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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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유쾌한 응접실
화제 활동사진 - 무성영화 시대에 그 영화 봤던 기억 …
화제 활동사진
무성영화 시대에 그 영화 봤던 기억 …
1963.08.11 방송
국내 최고의 석학과 지성인들이 고정출연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던 ‘유쾌한 응접실’은 동아방송 개국 때부터 폐국 때까지 계속 방송된 ,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방송시작 때부터 10여 년 동안 청취랭킹 3위 이내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으며, 교양적 요소와 계도적 기능을 화합시켜 오락프로그램의 품위에 질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골손님 - 복혜숙, 주태익, 이서구
노래손님 - 김용만, 라미라 씨스터, 현인
새손님 - 윤봉춘
초대손님 - 전옥
만나보고 싶은 사람 - 조월애

유쾌한 응접실 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댁에서 라디오를 듣고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 감사 합니다.
우리들 생활 주변에는 가지가지 화제거리가 많습니다.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화제가 많이 모여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노랫속에 얘기를 담고 퀴즈를 푸는 유쾌한 응접실 시간 입니다.
오늘 여기 나오신 단골 손님 복혜숙씨 주태익씨 이서구씨 새 손님에는 영화인 협회 이사장이신 윤봉춘씨를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이 시간 화제는 활동사진 사회 전영우 입니다.
첫 번째 노래 손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 김용만 입니다.

김용만씨의 노래는 봉이 김선달.

♬ 봉이 김선달 - 김용만

시원한 노란 노타이 셔츠의 사나이 지금 김용만씨가 봉이 김선달이라는 노래를 상당히 흥겹게 불러주었습니다.
김용만씨는 좀 거슬러 올라가서요 지금은 우리가 여러가지 무슨 시네마 스코프 비스타 비전 갖가지 영화 기술도 발전 발달해서 우리 눈을 황홀하게 해주고 있는데,
과거로 올라가서 어렸을 적에 활동사진 지금은 영화입니다만 영화의 할아버지가 되는 활동사진, 그 무성영화 시대에 그 영화 봤던 기억 이걸 한번 살펴서 기억을 좀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 그 전에 제가 어렸을 때 말입니다.

= 네

- 채플린이란 영화가 있었죠.

= 찰리 채플린이요.

- 네. 그 다음에 세 동무라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 채플린 영화하고 세 동무라는 영화. 이것을 본 기억이 있다고 얘길했습니다.
그 때에 뭐 좀 재밌었다 하는걸 지금 소개해 줄 수 있는거 있습니까?

- 재미있었다고 하는건 제가 어려서 보기에도 그 나운규씨 있잖습니까.

= 나운규씨요.

- 그 분이 좀 좋았어요.

= 나운규씨가 좋았어요? 덤덤하게 이렇게 얘기를 해주십니까.
다음에는 아무래도 복혜숙씨에게 화제의 마이크를 좀 돌려드려야 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그 당시의 무성영화는 어떤 영화 였는지 그것으로 화제를 꽃피워 주시기 바랍니다.

. 무성영화 시대에도 현대극과 사극으로 있었는데요. 맨 처음으로 극영화 극화된 활동사진이요.
그게 아마 `월하의 맹세` 그것이 제일 먼저인가보죠?

= 1921년이요. 그러니까 삼일운동 나고 그 이듬해.

- 그것은 선전영화 입니다. 최신극에서 저금 장려하려는 선전영화가 1921년에.

= 아, 그러니까 요즘 그 피알 피알 하지만은 그 때에 이제 그 피알 영화가.

. 방역 영화로 또 된것도 있어요.

- 그건 ..

. 아니예요. `월하의 맹세` 뒤에 그거 했죠?
`월하의 맹세`는 이월화가 했죠. 그러고 방역영화에 있어서 아마 제가 그 때 처음 카메라 앞에 서보긴 처음 했어요.

=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카메라 앞에 처음 서 보신 여자 배우,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이상합니다만은 이 자리에 저희들이 계속해서 유쾌한 응접실에 단골 손님으로 모신것을 저희들은 퍽 다행으로 생각해야 겠습니다.

. 뭐, 이상할 것 없어요.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죠. 제일 오래 됐죠.

= 그러니까 처음에 출연하셨던 영화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 방역 영화구 그 다음에 한거는 일본 그 번역해서 했지만 `농속에 든 새`라는 거예요.

= 농속에 든 새.

. 그러고 그 다음에 `낙화유수` 김용만씨가 어려서 봤다는 `세 동무` 홍년비연 주욱 그대로 계속해서 했죠.

= 근데 어떠한 역을 주로 많이 맡으셨습니까? 그 당시에.

. 그 때야 여배우가 귀하니깐 주연이란 주연은 모두 맡아놓고 했죠 뭐.

= 근데 젊은 아가씨였었는데 젊은 아가씨 시절에도 그럼 여주인공으로 나올 때 나이가 많아도 그것을 다 하셨습니까?

. 여주인공으로 나온 시절에 짧았죠. 왜 그런고 하니 그 다음에 신일선이니 그런 신인이 나오게 되니까 자연히 노역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삼십 바라봐서 삼십 넘고 그 때부터 벌써 할머니도 하고 그랬어요.

= 그 할머니 노릇하시기에 분장하시기에 많이 애를 쓰셨겠어요.

. 그러믄요. 죽죽 주름살을 그리고 나오니까 하나도 늙지 않았는데 그리고 나오니까 살이 포동포동 쪘는데 그리고 나오니까 이상하더군요 정말.

= 근데 저 그 당시에 남자 배우는 어떤 분이 있었습니까.

. 남자 배우가 아마.

- 그 때 권일청이.

. 네. 그리고 이원용, 활극배우로 한국의 다로마친이 유명했었죠. 점프를 잘하고 덤블링 잘하고 그런다고.

- 안종호 씨도 그 때 감독도 하고 출연도 하고 그랬었죠.

. 네. 그야말로 싸롱 연극으로 잘한다고 한게 이경선, 또 김일해 그렇게들 했어요.

= 이렇게 또 옛 친구들을 더듬어 주시는.

. 그래도 또 저희들이 예전 활동사진에는 변사라고 있지 않습니까. 해설하는 양반. 그 양반이 있어서 비극도 만들고 희극도 만들고 활극도 만들고 다 그랬어요.
저희 발성이 없이 그냥 무성영화 시절이니깐요. 그 양반들이 죄다 연극을 만들었죠.

= 그러니까 이 무성영와 시대가 언제까지 쭉 지속됐었습니까? 발성영화가 시작된 것은 지금부터 몇년 전 일입니까.

- 뭐 1936년이 될겁니다. 춘향전 임용우 감독의 문일봉 주연.

. 처음 발성.

= 그래도 전 발성이라고 했지만은 일단 사진은 찍어놓고 나중에 녹음 하신거죠.

- 지금도 거기 녹음 지금도 합니다.

= 다음에 다시 노래손님의 노래를 듣기로 하겠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 여러분 안녕하세요. 라미라 씨스터의 유성희에요. 최소미에요.

= 네. 이렇게 라미라 씨스터가 나왔습니다. 불러줄 곡목은 `사랑은 즐거운 스윙`.

♬ 사랑은 즐거운 스윙 - 라미라 씨스터.

= 사랑은 즐거운 스윙. 라미라 씨스터가 노래해 주었습니다.
아까도 저희 변사 얘기가 잠깐 비치다 말았지만요. 활동사진 무성영화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변사 하시는 분들이 그 영화를 살려주기도 하고 죽여 주기도 하고 뭐 죽일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관람하시는 분들 웃기기도 하고 울려주기도 하고 큰 역할을 변사 하시는 분들이 많이 했을 줄로 아는데 이번엔 이서구씨 께서 변사를 중심으로 해서 얘기를 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변사는 제가 그러니까 열살 남짓해서 부터 소위 활동사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영화는 그 서양영화가 들어온 한참 후에 시작된거예요. 제가 말씀드리는거는 한국영화가 들어오기 전에 서양 영화가 먼저 들어와 가지고 변사들이 서양영화 설명을 하는 그 때 얘깁니다.
그 때에는 지금 저 을지로 2가 내무부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 가면요. 거기 극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때 이름이 고등 연예관 이라는 극장이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가봤어요. 거기서는 그저 단편극 무슨 이솝얘기, 닭이 금알 낳는거 이런거 기억납니다. 이런 그 시시한 무성영화 상영관에 갖다 놓구요 전부 변사가 그걸 놓구서 재밌는말로 이렇게 꾸미고 저렇게 꾸미고 해서 원 스토리와는 당치도 않는 얘길해도 구경꾼들은 변사 얘기만 듣고 재미를 보고 박수를 하고 그래서 영화 구경을 가는게 아니라 변사 구경을 댕겼어요. 그래서 지금 간단히 생각하면 그 때 서상호란 변사가 굉장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나와서 변사노릇 하다가 영화는 집어치우고 무대에 나와서 저희 자전거에 다는 고무로 도는 경적이 있어요 빵빵 소리나는데 그 놈을 엉덩이에 달고 나와서 엉덩춤을 추고, 그래서 손님을 웃긴 그런 생각이 납니다. 그래 가지고는 서상호 보러가지 영화보러 간다는 말 안합니다.
서상호가 하도 유명해지니까는 우미관이라는 지금 우미관 자리가 우미식관인가 됐는데요. 관철동이죠. 우미관이 이제 생겼는데요. 우미관에서 변사 싸움이 났어요. 서상호를 데려다놔야 손님이 따르니까 서상호가 오기로하면 손님이 전부 우미관으로 갑니다.
그랬더니 이제 단성사가 생겼죠. 단성사 박승필씨라고 참 우리 흥행계에 대선배신 분이 경영했는데 그 양반이 입구에 서상호가 안들어오면 극장 망했다 서상호가 그리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서상호 월급이 올라가고 서상호가 인기 끌어가지고 영화는 차치하고 서상호 보러 댕기느라고 손님이 이리 갈리고 저리갈리고 그러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운 얘기였수다.

= 당시의 그 영화 관람료는 얼마나 됐었습니까?

- 제가 어머니한테 10전 타가지고 나가면은요. 5전은 구경값 내구요. 2전 내고 호떡하나 사먹구요. 3전 내고 먹으면 10전이면 넉넉했어요.

= 거 돈도 잘 쓰셨습니다.

- 10전 가져가면 다 되요.

. 처음에 그 영화 관람료를 내는게 아니라 돈을 받구서 구경하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 그건 훨씬 이전 입니다.

= 그러니까 구경하는 분들이 돈을 받고 구경을 해요?

. 돈을 2전 씩인가 받고 구경을 했다죠?

- 그건 저 뭔가 영리 연초 주식회사가 담배 선전을 하려고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게 아마 우리나라에서 활동 사진 시초일 것입니다.
그것을 상영할 때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까 담배곽을 주고 또 돈을 2전인가 얹어 주고 구경을 시켰습니다.

= 그러니까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죠.

. 그 때 담배론 부표라는게 있었구요. 이게 1전인가 2전 짜리 입니다. 또 산호표라고 5전짜리가 있었는데, 파란갑에 산호그림을 그려서 말려논 담배 부표 산호표 생각이 납니다. 제가 그 부표가 하도 좋아서 2전 짜리를 갖다가 어릴 적에 아버지 몰래 한갑을 다피고 어지러워서 혼난적이 있어서 지금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담배가 그 땐 귀한 거라서요.

= 그러니까 어렸을 적 부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셨군요.

. 하하하

= 다음에 저 복혜숙씨 께서는 당시의 그 영화 제작 할 때의 모습을 지금 영화 제작 할 때의 모습하고 비교를 하시면서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 지금이야 뭐 그 때에다 대면 발전이 많이되고 향상 됐다고 하겠지만 그 때는 전혀 셋트라는건 상상도 못했죠.
길로 돌아다니면서 지금 말하는 로케로 전부하고 오픈으로 남의 집도 빌리고 했는데 그 때 활동사진 다닌다면 누가 집을 빌려 줘야죠.
그래 할수 없어 낙화유수 다닐적에 처음으로 다른 홍사의 넓은 마당이었는데 지금 아마 그 지형을 말하자면 지금 소방서 있는 자리인가봐요. 빈 자리.
거기다가 집을 셋트라는걸 지었는데 이 위는 없이 그냥 벽만 세우고 뭐 이렇게 한게 돼서 그 나중에 보니깐 또 조명을 잘못해선 금지 은지 발라서 하는거로 하긴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림자가 벽에 어른거리고 그런게 나오더군요.

= 그 당시엔 발전시설도 뭐 없었잖아요.

- 네. 그렇죠. 그리고 무대에서 뭐 그 홍년비연 할 때 그런걸 했어요. 지금 같이 라이트라는게 없으니까 전선끼리 맞대서 스파크를 내 가지고 그 불빛에 촬영을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 저희 새 손님으로 오늘 나오신 윤봉춘씨에게 좀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시에 영화 한 편 제작 하려면은 얼마나 돈이 들었는지요?

- 보통 영화 한 편에 5백원 6백원?

= 그러니까 지금으로 따지면은 얼마 가량 되겠습니까?

- 글쎄요. 지금으로 따지면 어떻게 될까요. 한 6천만원 될까요?

= 그러니까 당시에도 돈은 막대하게 들었군요. 예나 지금이나 말할것 없이.

. 지금 돈으로 하면 한 6백 만원 이지.

=네. 그리고 저희 구경하러 오는 동원되는 인원은 제일 인기좋았던 영화가 얼마나 됬었습니까?

- 초기에 아까 우리가 `월하의 맹세`니 `춘향전`이니 그래도요 한국 영화의 날을 얼마전에 정했습니다.
각국에 다 영화의 날이 있는데, 우리도 그 모두 늙은 사람들 불러 모아 놓고 영화의 날을 정했는데 1918년으로 삭급이 올라갔습니다.
1918년에 김도산이가 연쇄극 입니다.

= 그러니까 극도 하면서 영화도 나오고...

- 이태리나 영국 이런데서두요 단편 뉴스라던가 그것을 영화의 날로 정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소급해 올라가니까 김도산씨가 `의리적 부트`라는 그 연쇄극을 ,
지금 저 장춘단 한람껨?넘어가는 언덕 고개에서 자동차 하나 놓고 김도산이가 허리에 칼 차고 격투하고 하던것이 `의리적 부트`입니다.
그것이 1918년 이거든요. 그것으로서 그 해 10월 20일날 단성사에서 개봉이 됐습니다. 연쇄극을 했을 때 그 때 입장료 50전 받았습니다.
50전 받았는데 모두 문간이 터지고 뭐 대 난리를 쳤습니다. 죄다 만원이 되니까.

= 그러니까 초창기에는 영화에 대한 관심도 컸고.

- 초창기에는 지금은 아침 조조부터 공연을 하지만 그 때는 밤에만 문열었습니다. 낮에는 없었습니다.

= 그야말로 정말 인파가 몰려들었었군요.

- 네. 그리고 하룻저녁에 만원돼야 한 천명. 뭐 이런 내로 조선극제나 단성사에서 한 천명 천 이백명 들어오는 것이 최고 수입이죠.
또 그리고 그 때는 한 편이 하루 아니면 이틀 또 고작해야 사흘, 이렇게 영화상영이 됐습니다.
지금은 좋은것이 한달 동안 상영도 하지만은 그 때는 고작 2-3일이 상영한 날짜가 되었습니다.

= 네. 다음에 노래손님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자기소개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지금 나오시는 분은 현인. 현인씨의 노래는 `칸나` 입니다.

♬ 칸나 - 현인

= 네. 현인의 노래 `칸나` 였습니다. 현인의 노래 부르신 것도 한참 되셨겠지만은 아마 어렸을 적에 이 무성영화에 대해서도 많이 아마 같이 구경했을 줄 압니다.
지금 생각나는 당시의 어떤 무성영화 있으면 소개를 좀 해주시지요.

- 네. 어렸을 적에 뭐 몇편 본것 같습니다만 `거리의 등불`이라는거 있잖아요. 찰리 채플린.

= 네. 김용만씨 하고 마찬가지군요. 어렸을 적에 희극 영화를 좋아했었던걸로 봐서는 아마 어렸을 적에 상당히...

- 우리 한국영화로써는 `아리랑`이란걸 본 것 같습니다.

= 네. 우리나라 영화요.

- 네. 책가방 맡기고 학교 몰래 선생님 몰래 본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납니다.

= 네. 그 때 그런 영화를 보시고 나도 한번 저런데 나가고 싶구나 그런 생각은 가져 보신 일이 없으십니까.

- 네. 있었습니다. 어릴 때 나운규 선생님인가 그 분이 나올 때...

. 아, 현인씨 저... 출연했죠? 해방직후 `푸른언덕`인가?

= 현인 씨도 영화와 관련이 있었고, 한번 해보겠다는거 해 보신 경험이 있는 겁니다.

- 네.

= 그런데 오늘 따라서 김용만씨 현인씨 어떻게 다함께 노란셔츠를 입고 나오셨습니까?
마침 한명숙씨가 나왔으면은 그 노래 한 곡조 더 듣고 싶었었는데.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그 일제 시대에 영화를 제작하셨노라면 그 사람네들의 간섭도 컸을 줄로 아는데요. 어땠습니까 그 당시에. 영화 제작 하는데 그 사람네들의 간섭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 대게 우리나라 역사를 3단계로 나눠어서 분석을 합니다.
맨 처음에는 초창기가 있고, 그 다음에는 순환기가 있고, 그 다음에 개화. 그래서 초창기에는 아까 말한 `월하의 맹세` 라던가 `바다의 비극` 이라던가 `춘향전` 이런 최초의 무성영화 때부터 `아리랑` 까지 나운규의 `아리랑` 그때까지 초창기로 정하고, `아리랑` 부터 영화가 당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민족 사상이 거기에 내포돼 있는것을 검열관이 알고 검열을 심각하게 할 때가 순환기의 초기로 봐서 해방 때 까지 상영 금지 당한 작품도 많고 컷트 당한 작품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순환기로 보고, 해방 후로 부터 지금까지는 개화, 꽃이 폈다 개화기로 3단계를 나눴습니다.

= 아까도 저희 그 한 천여명이나 되는 관객들이 몰려오고 밤에만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서울은 다행이 극장이 있으니까 괜찮겠지만요 시골에서도 그 영화 구경하러 많이 올라왔을 줄로 아는데 그 당시에 그 환경이라 그럴까요 영화에 몰려드는 시골 관객들이요. 그런점에도 좀 얘기를 해주셨으면.

- 제가 스물 일곱살에 영화계에 나왔습니다. 지금 예순 두살 입니다. 그런데 열 넷 열 다섯 이랬을 때 함경북도 회령이 제 고향입니다.
거긴 뭐 문화 도시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먼데 아닙니까. 서울서도 이천리 밖인데. 두만강 이쪽으로 북으로 가리고 동북쪽으로 러시아 가리고 북경 최첨단 거긴데 극장이 없었습니다. 이런 연극이나 영화가 들어오게 되면 객두집 마당 여관집 마당이 넓으니까 거기다가 막을 치고 야외 상영을 했습니다.
제가 맨 처음에 본 것은 역시 풍경 영화 입니다. 뭐 스케이트 타다가 넘어지는거 요트가 지나가는거 기차가 지나가는거 뭐 이런거를 자동차가 도시로 지나가는거 이런거를 보고 모두 박수하고 좋다고 그랬습니다.

= 그러니까 자동차 가는거 비행기 가는거 배 가는거 보고 박수하고 좋다구요.

- 네. 그 당시 아주 신기스러웠습니다.

. 활동사진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것만 봐도 손뼉치고 그랬죠.

=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은, 그런 과거가 있었군요. 우리에게도. 복혜숙씨 당시 영화 제작에 종사하시면서도 그 에피소드도 많이 있을 줄로 아는데요. 한두가지만 소개해 주시지요.

- 글쎄요. 전 연극으로 먼저 나와 가지고 활동사진을 하는데 여배우가 없으니깐 그래도 연극하던 사람이 나을 거다 해서 아마 활동사진 여배우를 썼죠.
그런데 그 때는 이렇게 발전이 되지 않았으니깐 물론 초창기에 그렇겠지만도 영화를 하면 죄다 가난한 팔자들이라서 그런지 돈을 그렇게 많이 들여서 제작을 한다고해도 배우들에게는 그렇게 보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밤낮 굶는걸 부잣집 밥먹듯이 한다면 과언이겠지만도 그렇게 잘 굶고 다녔어요. 제일 많이 굶은 기억이 아마 만주에서 `진화가의 비밀`을 저 봉천으로 안동현으로 다니면서 했는데 사흘을 굶어봤어요. 봉천서 서울까지 굶어서 왔습니다.

= 주태익씨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 영화와의...

- 저는 글쎄 북방 한촌에서 자라고 해서 이 영화 이런거하고 아주 인연이 멀리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구경한건 제가 세 살인가 네 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면사무소 앞뜰에서 하는걸 구경을 한 생각이 나는데요.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그런 정도 본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1922년이던가 1년이던가 그 경입니다.

= 그러니까 서너살 때 기억을 지금 되살리시는 거 보면언...

다음에 노래손님의 노래를 듣기로 하겠습니다.
김용만씨의 노래 `대추나무 집 할머니`

♬ 대추나무 집 할머니 - 김용만

= 김용만씨의 노래 `대추나무 집 할머니` 였습니다.

= 다음에 얘기손님이 등장하겠습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방청하시는 여러분이 지금 나오시는 분이 누군가 하시다가 오른쪽에서 나오시니깐 아, 저분이구나 하면서 박수를 좀 더 세차게 보내주셨습니다.
지금 나오시는 분은 과거에 아마 여러분이 연극을 통해서 영화를 통해서 잘 아시는 분, 어떤분은 얘기하기를 이분을 일러서 여왕이라 그랬습니다.
무슨 여왕이라고 한고 하니 눈물의 여왕이다 이렇게 칭호를 붙였던 분 전옥씨가 이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전옥씨는 요근래에도 저희들이 보기에도 `연산군`이라는 영화에서도 조대비로서 사극에 많이 나오시고, 특히나 비극에 여주인공으로 많이 나오시는걸 저희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옥씨는 무성영화 시대에도 활약을 하셨기 때문에 이자리에서는 주로 무성영화 시대의 추억을 좀 더듬어 주십시요. 하는 것이 저희들의 청입니다.
얘기의 실마리를 풀어주십시오.

- 열 다섯살에 제가 영화계에 나왔습니다. 그 때 극동영화사라고 하는 데서 여배우를 모집한다고 그래가지고 함경도까지 사람들을 모두 보낸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오빠가 전두옥이라고 있었는데 그 우리 오빠가 저기 지금 앉아 계신 복혜숙 언니가 그 때 한 참 주인공으로 날릴 땝니다. `진화가의 비밀`이니 `낙화유수`니 이런걸 한참 주연으로 하실 땐데 거기에 계기가 되어서 혜숙언니가 출연하시는데 우리 오빠 되시는 양반도 아마 출연을 했어요.
그러니깐 자꾸 나를 집에서 꾀요. 첨엔 전 영화계에 이렇게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랬었는데 뭐 나가면 뭐 참 집도 2층집이고 마당은 넓은 마당인데 전부 잔디가 깔려있고 그리고 배우가 되면 말을 타고서 카우보이 마냥으로 이렇게 한다구요. 이렇게 해서 어린걸 자꾸 꾔기 때문에 오빠 따라서 열다섯살 먹던 5월달에 집을 나왔어요. 그래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서울역에 도착을 하니깐 이슬비가 내려서 불이 위에도 있고 땅에도 있고 그렇더군요. 아스팔트란 그 때 처음보는 거예요. 촌에서 올라올 때. 그래서 따라서 그냥 그 양반을 따라서 소위 스튜디오를 갔습니다.
갔더니 어디로 가는고 하니 지금 반도호텔 그 뒤로 바로 돌아서면은 우물이 있고 빈가들이 주욱 많이 있는 집이에요. 다닥다닥 붙은 집인데요.
아침 여섯시에 내려가지고 거기를 가가지고 대문이 없으니깐요 일본집 그런집이니깐. 문을 쓱 열고 들어가니깐 머리가 이만씩 긴 녀석들이 전부 이불쓰고 드러누웠다가 벌꺽 일어나는데 깜짝 놀랬어요. 그래 2층 화장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날부터 지금 그런생활이 시작됐는데 아침 여섯시에 내린 사람을 인제 오후 다섯시쯤 데리고 나가서 촬영을 한다고 그러는데 대본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사랑하는 한 사람이 멀리 있는데 꽃을 이렇게 화분에 꽃을 냄새를 맡으면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연상을 하라고 그러니 촌닥이 처음 오니까 어리둥절 해가지고선 뭐가 뭔지도 모르게 하고 왔습니다. 왔는데 그날 저녁부터 잘 데가 없어요. 맨 남자들이니깐요. 머리가 이만치씩 모두 긴 양반들이 그 때 예술하는 양반들은 다 이렇게 머리가 길었어요.

. 윤봉주씨도 거기에 한 몫 끼었었지.

- 그 때는 아니예요. 그 뒤지. 이만치씩 모두 긴 양반들이 있는데 어디가 잘 데가 없어요. 그래서 소위 왜말로 오시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오시 그 속에 들어가 자고, 오빠는 그 문 밖에서 주무시고요. 지켜서 있었습니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고,

. 아까 뭐 혜숙언니 영화 주연한걸 보고 한다고 그랬는데. 그 때 저 색시가 여관으로 찾아왔어요.
그 내 책임을 지우니까 내가 그걸 얘기해야 되겠어.그래 찾아왔길래 연극하겠다고 찾아왔길래, 아이고 학교 졸업하고 해도 넉넉하다고 어서 부지런히 공부해서 학교 졸업하고 찾아오라고 그랬더니 아 싹 쫓아 올라오지 않았어요.

= 다음에 다시 노래손님 라미라 씨스터가 나와서 `아카시아 로맨스`라는 노래를 들려주겠습니다.

♬ 아카시아 로맨스 - 라미라 씨스터

= 네. 라미라 씨스터가 곱게 불러준 노래 `아카시아 로맨스` 였습니다.

다음에는 희망면담으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네. 지금 조월애씨가 나오셨는데요. 저희 동아방송에서 유쾌한 응접실이라고 해서 오늘은 마침 활동사진 얘기를 하면서 쭉 지나왔습니다.
조월애씨께서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당시 화려했던 그 변사 시절을 좀 간단히 얘기해 주셨으면은 우선 고맙겠습니다.

- 네. 그당시에는 무성이었기 때문에 악사가 12인조와 앉아서 간주를 넣고, 그리고 해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날을 회상해서 한마디 흉내를 내겠습니다.

-변사 조월애씨의 무성영화 `아리랑` 해설-

= 네. 조월애씨의 무성영화 시대의 `아리랑` 한 장면을 갖다가 저희들이 해설을 들었습니다.
다음에는 퀴즈를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다음 노래를 들으시고 어떠한 노랜가 하는 것을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퀴즈 노래-`세동무`의 영화 주제가

노래 나오기가 무섭게 벌써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전옥씨도 말씀하시고, 주태익씨도 말씀하시고
`세동무`의 영화 주제가로 나왔던 그 노래. 맞습니다. `세동무`의 주제가 였습니다.

오늘 노래손님에 김용만씨, 라미라 씨스터, 현인수씨, 얘기손님에 전옥씨, 희망면담에 조월애씨 단골손님에 복혜숙씨, 주태익씨, 이서구씨, 새 손님에 윤봉춘씨, 사회 전영우였습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와 함께~ 습관에 대한 이야기 다방에 얽힌 이야기


(입력일 : 2007.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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