시오. 어서와요. 단 돈 십전, 십전만 가지고 와요. 단 돈 십전이면 천하일색 이화중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유성기가 있습니다. 새 타령, 육자배기, 수심가, 사선남봉가, 장구 타령, 자 무엇이든지 들을 수 있는 유성기가 있어요. 십전 십전이면 무엇이든지 들을 수 있는 유성기가 있어요.
- 여보시오.
- 아, 예.
- 이팔 청춘가 라는 것은 없소?
- 왜요? 있습니다요.
- 그럼, 들을 수 있겠구만요.
- 아문요. 들을 수 있구말굽쇼. 하하하. 저, 이팔 청춘가를 다 아시고, 실례지만 경성에서 오셨나요?
- 네? 아, 난 그냥 왔다갔다 허요.
- 아, 예. 그러세요? 어서 들어 오십시오. 네. 아아아, 여보세요.
- 왜그래요.
- 저, 요금을 내셔야지요.
- 요금 이라고?
- 예. 십전 입니다.
- 십전?
- 예.
- 허허. 이거 왜 이런데요? 시골 놈 이라고 깔보고...
- 예?
- 아 경성서는 말이여. 종로 레코드 상점에 가면 말이오. 예쁜 아가씨가 나와서 홍차도 주고, 가사가 적힌 브로마이드도 주고 유성기 소리는 얼마든지 공짜로 듣는 당께로.
- 에헤이. 하지만 여기는 다르지 않습니까요.
- 아 다르긴 뭐가 달러? 같은 동폰디?
- 아 저기 여보세요. 하 참...
- 축음기와 레코드가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 왔을 때 그건 정말 놀라운 사실 이었으며 그래서 약삭바른 장사치들은 이 축음기와 레코드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 다니며 장터에 천말을 치고 돈을 받고 들려주는 영업 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축음기와 레코드는 전성기를 맞이 했고, 혜성처럼 나타난 소녀 가수 황금심은 `알뜰한 당신` 한 곡으로 빅타 레코드 황금시대를 이루어 놨습니다. 레크드 가를 삽시간에 화제로 뒤끓게 했던 `알뜰한 당신` 16세의 소녀 가수 황금심의 히트곡 입니다.
♬ 알뜰한 당신
- 지금도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알뜰한 당신` 이 한 곡으로 하루 아침에 톱 싱어가 된 황금심. 황금심은 1923년 12월 5일생 종로구 청진동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자랐습니다. 본명은 황금자. 전당포를 하는 아버지의 13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황금자는 덕수 보통학교 5학년를 다닐 때 까지 비교적 노래를 잘 부르는 그저 천진난만 하고 평범한 소녀일 따름 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언니를 따라서 지금 국회 자리인 부민관에 구경 갔을 때 황금자는 자기도 한 번 저 화려한 무대에 서 보고 싶은 욕망을 불현듯 느끼기 시작 했습니다. `사막의 한` 을 부르는 무대의 고복수가 13세 소녀의 눈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신과도 같이 보였으며 `목포의 눈물` 을 부르는 무대의 이난영은 마치 선녀와도 같이 보였던 것 입니다.
- 사실은 제가 그 때 지금 국민학교구요 그 땐 보통학교라고 그랬죠? 그 당시때 제가 5학년때 이제 오케공연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그 때는 조선악극단이라고 그랬죠? 그래 이제 우리 큰 언니께서요. 우리는 그 때 뭐 아주 철부지고 아무것도 모를땝니다만, 우리 큰언니가 이제 그 때 지금 의사당 자리가 예전에 부민관이었거든요. 부민관에를 구경을 가시는데 이제 제가 따라갔어요. 따라가니까 뭐 그 당시때 손님이 두줄 석줄로 그냥 여간 뭐 늘어섰지 않아요? 거기 열로 서있다 따라 들어가서 구경을 했어요. 그 당시땐 인제 지금 고선생 고복수씨요. 그 양반하고 고인이 되신 이난영씨 그 언니하고 이제 두 분이 전성기죠. 거 뭐 나오니까 우뢰같은 박수 환영소리가요. 그 뭐 부민관이 지금도 3층으로 있겠습니다만 3층이 아닙니까? 거 뭐 손님이 꽉 찼는데 두분이 나와서 하시는걸 보니까는 정말 천사같고 그래서 우리가 어려서 선녀 선녀 이런 얘길 두고 아마 저 사람들이 선년가 보다. 내가 혼자 생각에요? 그리고 구경을 하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가가지곤 그 날 부터 그만 그 어린 소견에두요 아휴 난 언제나 저런걸 해보나 하고 공부가 안되데요. 그래서 집에서 여학교 가라고 그러시는 것도 그냥 억지로 학교 그냥 졸업을 하고서는 제가 삼촌네 집으로 도망을 갔어요. 도망을 가가지고 이제 집에 집에서 붙들려 가지고 이제 끌려 들어갔죠.
부민관 구경에서 돌아온 후 고만 가수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소녀 황금자. 황금자는 모든것을 집어 치우고 오로지 축음기에 매달려 노래 공부만을 했었습니다. 언니들의 걱정은 어느사이 부모님들의 꾸중으로 변하고, 드디어 집에서 뛰쳐나와 버린 황금자.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황금자는 가수가 되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감고 자는 잠자리에서도 노래부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3월 14살때 황금자는 오케이 레코드에서 가수 모집을 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뛰어갔습니다. 사장과 당시의 인기가수 이던 고복수. 그리고 작곡가인 박시춘. 손목인이 심사를 하는 앞에서 `불사조` `진달래 수첩`을 황금자는 100명 모인 중에서 오직 한명이 뽑혀 그토록 소망이던 가수가 됐습니다.
- 그 당시때 기분이라는건 뭐 까딱하면 절도할 정도로 그만 감계무량해서 말이죠 너무. 아이구 세상에 자신없이 사실 왔는데 내가 이렇게... 거기서 또 그러시데요. 이렇게 많은 가운데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말이죠 또 거기 회사 사장님께서 아주 많은 좋은 말씀을 흐믓하게 해주시데요. 같이 모두 테스트 갔던 여러 동지들은 그만 낙망이 되가지구요 그 회사 사장님이 뭐 나를 안고 그 때 뭐 조그마한 계집아니니까. 그저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바짝 안고 아유 어디서 이런 목소리를 가졌느냐 그러면서 당장 그냥 전속 계약을 하자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이제 박선생님 박시춘 선생님한테 그냥 뭐 그 이튿날로 작곡을 받았어요. 받아가지고 `왜 못오시나` 그게 데뷔곡이죠 제가.
박시춘 작곡의 `왜 못오시나` 첫 취입을 한 다음 `다시 지는 석양 어이하리`의 취입을 마치고 황금자는 다음해 전속료 천원에 월급 185원의 계약으로 빅타레코드 전속 가수가 됐습니다. 그 때 황금자의 나이 15세. 쌀 한가마에 5원하던 시절입니다. 빅타레코드 전속이 된 황금자는 문예부장 유영국의 권유로 이름을 황금심으로 바꾸고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 `추억의 탱고`등 계속 히트곡을 내어 빅타레코드의 황금시대를 이루고. 당시의 인기가수인 김복희 박단마와 함께 황금심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깜찍한 포부를 아고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황금심. 작곡가 황복남씨는 그 무렵의 황금심을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 있습니다.
- 에. 알뜰한 당신이라는 그 레코드 판이 나올 당시만 해서 우리가 상당히 어렸을 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때 제가 저는 양복점을 했습니다. 고향에서 양복점을 할 젠데. 그 때 이제 알뜰한 당신이요 하고 노래가 유행될 무렵에 그 때 가수가 누구인가 하고서 들어보니까 역시 황금심씨. 역시 참 목소리가 꾀꼬리 같으면서 구성지면서 미녀의 향토적인 정말 참 남달리한 목소립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유지하고 계시지만은 정말 참 그 때 제 기분은 그 때 시절의 감격. 아직도 되살리고 싶습니다만은 참 정말 좋았습니다. 네.
`알뜰한 당신` 에 이어 `왜 못 오시나`가 공전의 대히트를 하자 황금심이 전속하고 있는 빅타레코드가 라이벌이던 오케이 레코드 회사에선 많은 돈을 내고 황금심을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한 번 전속계약을 한 의리를 지켜 끝까지 빅타레코드에 머물렀던 황금심. 한편 빅타레코드에선 그야말로 황금같은 황금심을 놓칠세라 금은 보화처럼 겹겹히 쌓아놓고 천사와 같은 대우를 했다니. 청진동 골목안 여염집에서 엣띠게 자란 무명의 소녀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셈이었습니다. 바로 엊그제 부민관 무대에서 노래 보르는 고복수를 우러러 신과 같이 여기고 이난영을 선녀와 같이 느꼈던 황금심 그러나 불과 몇해만에 이제는 자신이 선녀 못지 않게 된 황금심 환희와 흥분 속에서 세월은 서서히 흘러가고 목소리도 육체도 더욱 원숙해져가는 봄. 황금심의 나의 19살때 뜻밖에도 고복수의 프로포즈를 받고 황금심은 숨이 막혀 어쩔줄을 몰라 했습니다. 동경의 대상으로 우러러 존경하던 고복수. 신과도 같이 저 먼곳에 있는것만 같던 고복수. 그 고복수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리워서 빅타가극단으로 전속까지 옮기다니 그 때 빅타가극단으로 군림하던 황금심은 부푸르 오르는 가슴을 안고 현기증을 일으킬 지경이었습니다.
- 그 때 나이 열 칠팔세에 뭘 알겠습니까. 그저 이 어떻하면 좋은 노래를 해서 좀 더 이 팬들한테 더 인기를 좀 ... 귀염을 받을까하는 욕망밖에 없을 나이죠. 근데 고선생님이 하루는 빅타회사로 오셨더군요. 오셔가지고 제가 이제 처음에 테스트 할 때 고선생님이 계셨구. 또 그걸 떠나서라도 대선배님이시고 하니까 제가 반갑게 맞일 해드렸어요. 아유. 고선생님 여기 왠일이십니까? 했더니 음. 앞으로 이제 이 금심이하고 자주 만날 기회가 있을꺼야. 그러시데요. 그러믄서 유난히 그 날부텀 빅타회사를 한 두서너번씩 드나드시면서 거 뭐 사먹이질 못해 애를 쓰시고. 유난히 그렇게 귀여요 하세요. 그래서 아. 이거 참 내가 잘 해서 아마 이렇게 선배님들한테 귀염을 받겠지. 그러고 더 정말 예의를 지키구요. 이렇게 해 내려왔다가. 이제 결과적으로 고선생님 눈치를 제가 대강 알아챘죠. 그래서 어떻하다 춘향전을 했어요. 그 때 이 이도령은 역시 이도령은 인물이 호남이어야 한다. 또 미남에 속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저렇게 참 연세가 많으시니까 옛날의 모습이라곤 찾아볼래야 볼수도 없습니다만, 그 전에는 고선생보고 밉단 소리는 안했어요. 그래서 이제 고선생이 참 도령으로 당선이 되고. 또 춘향이는 춘향이 다운 모습이나 그 모든 그 인물을 택해야 한다 그러고 모두 선생님들이 수군수군 그러시더니 또 어떻게 나를 또 뽑으셨어요. 연극이라곤 그게 젤~ 처음입니다. 그러니 그 배역을 제가 맡아가지고 아마 한 열흘이상 잠을 못잤어요. 떨어가지고. 해낼 자신이 없어서요. 그래서 난 이거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선생님. 내 논 적도 있었어요. 그랬더니 도저히 이 노래라든가 모든 조건에 이거 금심이가 해야지 안된다 벌써 이 선전도 그렇게 하기로 되있고 하니까는 어떻하던지 금심이가 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제 고선생님이 이도령이 되고 내가 춘향이가 되고 할 수 없어서 해가지고 지방공연 저 북만주로해서 안간데가 없었어요. 근 1년 가깝도록 다녔죠.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고선생니 이렇게 옥중장면에요. 옥중장면에 이렇게 손 넣는데가 있잖습니까? 춘향이 그 동안 고생했다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근데 그 춘향모는 박옥초씨요. 그 언니가 춘향모를 하고 또 향단이는 박정숙이라고 있습니다. 그 후배가 하고 그랬는데. 아 그 유난히 하루는 손을 자꾸만 잡을라고 그러시지 않아요. 그리고 그 전에 나는 눈치를 좀 챘잖아요. 고선생님이 너무 유난히 나를 귀여워 하시니까는. 좀 미워지데요. 너무 귀여워 하니까. 그래선 그 눈치를 내가 못 알아챘으면 이렇게 선배님이 잡을라고 하시니까는 할 수 없어 못 이기는 척 하고 이게 아마 잡아야 되는건가 보다 이러고 잡혔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 눈치를 알았기때문에 내가 이렇게 쏙 빼고 쏙 빼고 그 원래는 손을 잡아야 되는거에요. 그런거를 한번도 손을 못 만지셨죠. 그냥. 요렇게 갔다 요렇게 쏙 빼고 했기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면요. 참 옛날이 그립습니다.
행복된 세월 속에 감격의 8·15해방을 맞이했으나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3·8선을 가로 막은 장벽은 끝내 6·25동란은 일으키고 황금심 부부에게도 많은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제일 악극단에서 비극의 여왕 전옥과 함께 공연도 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대구에서 부산에서 어느 때는 일산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태어난 황금심은 오로지 노래 부르는 것을 보람으로 아니 오히려 생명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여자 많고 돌 많고 바람 많기로 유명한 제주도에 삼다도 소식은 황금심이 제주도 제1훈련소 군예대에 있을때 부른 노래입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동경과 인내의 틈바구니에서 목마르도록 그리운 공명의 물결을 일으키었던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고달픈피난민들의 한 많은 설움과 괴로움을 씻어 주었던 노래입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언 30년. 1969년 가을. 황금심은 가수 생활 30주년을 맞이 했습니다. 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살아 온 30년 기쁠때나 서러울 때나 한결같이 불러 온 노래 30년. 30년. 흘러가 버린 청춘은 짧고 노래의 여운은 아직도 은은하게 남아있는 30년. 노래를 불러 화려하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고생도 해야 했던 흘러간 무대. 지금도 오직 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겠다고 다짐하면서. 병약한 남편과 함께 면목동에 있는 초라한 집에서 아들 셋, 딸 하나의 네 남매를 기르면서 오로지 노래를 지키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 잇는 황금심. 지금은 영겹의 저쪽의 밀려가 세월과 함께 그 세월속에 묻혀간 청춘의 미련과 함께 잊혀져 가는 노래. 누군가 노래는 추억의 묘비명이라고 했다지만,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 나는 노래. 이 노래속에 묻혀서 살아온 황금심은 앞으로도 계속 노래속에 묻혀 살기가 소원이며. 그러기 위해서 다른 돈벌이를 제쳐 놓고 가난을 극복해가고 있는 황금심. 그래서 가수 황금심은 노래의 신데렐라요. 노래의 불사조이기도 합니다.
흘러간 세월속에 묻혀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보는 추억의 스타앨범. 지금까지 해설의 안영규였습니다.
(입력일 : 200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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