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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추억의 스타앨범
김정구 편 - 지금도 가슴을 울리는 ‘눈물젖은 두만강’
김정구 편
지금도 가슴을 울리는 ‘눈물젖은 두만강’
1971.04.25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이제는 영원히 가 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김정구 편 입니다.
슬픈 사연 모르는 채 소리도 없이 지금도 푸르게 흐르고 있을 두만강 나루터. 어느 하늘 아래 다시 만날 언약도 없이 정든 고향 정든 사람 뒤 돌아보며 낯설고 물설은 만주 땅으로 건너 가야만 했던 시절.

- 기름진 고향 땅 누구에게 빼앗기고 북만주 황무지로 이민 가는 나그네. 오늘은 조선 땅 내일은 만주 땅 색스폰 소리 구슬프게 떠도는 유랑 극단. 빼앗긴 내 조국에 목숨을 걸고 기약도 없이 떠나는 독립 투사. 숱한 사람이 슬픔을 가슴이 안고 손을 흔들며 손을 흔들며 헤어져야만 했던 `눈물젖은 두만강`.

- 세월은 흘러가고 세상은 변했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는 푸른 강물처럼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울려주는 눈물젖은 두만강. 이 노래는 김정구의 대표적인 노래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청춘 가수로 널리 알려진 김정구,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원산 명사십리 푸른 바닷가에 있는 상동 42번지가 그의 고향 입니다.
수입이 적은 수공업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아버지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김정구는 1916년 7월 15일 생. 가수이자 작곡가로 유명했던 김용환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형 못지않게 선천적으로 가수의 소질을 타고 난 김정구. 원산 광명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학비가 없어서 담임 선생님 집에 물지게를 져 나르고 학비를 벌어야만 했던 김정구. 고학으로 YMCA 청년 학원을 졸업한 김정구는 가정 음악회를 만들어 함경도 일대를 돌아 다니며 장차 가수가 될 포부를 키워 왔습니다.
황재경 목사와 이흥렬 씨에게 음악을 사사한 후, 형 김용환의 친구였고 영화 감독이 된 김소동 씨의 주선으로 비로소 가수가 된 김정구. 그 때 김정구의 나이 스무살 이었습니다. 오케이 레코드의 손목인에게 인정을 받고, 당시 가요계의 여왕 이었던 이화자와 함께 일본 동경에 가서 처음으로 취입한 노래가 `항구의 선술집`.

- 김정구와 함께 같은 날 오케이 레코드의 전속 가수가 된 장세정이 부른 `연락선은 떠난다` 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구슬픈 목소리로 그 시절 젊은이의 우스를 달래 주었던 `항구의 선술집`. 한동안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다가 얼마 후에 유행의 물결을 타고 김정구 최초의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형 김용환의 목소리와 너무도 비슷해서 김용환이 이름을 바꾸고 딴 회사에서 취입했다는 오해를 받고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던 `항구의 선술집`.
그러나 곧 오해는 풀리고 오히려 더 유명해진 김정구. 깨끗한 골목 안에 있던 다동 하숙집에는 김정구의 그 무렵 추억이 많습니다.

- 그 때 바로 그 금방에 어느집 아가씨가 우리 하숙하는 집에 연락이 왔었어요. 내 언젠가도 이런 얘기 한 마디 한거 같은데. 그 마루가 대청마루가 넓어요. 서울 집에 그게 다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 때는 인제 춤 이라는 것을 인제 그 ..한 춤이지요 그 때야 뭐 트롯트 정도니까. 그래 그런걸 추고 있는데 그 여자랑 같이 춤을 추게 됐어요. 춤을 추고 있는데 보니까 가끔 거기 오기도 하고 그랬는데 춤을 추고 그 날 그 여자가 미쳤어요. 정신이 이상해 졌어요. 근데 이 사람이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르면서 아주 곤란한 문제가 생겼단 말이에요. 그래서 인제 그 부모되는 분이 부탁이 얘 좀 어떻게 고쳐줘야 되겠다 이런 얘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고칩니까. 그니까 인제 좀 가서 만나줘라 그런 얘기 거든요. 그래 할 수 없이 하루 갔어요. 가서 옆에 앉아서 이런 얘기 좀 하고 정신이 조금 이상 아주 미친것도 아니고 약간 간 거에요.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해주고 좀 위로해주다시피 해주고 들어 왔어요. 한 이틀인가 아마 그렇게 해주고 또 그러니까 병이 나았어요. 그래서 되게 웃은 일이 있습니다.
이거와 똑같은 일이 하나 있었는데 이북인데 그 때 저 임기라는 데가 있어요. 저기 서방 국경 쪽 입니다. 거기로 공연을 한번 갔다 왔었습니다. 조그만 아가씨가 팬이라고 찾아와서 싸인 해달라고 그래서 방에 들어와서 싸인을 하고 계속 얘기를 하고 보낸 일이 있어요. 그 때 내가 인제 한참 팔팔할 때지요. 그리고 공연을 이틀인가 사흘하고 공연을 그 때는 이틀 사흘 했거든요. 그리고 돌아서 왔어요. 왔는데 그 여자가 미쳤다는 거에요. 그 소문이 났어요. 그런데 ...이렇게 밀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꼭 ... 고 온 사람처럼 ... 안됐거든요? 그 모르고 버선을 뒤집어서 입습니까 어떡합니까 이거 참 딱한 문제라니까. 그리 인제 한번 가면은 ....되리라 생각 했는데 어떻게 인제 못 가게돼서 다신 못 봤습니다만 그런 시절에 그런 좀 일이 있었습니다.

- 장세정, 송달엽 등과 함께 처음 오케이 레코드 회사에 입사 한 후 줄곧 한 회사에만 해방 전 까지 전속으로 있었던 김정구. 1941년 12월 8일 이른바 대동하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 가요인들은 일제의 채찍질을 더욱 받아야 했고, 사기양양을 위해서 강제로 군가를 불러야만 했던 시절. 모든 공연물은 일본말로 해야만 한다는 원칙 때문에 가사를 모조리 일본말로 바꿔야만 하기도 했던 시절. 일본 NHK의 초청을 받고 동경에 간 김정구 일행은 어느날 이윤공 내외의 초청을 받고 아카사까의 저택의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만리타향 외로운 이역 땅에서 쓸쓸하게 살아 온 마지막 황태자 이윤공. 백성이 아니라 혈육을 만난 듯 반기는 그의 눈동자. 김정구는 `낙화삼천` 을 부르기 시작 했습니다.

- 탄월성 너머 사자수 보니 백마강 푸른 물이 낙화암을 감도네. 옛 꿈은 바람결에 살랑 거리고 골안사 젊은 날에 뭇새만 운다. 물어 보자. 물어 보자. 삼천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 보자. 낙화삼천 간 곳이 어디냐.

- 김정구가 이 `낙화삼천`을 불렀을 때 만국한에 설움이 북받힌 마지막 황태자 이윤공은 그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고, 가수 김정구의 뺨에서도 눈물이 흘렀으며 좌중이 온통 눈물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오고 가는 말은 없어도 부르는 노래속에 끝없는 한이 맺혀 듣다 못해 부르다 못해 흐느껴야만 했던 `낙화삼천`. 가사를 모두 일본말로 바꾸고 군가를 불러야만 했던 시절에 `낙화삼천` 을 불러 궁전을 눈물 바다로 만들었던 가수 김정구. 호형호제 하며 오랜세월 형제처럼 지내 온 가수 고운봉은 김정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한국 레코드계가요 한 다섯 회사가 있었어요. 그게 전부 이제 외국 사람들의 자본이 되겠는데요. 근데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가수가 있다고 히트를 많이 내신 분들이 오케이 였거든요. 남인수, 지금 고인이 된 남인수 씨 그리고 정구 형님 그리고 이난영 씨, 장세정 씨 이 네 분이 제일 히트를 많이 냈어요. 그래서 한 회사에서 히트를 많이 내긴 이제 그 분들인데 남인수 씨는 인제 조금 좀 조용하고 정서적인 노래로 많이 팔렸고 또 김정구 형님은 아주 그 만요로써 그 활기 띈 노래 이걸로써 스타일이 전부 다르니까요 각자가. 그 장세정 씨는 `연락선` 이라던가 혹은 이난영 씨의 `목포의 눈물` 정말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뚜렷한 자기 개성들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부가 뭐 남의 노래에 눌려서 자기가 안 팔린다는 이런게 없었어요. 그 분은 그 분 나름대로 좋기 때문에 히트가 됐구요 이렇게 되는데요. 이제 딴 회사에 제가 그 때는 태평 레코드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이렇게 봤을 때 저희들이 전 또 연령도 그 때 좀 아래였었고 후배였었고 이래서 상당히 참 저희들이 우러러 보고 좀 어떻게 하면 좀 접근 해볼까 그런 점이 있었지요. 저도 한 일년 태평에 있다가 같이 또 한 회사에 같이 있게 됐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인제 그렇게 되니까 선배님이고 저는 인제 중견 가수가 되게 됐었죠. 뭐 그 시절에 남인수 씨 인기 라던가 김정구 형님의 인기 라는건 뭐 장안을 휩쓸다시피 했지요.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거 참 답답한 그런 시절이었었으니까 거기에 그냥 그 뭡니까 그 `앵화폭풍` 이라던지 그 만요적이고 그 어떻게 그게 인제 그 반 그 일본 사람들이 와서 있을 적 인데 그거를 만요로다가 직접 제대로 표현을 하며은 탄압이 오니까 눈 속임 귀 속임으로 해서 가끔가다 노래 그 참 뼈저린 그 만요 속에서도 정구 형님이 그런게 있었어요. 노래도 잘 그 참 소화를 시키셨지만 가사 역시도 좋았구요 그런 노래로써 굉장히 붐을 그 때 일으키시고 장안을 그냥 뭐 쓸다시피 하셨죠. 네.

- `눈물젖은 두만강`, `낙화삼천`, `항구의 선술집` 등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려 주었던 김정구. 그러나 김정구의 박력있는 목소리는 오히려 만요조의 노래가 더욱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중일전쟁의 은은한 포성, 압록강 넘어서 울려왔고, 2차대전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밀려오고 있을 때 그러나 요리업이나 비단 장사로 한 몫 단단히 번 화교들은 계속 돈을 버는데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 왕 서방. 왕 서방. 어머 왕 서방이 어디 갔나?

- 왜 그리 해.

- 장사 안 하는 거야?

- 장사 아니 해.

- 어머, 어디 아파요?

- 아...

- 아휴, 대단한 모양인데 약이라도 먹지 않고 왜 가만히 누웠지?

- 왕 서방 돈이나 없어.

- 어머, 그렇게 많은 돈 다 어디 두고.

- 통통 털어 다 줬어.

- 옳아. 명월이 한테 반했다더니 그렇게 됐구만.

- 흐흐흐흐. 명월이 말만 들어도 기분 좋다.

- 하지만 죽으면 소용 없지 않아? 죽어버리면 어쩔려고 그래.

- 상관 없어. 왕 서방 죽어도 괜찮아.

- 뭐라구?


- 만요가수 김정구의 주가를 높인 `왕 서방 연사`. 이 노래를 모르면 놀림감이 될 정도로 삼척동자 까지 부르던 히트 중의 히트곡 `왕 서방 연사`.
어느 때는 구슬픈 목소리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어느 때는 경쾌하고 박력있는 목소리로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김정구. 그는 스물 일곱살 때 강원도 춘천 아가씨와 결혼 했습니다.
그 때 인제 그 우리 저... 같이 한 하숙에 있었습니다. 저 상막동에 있었는데 그 금방에 하숙을 하고 있었어요 역시. 그래가지고 그 때 기억으로 내가 ...이지요 뭐. 근데 그 부친이 볼 참 기회가 있었어요 춘천에. 그래서 둘 사이에 얘기가 돼가지고 가서 인제 허락을 해달라고 했더만 역시 결혼은 안되겠다고 거절 하더군요. 몇 번 가서 졸라 봤는데 안돼서 삼촌 되시는 분이 계세요. 지금 ...는데 강 저쪽 상곡에 양부 라는 데가 있습니다. 그 때는 그 가솔린이 없어서 목탄차 타고 그럴땐데 그걸 타고 양부까지 갔어요. 그래서 양부 삼촌한테 말씀을 드렸더니만 뭐 그만하면 제 처 밥은 벌어 먹일만 하니까 주지 뭘 그러느냐. 아마 이렇게 됐던 모양 입니다. 그래서 인제 내려 가가지고 ..을 맡았지요.

- 그리고 얼마 후에 맞이 한 8·15 해방. 압박의 사슬에서 풀려 자유를 찾은 가요계는 활기를 띄기 시작 했습니다. 형인 김용환이 이끄는 태평양 가극단에서 그리고 호동 가극단에서 악기도 다루고 코메디도 하기 시작 한 구봉서 그리고 박광욱, 허장강 들과 함께 김정구는 마음껏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 찾아 온 6·25 동난. 부산항은 피난민들로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좁은 거리에서 서로 발을 밟으며 삶을 찾아 헤매어야만 했던 시절. 젊은 가수들은 전선으로 가고 나이 많은 가수들은 전국 문예중대에 소속하여 전후방 위문으로 나섰습니다. 국제시장 바닥에서 싸늘한 40계단 밑에서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어린이를 볼 때 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구두닦이를 하는 소년을 볼 때 마다 김정구의 가슴은 메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11살 때 겨울 물지게를 지고 학비를 벌어야만 했던 자기 과거가 되살아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김정구는 어느 덧 외로운 소년들에게 밥을 먹이고 따뜻한 옷을 사 입혀 주는데 보람을 느끼게 되기도 했었습니다. 부산항에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대포집 드럼통에 둘러 앉아서 낙동강 소주를 마시며 전선 소식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던 김정구. 그러나 김정구는 한번도 절망해 본 일이 없는 만년 청춘 가수 였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경쾌하고 활발한 정열의 가수 였습니다.
`바다의 교향시` 노한 파도처럼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김정구가 부른 `바다의 교향시`.
돈을 조금 더 벌면 사회 사업을 해보겠다는 김정구. 지금은 옛것은 버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아쉬워 하면서 흘러가 버린 노래나마 죽는 날 까지 열심히 부르겠다는 가수 김정구. 평생을 무대에서 살아오고 지금도 무대에서 살고있는 김정구. 무대는 마음의 고향이요 어쩌면 김정구의 전부 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여러번 일어났던 환경의 변동으로 크게 모아놓은 돈은 없지만 결코 처량 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김정구. 큰 아들은 이미 장성해 29살의 회사원이 되고, 용산구 청파동 2가 52번지에 있는 아담한 양식 2층 집이 그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있는 보금자리 입니다.
고기가 바다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무대에서 노래로 숨을 쉬면 살아 온 김정구. 그는 지금도 무대에서 호흡을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 흘러간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정다운 노래를 찾아서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지금까지 해설에 안중국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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