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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 편 - 무대를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던 ‘타향살이’
고복수 편
무대를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던 ‘타향살이’
1971.04.11 방송
‘추억의 스타 앨범’은 출생·데뷔에서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그 가수의 일생을 추억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잇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앨범. 오늘은 고복수 편입니다.

1955년 8월 8일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밤이었습니다. 고복수의 은퇴공연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국립극장에서는....

꿈과 같이 흘러가 버린 세월. 어언 30년. 지나간 시적 그 화려했던 추억과 낭만들. 휘황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서 있는 고복수. 가슴은 메어지는것만 같았고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지나간 세월들.

고복수. 1912년 11월 19일생.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서리가 그의 고향입니다. 기계국수집 맏아들로 태어난 고복수. 유성기에 매달려 노래만을 부르면서 그는 꿈많은 소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꿈많은 소년 고복수. 무성영화와 함께 멋들어지게 넘어가는 변사의 목소리가 그를 매혹시키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18살때. 부산 공예당에서 열린 콩쿨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을때. 고복수의 마음은 이미 서울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철사 끝에 엿을 붙여 부모 몰래 금고에서 빼낸돈이 60원. 그 60원을 움켜쥔 채 고복수는 밤열차에 몸을 싣고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멀어져가는 고향. 낯설은 서울. 검정두루마기에 하얀 장갑을 끼고 고복수는 서울 공예당 무대에 섰습니다. 지정곡인 `두견새 우는 밤`과 자유곡인 `처량한 밤`을 구성지게 불러 넘기고. 고복수는 콜럼비아 레코드가 주최한 콩쿨대회에서 2등을 차지 무대를 향한 그의 첫 꿈을 키웠습니다. 쌀 한가마니가 5원하던 시절. 작곡가 손목인의 권유로 고복수는 계약금 천원 월금 80원에 오케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전속가수가 되어서 처음으로 취입한 노래가 `타향살이`였습니다.

간도 용정땅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무대를 온통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다는 `타향살이`
어떤 여인은 이 노래를 듣고 슬픔에 못이겨 자살하고 말았다니. 정말로 노래에 울고 노래에 죽을수도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서 취입한 그 당시 레코드판 5만매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타향살이`. 이 노래 하나로 고복수는 하룻밤 사이에 일약 스타로 등장한 것입니다. 공연이 끝나면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 속에 파묻혀 어쩔줄 몰라했던 고복수.

지금 국립극장 자리인 명추자에서 공연을 끝내고 나올 때의 일입니다.

- 저 고복수 선생님 이시죠?
- 왜 그러십니까?
- 저 이런 사람 옳습니다.
- 재경경상남도 친목회 총...
- 네. 그렇습니다.
- 그런데요?
- 사실은 오늘 밤 우리 친목회 모였는데 고선생께도 잠깐만 참석해 주시길 모두 원하고 있습니다.
- 아. 그래요?
- 저 시간이 없으시겠지만 고향친구들의 간청이니까. 특별히 고려해 주셨스면 감사하겠습니다.
- 음 가십시다.

그런데 고복수가 안내된 곳은 다방골 어느 조용한 기생집.

- 아니 이게 어찌된 셈이지?
- 서방님 죄송합니다. 소옥이가 죽어도 꼭 한 번 서방님을 뵙고 싶어서 뫼셨사오니 용서하시옵소서.
- 뭐라구?

고복수는 괴씸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밉지 않은 얼굴..

- 음. 기왕 왔으니 하는 수 없지. 한 잔만 마시고 가지.
- 감사합니다.
- 그 대신 니게 속아서 온게 아니라 내가 널 보고 싶어서 온 것으로 해두겠다.
- 어머나. 호호. 그럼 어서 한 잔 드시어요.
- 오냐.

이렇게 되면 여자가 기생인지 고복수가 기생인지. 어떻든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는 고복수였습니다.

- 지방순회공연 나가면.. 2주간 공연했습니다. 하루가지곤 안 됩니다. 심지어 그 때는 마이크 없이도 불렀었지요. 마치 어느날은 그냥 그저 한 잔 먹으로 갑세 한 것이 그 때 아마 저희들 환영파티죠. 그 우리를 소위 무슨 하느님이나 온 것 같이요. 시가에 보면 쭉 사람들이 연변에 서서 저희들을 맞이 해줬고. 또 사인해달라고 그 때 너무나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소위 .. 경관들이 만약 화장실에 침입하면 말이지 오히려 불을 살른다 이와 같은 임시조처를 다했어요. 너무 사람이 찾아오고 그래서 화장을 못할 지경입니다. 그리고 한번 순회돌 때마다 이제 대략 한 서너달 합니다. 돌아오면 편지가 거짓말없이 무려 수백통이 와 있습니다. 전부 후배들이 앉아있으면 화장을 해줍니다. 그 때는 연비복을 입어야 합니다. 연비복. 새카만 연비복을 입고. 지피 새카만 걸 신고. 그리고 흰 넥타이 턱 매고 나갈때면 뭐 그야말로 내 자랑같지마 우찌됐든 제 3자들 얘긴데 고복수는 한국의 게리 쿠퍼다. 이런 얘기도 그 때 게리 쿠퍼라고 유명했습니다. 그때 이제 김혜승군이라고 있었는데. 본명이 김성국이죠. 과거 참 작고한 고인이 된 이난영의 부군이지요. 그 녀석은 목이 짧아서요 연비복입어 놔 노면 뭐 연비복에 파 묻혀서 입은동 만동 해. 지금 눈을 지긋히 감고 생각하면은 그 때 그 시절 그 만큼 돈도 있고 인기도 얻고 모든 삶이 전부 고복수 고복수 하던 그 시절. 욕심이라기보다 단 하루라도 다시 그 시절이 한번 나에게 와 주면 얼마나 반가우리 이 생각 뿐입니다.

부러운 것도 아쉬운 것도 없었던 그 시절. `타향살이`에 이어 내 놓은 고복수의 두번째 히트곡은 `사막의 한` 이었습니다. 자고나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 인생을 카라반에 비유해서 고달픈 인생역정을 푼 노래 `사막의 한`

노래와 함께 청춘을 불태웠던 고복수. 그러한 고복수의 노래와 함께 잊지못할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극작가 이석우씨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 고복수씨 하면 이제 뭐. 노인이 돼서 은퇴했습니다만 그 때 그 이의 인기가 한창 클때가 이제부터 한 35년전 쯤 됩니다. 저도 그 때 30대로 한참 그 여인에게 ...쫒아다닐땐데 그 때 고복수가 남한지방에서 올라왔어요. 올라왔는데 키가 호리호리 한데 목소리가 바리톤인데 구수해요. 우리나라 옛날 그 참 좋아하던 음성이에요. 그러더니 이러쿵 저러쿵 하다가 `타향살이`라는 곡조가 나왔습니다. 이게 이제 오케레코드에서 그것때문에 전속계약도 하고 또 고복수는 그 때 사장 이철영이가 놓지않고 붙들었는데 곡조를... 부르는 그 음성이나 구수하고 서글픈 맛이 나는 것이 그 때 우리 한민족들이 일본한테 압박받아가지고 눌려가지고 살면서 그 원한이 가슴에 사무친거를 풀어주는 그런 목소리가 나왔어요. 그건 아마 고복수 자신도 모르고 나왔지만 그렇게....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타향살이`는 듣고 울고 부르고 울고 부르고 나서 울고 그러한 굉장한 히트였습니다. 그래가지곤 이제 무제 실연을 나가는데 지금 저 국회자리죠. 그 때 이제 무대실연이 많았습니다만. 고복수가 이제 한복 쫙입고 머리 찔근 매가지고서는 전라도 멋쟁이 스타일로 나오면 키도 훌씬하고 어떻게 목소리가 구성진지 굉장해서 고복수는 아마 학생들서부터 기생 할배 어쩌니 하는 사람들 없이 아마 전시민이 모두 좋아했을거에요. 그 이제 요점이 뭐냐면 그 목소리가 그 때 우리의 원한을 대변하기에 알맞은 목소리였어요. 그 원한을 사무친 목소리가요. 그래서 참 그 때 고복수하곤 굉장히 참 인기 있어서 지금도 그 이를 보면 그 때가 아쉽습니다. 내가보기에도

1936년 글자 그대로 고복수의 황금시대를 이루게 했던 노래는 `짝사랑`. 카페 생유리창 너머로 낙엽이 뒹귀는 벌판에서 이름없는 주막집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부르던 노래 `짝사랑`. 고복수의 세번째 히트곡입니다.

땅도 꺼지고 하늘도 무너질것 같은 짝사랑. 가을에 우는 새소리가 으악이라 들려서 으악새라고 이름 붙였다는 짝사랑.

늦은 봄은 남쪽에서 꽃을 보건만 낙엽지는 이 가을은 어디로 갈까요. 쌓이는 연륜과 함께 원숙해진 고복수의 다음 히트곡은 `이원애곡`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들렸다는 `이원애곡` 처음부터 떨리는 목소리로 고복수가 아니면은 부를수 없는 노래. 고복수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노래이기도 합니다. 님 그리워 기다리다 깨져버린 사람과 꿈과 청춘을 원망하는 `이원애곡`

꿈처럼 흘러간 세월. 수난의 조국은 해방되고 빅터가극단의 여왕이었던 황금심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 그 때 고복수는 37살. 황금심은 꽃다운 19살. 사랑하는 황금심을 얻기 위해서 황금심이 소속했던 빅터가극단에 입단할 만큼 고복수는 열렬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격동과 수난 속에서 슬픔을 씹으며 6·25를 격고나니 고복수의 나이는 마흔을 넘고 1955년 8월 8일 아직 마음은 젊다 하지만 어쨌든 은회공연을 마지막으로 고복수는 무대를 떠났습니다. 무대를 떠난 고복수는 학원을 차려 후배양성도 해봤고 영화사를 차려 영화제작도 해봤지만 남는 것이라고는 쌓이는 빚더미와 허전한 마음 뿐. 먹고 살 방법 마저 막히고 말았습니다.

- 저, 실례합니다.
- 뭐요?
- 책 한권 사주십사하고 왔습니다.
- 난 필요 없으니 저 쪽으로 가보시오.
- 저 월부로 드릴테니 한 권 들여 놓으십시요. 재밌고 장서용으로도 아주 잘 된 책이올시다.
- 아이. 이 사람이 이거 바쁜데 와가지고. 응 가만있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아~ 맞았어. 고복수로군.
- 뭐 고복수? 고복수가 책 팔러 왔다고?
- 그렇다니까.
- 야. 사람팔자 시간문제 라더니. 그 정말이 그 말이 맞구만. 허허.
- 저. 책이나 한권씩 팔게 해주십시요.
- 책은 필요 없으니 노래나 한 곡 근사하게 불러보시오.
- 저 그러지 마시고 책이나 좀 사주시라니까요.
- 아니 공짜로 부르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줄텐데 뭘 그러우. 밑천도 안 드는걸 가지고. 백원이면 되겠지? 자 이걸 줄테니 한곡 근사하게 불러봐요. 어서.
- 사지도 않는 책 지벙 치우고 돌아다니면서 노래나 한 곡씩 부르는게 차라리 날껄.
- 뭐라구요?

잘 팔리지도 않는 월부책보따리를 옆에 끼고 거리를 헤매일때 눈을 감아도 생각나는 것은 지나간 시절. 그 화려했던 추억과 낭만이었습니다.

- 뇌신경고혈압으로서 마 3년 전부터 앓고 있습니다만, 그 생각하면 전담의사는 이 그 병에는 절대 아무생각도 말고 조용이 안정이 필요하다는데 안정이 됩니까. 눈도 안보이고 귀가 없어 귀로 안들으면 괜찮은데 누구보다도 예민한 생활을 하던 제가 그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었고. 눈 감을래야 감을수 없습니다.

지금은 성북구 상계동 조그마한 집에서 일곱자녀의 아버지 그리고 세손주의 할아버지가 된 고복수. 뇌신경고혈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는 아직 꿈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무대를 떠나서도 그의 노래는 아직도 무대에 남아있고 무대를 떠나서도 그의 마음은 항상 무대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끝으로 들으신 노래는 `새날의 풍년` 고복수와 그의 처 황금심이 같이 불렀습니다.

흘러간 세월속에 묻혀버린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앨범`. 오늘은 고복수 편이였습니다.

추억의 스타앨범. 담당에 안종국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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