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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에 만난 사람
백철(평론가) - 줄을 타는 곡예사 같이…
백철(평론가)
줄을 타는 곡예사 같이…
1966.10.23 방송
-(음악)

0시에 만난 사람.

싱그러운 밤입니다. 고요한 밤에 나눠지는 정다운 얘기와 감미로운 음악. 오늘부터는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평론가 백철씨를 모시고 보내드리겠습니다.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네.

- 요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뵙기가 힘들었는데.

- 뭐 요즘에는 학교에 주로 나가고요.

- 네.

- 또 그 뭐 팬클럽을 내가 지금 맡았기 때문에 뭐 여러가지모로 바쁩니다, 사실.

- 네, 헤헤. 그러시겠지요. 선생님은 평론가로서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고요.

- 네.

- 또, 평론가로서의 여태까지 기반과 많을 일을 해오셨는데, 선생님 평론을 시작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 그러니까 제가 문단에 나왔다는 것이 1931년. 그러니까 아마 35년경동안 한 35년 전에.

- 정말 오랜세월이지요? 그렇게 말씀 하시면서.

- 네.

- 선생님도 무척 감회에 젖으시는 표정을 짓고 계신데요.

- 네네. 그런데 그 뭐 지금 잘 모르시는 분들은 잘 모르실거에요. 우리가 이 살아온 내가 철이 들어서 뭐 문단에 나왔다. 그 뒤에 35년간 하면은 그 우리 젊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참 파란곡절이 심한 시대를 지내온 셈이지요.

- 네.

- 그래서 난 지금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자기 그동안 생각을 할때에 마치 그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 같은.

- 네.

- 늘 위태위태한 줄을 타는 뭐 그런 생각같은 것을 해오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뭐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아볼 때에 그래도 뭐 잘했던 못했던 간에 35년간을 그냥 같은 일을 계속 해왔다는건 그런 보람을 느낄때가 있고요. 또 그래도 뭐 그러면서도 저서하는데에서도 그렇게 큰 과오는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것은, 참 그게 누에 감사해야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뭐 그런생각을 하지요, 늘.

- 네, 그러시겠습니다.

- 네.

- 지금 줄을 타는 곡예사라고 한마디 말씀.

- 네.

- 그 어려운 생활을 지내온 동안에.

- 네.

- 그 생활을 돌이켜서 그런 말씀 해주셨는데요.

- 네.

- 그 줄을 타는 곡예사의 심정. 공부하시는 동안에.

- 네.

- 여러가지 많으시겠지요?

- 네, 그런데 그 우리 지식인이라는것이 본래 인간성이 약하지요. 약해서 잘못하면 우리 그 사회에 또 어떤 그 권력, 그게 유혹을 받게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길 잘못디뎌서 여러가지로 참 과오를 범하기가 많은데, 그런일이 많지요. 많은데 근래에도 뭐 내가 좀 느끼고 있는것은 너무 그 지식인들이 이 권력이라던가 혹은 금력에 너무 쉽게 유혹을 받는거 같아요.

- 아하, 네.

- 물론 나 같은 사람도 이제 과거 뭐 일제시대에 뭐 어려운 시대를 지내온 동안에 가만히 생각하면은 여러가지 참 부끄러운 일도 있고 과오를 범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쉽게 그 현실에 그 어떤 속된 그런 내심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는데.

- 네.

- 근래에 지식인들은 좀 더 그 표현이 너무 안일한 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뭐 지금도 그야 모르지요. 나같은 사람도 이제 또 살아가는 동안에 뭐 어떻게 과실을 범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내가 원하는것은 뭐 과거도 어떻게 그저 요행이 큰 아까도 말씀드린대로 큰 과오가 없이 지내왔으니까 이 뒤에도 그런 실수나 없이 자기 하는 평론인의 일이나 전심으로 해서 뭘 좀 더 보람있는 성과를 남기고 싶다. 이런 생각을 늘 그저 자기에 그저 어떤 모델이라고 할까? 그런것을 써줄 생각은 있습니다.

- 네.

- 그게 될수 있으면 그 일이 좀 더 성과있는 일이 있어서 그 뒤에 원하는 평론을 한다던가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 좀 더 어떤 그 무슨 참고가 될거같은 이 일이 될까하는 뭐 그런 유산같은 것이 이제 내 있어야 일에서 남겨지면 좋겠다고 늘 생각을 하고 있지요.

- 네.

- 정신적인 유산이라는것은 커다란 힘이 되겠지요?

- 네, 그렇지요.

- 네.

- 우리 문학이라는것은 역시 과거에 현대 젊은 사람들은 너무 그 젊은 사람들에게 패기만을 믿고요. 역시 과거 사람들의 공적을 좀 생각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 네.

- 그래서 나는 불만인데요.

- 아, 네.

- 물론 젊은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또 어떤 그 진보가 있겠지요. 하지만은 우리 문학 특유의 문학이라는것은 이건 과거에 하는 사람들의 하는일을 역시 어디든지 그것을 이어받는다. 그러면서 우리가 새로운 일을 한다.

- 네.

- 하는 이런 방법론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 패기도 필요하지만 역시하나 체계가 있는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무시하고서 혼자서만 일을 한다 하는일은 거의 그 문학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 네.

- 그런 일이 좀 더 젊은 세대에 있어 의식이 되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내가 해보지요, 늘.

- 네.

- 그러는 의미에서 내가 지금 현재에 있어서 뭐 여러가지 기성세대라고 할까요? 이 젊은 세대로 보면 낡았다 이런 생각도 물론 하는지 모르지만은 나로서는 또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많이 그래요. 많이 노력을 합니다. 자기 힘을 다해서 달음박질도 해서 어떻게든지 젊은 사람들한테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하고 따라가지요.

- 네.

- 그것이 내 장점인지도 모르겠어요.

- 아하.

- 그러니까 젊은 세대에 작가들 시인들과 친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될수 있으면 그 사람들하고 늘 접촉하는 것이 내가 그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낡은 세대로써 자기 입장에 서지만, 동시에 젊은 사람들과도 악수를 하고 싶다고 하는것이 내 생각이에요. 하나의 문학관이라고 할까? 세계관이라고 할까? 뭐 그런것이 내게는 있습니다.

- 네,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 네.

(음악)

- 선생님이 문단에 데뷔하실 때가 1931년, 그러니까 24살.

- 네.

- 24살때입니다. 그때에.

- 24살때에 데뷔하셨는데.

- 요즘 사람들도 뭐 그렇게 나오지요. 하지만 그 때에는 역시 그 나이 더 빨랐다고 볼까요?

- 네.

- 그러면 그 시대에 따라서 그 문단에 등장하는것을 보면 가령 이제 우리가 1908년에 소년이란 잡지가 우리 나왔습니다만은 그때에 육당 최남선씨가 그때에 19살날때에 이제 소년 잡지라고 하는것을 주관을 했습니다.

- 네.

- 그러니까 시대가 우리 그 시대가 빠를수록 나와서 활동하는 그때에 연령이 더 빨라요, 더 일렀다고 할까요? 그런 경향이 있어요.

- 네.

- 잡지사에 늦어서 내가 나왔을때 24살이니까, 약간 그 19살에 비하면 나이가 많이 올라간 셈이지만. 그래도 지금에 비하면 빠른 셈이겠지이요, 역시.

- 네.

- 그래서 이 시간에 어느 분인가 말씀하셨는데요, 지금 세대교체, 세대교체하지만은 그 당시에는 더 젊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요.

- 예.

- 그런 말씀을 해서.

- 예.

- 글을 쓴 적이 있는데요.

- 네네.

- 그러고보니까 19살, 선생님 24살이지요.

- 네, 24살.

- 24살이면 굉장히 빠른 연령인데요.

- 네. 지금도 물론 그렇게 나오는 분이 있습니다만은 대체로 보면 아마 빠른 셈이 되겠지요.

- 네, 그럴거에요.

- 그리고 그 때에 그저 나보다도 조금 전 지금 월탄이나 이런분들이 참가한 백조파 시대라고 1922년에 있었는데요. 그때에는 대게 20살, 19살 역시 그런 시대입니다.

- 네.

- 그런 사람들이 주가 되어서 하나의 문학 그룹을 이루고 하나의 문학유파 운동을 일으키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시대에 그 때에는 지금보다는 훨씬 아마 전체에 일반적 그.

- 경향이?

- 경향을 보면은 연령이 낫다고 일렀지요.

- 네.

- 그렇게 볼수가 있어요.

- 그런데 선생님 그 문학의 싹이라고 할까요? 그 문학공부를 하시는데.

- 네.

- 어디서 하셨습니까? 학교시절이.

- 네, 나는 그 일본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일본 동경 고등사범을 졸업을 했습니다.

- 네.

- 내가 20살때에 입학을했는데. 내 자랑을 하나해야겠군요. 그런데 그 때에 일본 동경 고등사범이라고 하면은 일본 나라서는 제일 어려운 일하기 어려운 학교중에 하나입니다.

- 수재들만 모인 학교이죠.

- 네, 그래서 각 그게 전국에 고등학교 지금은 중학교입니다만은 중학교 교장이 3번이내에 성적을 가지고서 추천을 해야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어요.

- 아하, 네. 3등 이내에?

- 네, 3등 이내에 들어서 이제 나는 저 저 평안북도 신의주에 저 조그마한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뭐 일번은 일번이지요, 성적은 일번인데.

- 아하. 1등 이시군요.

- 그때에 동아일보에 내 사진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 네.

- 그러게 그것이 1927년쯤 보거든요. 그리고 그때에 동경고등사범을 그때에는 서울에 와서 쳤어요.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 동경이나 거기가서 쳤지만은

이 한국 사람들은 그때에 서울 와서 쳤습니다. 역시.

- 네.

- 일본 사람들하고 합해서 쳤는데 그때에 내가 이제 12월달에 올라와서 미리 쳤어요, 쳤는데. 그 뭐 될생각을 안했지요, 전국적으로 어려우니까. 시험삼아 쳤는데 2월달에 전보가 왔거든요? 2월초에 발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어려운 학교에 시국을 한국에 시국을 학교에서 졸업을 하고, 입격을 했다, 합격을 했다는건 운도 운이겠지만 상당히 그 때에 역시 그.

- 기쁨이시라고 하시겠어요?

- 기쁨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식민지 시대지만은 역시 좋은 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큰 감격이었어요.

- 네.

- 그런 감격을 맛본 일이 있지요. 그 뒤에 이제 동경을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그때에 일본에 들어가니깐은 일본에 사회정세라는것이 굉장히 뭐라고 할까요? 하나의 격동시대라고 그럴까요?

- 네.

- 말하면 그 사회주의가 팽창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때가. 그래서 뭐 들어가보니깐은 그 일본 그 동경 사회전체가 그런 물결들을 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 네.

- 그래서 나도 공부를 그때에는 영문과를 그때에 들어갔기는 들어갔는데 공부를 잘 하지를 않았어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은, 그러니까 자연히 뭐 중학교 시대에도 뭐 문학 시도 좀 읽고 뭐 그런 관계가 있어서 이제 그 교우잡지에 이제 시를 발표 했어요.

- 네.

- 2편인가 발표했더니 의외로 거기에 상급생이 거기 이제 작품 시평을 썼는데 상당히 나를 칭찬했거든요. 거기에 용기를 내어가지고 여태까지 나도 문학을 해본다, 뭐 이래서 차츰차츰 문학 서적을 또 읽게되고 그때에 이제 교수로써 다케다도 소모부라고 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영문학과 시인인데 그 사람의 영향을 또 많이 받았어요. 또 개인적으로는 퍽 사랑을 했고요.

- 네.

- 또 차츰차츰 문학을 지망하게 되고 그렇게 되니까 저연히 학부에는 등한시하게되고, 나가서 저 문학계 선배들을 찾아가게 된다는가, 이런일을 많이 하게 되서 차츰차츰 문학에 길을 트게 된 셈입니다. 처음에는 일본말로 출발을 했어요.

- 네.

- 네.

- 시를 처음 쓰셨으니까.

- 아하.

- 시를 처음 썼습니다.

- 네.

- 한국에 돌아와서도 당분간 시를 좀 썼었고요.

- 네.

- 평론함으로써 시를 썼고 그랬습니다. 대개 다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시를 한번쯤 써보지 않았나 생각이 되는데요.

- 네.

- 요즘도 이제 고등학교 상급생이라던가 대학생들 보면은 좌우지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처음에는 시를 쓴 사람이 많습니다. 역시 그 처음에 젊은 시절에 그 어떤.

-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까?

- 감수성이라고 할까, 감정적으로 쓰게 되니까 자연히 시에 손대기가 쉽지요.

- 네.

- 그동안 그러한 순서로써 문학을 시작했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 네.

- 네.

- 그러니까 동경생활에서 문학에 대한 꿈이 싹 트고.

- 네.

- 그래가지고.

- 네.

- 성장하신 셈이시겠습니다.

- 네. 그때에는 우리가 우리가 요즘과 달라서 무슨 영국을 가본다던가 미국을 가본다던가 그런 시대가 못 되지요. 그리고 일본이 길을 참 하나에 우리나라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기껏 간다는 것이 또 동경입니다. 동경을 가면은 뭐 세계의 중심지를 나가있는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때에는 문학공부도 그저 동경에 가서 공부를 한다면은 아마 지금 파리라던가 혹은 미국의 이제 뉴욕이라던가 뭐 그런데 가 있는 그런 기분이 아닐까 생각이 되요.

- 그렇지요.

- 네, 그럴때에는. 지금은 젊은 사람들 생각 못할 때입니다. 그때에.

- 네.

- 네.

(음악)

- 그러니까 백선생님께서는 학과공부 보다도요, 문학공부에 치중하시고 또 문학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선생님과 선배, 친구들을 많이 찾아다니시고 하셨다는데요.

- 네.

- 문학서클, 문학그룹이 있었습니까?

- 네, 있었습니다, 그때에 내가 이제 처음에 그렇게 해서 문학의 뜻을 갖게 되니까 아무래도 나같은 문단 사람들. 그 선배들을 접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 때에 어떤 문학 잡지가 있었는가 하면은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그 주로 시 잡지입니다만은 거기에 주관하는 사람이 시나토리 쇼고라고 그 때에 아마 나이가 아마 쉰다섯쯤 된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인데요. 그 사람이 이게 누구에 영향을 받은 사람인가 하니 그 미국의 슈트만의 영향을 받아서.

- 네.

- 소위 민중파 시인이라고 하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 두 사람이 있었는데 시나토리 쇼고하고 후쿠다 마상이라고 하는 두사람이 있었는데 시나토리 쇼부라고 하는 사람이 주관하는 잡지가 지상낙원이라고. 소위 그 어떤 민주주의적인 그런 목표로 하는 시 잡지였습니다. 거기에 내가 동인이 되었어요. 동인이 되어서 처음에 뭐 시 몇편을 보내고 작품좀 하고 그랬더니. 시나토리 쇼고가 한번 불러서 우리 동인이 되지 못하냐? 이래서 이제 동인이 되었습니다.

- 네.

- 되었는데 그래가지고 뭐 거기에 평론 좀 쓰고 시를 쓰고 그러는 동안에 그 사람들이 이따금 만나서 뭐 술도 마시고 뭐 잡담도 하는 얘기를 이제 거기서 지켜보고는 했어요. 그런데 가만 자세가서 앉아보니까요 열어보니까, 그 때에 젊은 나는 뭐 22살, 23살 아닙니까? 그러니까 상당히 그 패기라고 할까? 야심이라고 할까? 뭐 굉장히 긴장미가 있는 때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 앞에서 술을 마시고 얘기해보니까 소위 일본말로 오사래라고 하는데 잡담속에 그 거의 농담말이지요.

- 아하, 네.

- 어떤 그 조크를 많이 한단 말이에요.

- 그래서 너무 그 일종의 뭐라고 할까 그 사람들 하는게 너무 문학을 하는 태도가 너무 이지하다.

- 오로지 사회에 대한 인식도 없고.

- 네.

- 긴장미도 없고 그래서.

- 네.

- 불만이 있고 해서 뛰어 나가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그러니까 내가 한 1년정도 있다가서 뛰어 나오면서, 어떤 생각을 했냐면 역시 그것은 그 때에 아까 내가 말씀했습니다만은 그때에 사회주의적인 풍조가 굉장히 팽창하고.

- 네.

- 또 문학에서도 그 굉장히 그 세력을 가지고 진출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굉장히 그 참 용기도 있어보이고 어떤지.

- 박력있고. 허허.

- 박력있고 말이지, 그 젊은 사람들은 굉장히 의욕적이거든요. 그 방면으로 설레게 되어서.

- 음.

- 그 사회적인 문학 서클로서 접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다음에 나간것이 전기시인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요즘 말하면은 소위.

- 전유문학?

- 네, 전유문학인데 요즘 말하면 그런 무슨 엔티로막이라던가, 무슨 엥그리 영맨이라던가 이런것이 아니라요. 이것은 순전히 그 사회주의적인 그러한 색채를 띈 그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잡지입니다.

- 네.

- 그래서 전유시인이라고 했거든요.

- 네.

- 거기에 동의가 되어버렸어요. 그때부터 내가 쓰는 시라는것은 상당히 한국적인 것을 재료로 했지만은, 굉장히 그 소위계급적인 반항의식적인 넣어가지고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이제 내가 기억하는것은 우리나라 그 때에 소작적이라고 우리나라에도 있었어요.

- 네.

- 소작적인 일을 중심이 되어서 일본제군가에 그 때에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여러가지 토지도 점령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일본 자군가 계급에 대한 반항적인 의식을 넣어서 굉장한 그 과격한 그런시를 써서.

- 아하.

- 낸 일이 있습니다.

- 네.

- 그래서 그 때에 프로레타리아 문학이 운동일까? 거기에 참가를 하게 되었고, 또 전유시인에 동인이 되고. 차차 그 뒤에 일본에는 무슨 잡지가 나왔는가 하니 그때에 뭐 전기라던가 혹은 또 이 그때 프로레타리아 그들에 의해서 예술과 동맹이라고 해서, 우리나라도 있었지만은 그 사람들이 그거를 만들고 있었는데 나프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카프라고 그랬는데.

- 네.

- 그걸 나프라고 그러는데 이 소련에서는 라프라고 그랬고, 일본에서는 나프라고 그랬고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카프라고 그랬거든요, 나프에 참가하는데까지 이르렀지요.

- 네.

- 그렇게 되어서 내가 문학을 하는 초기 처음을 지나서 그 다음은 프로레타리아 문학계향으로 많이 전향 들어간 하나의 경력을 가지게 된 셈입니다.

- 아하, 네.

- 지금 생각하면은 철없는 얘기이지만요, 그러나 그때에서는요 또 환경이라고 할까? 자기에 어떤 그 자기가 그때에 한국사람으로서 그 여러가지 불우한 환경이 있다고 할때에 그 불평과 불만은 그 어디까지 안하느냐?

- 분출구가 되겠지요?

- 그렇지요.

- 하나의.

- 그렇지요.

- 일종의 파열구라 할까?

- 네.

- 그런것을 그런데서 보고 찾아다닐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 왜그러냐 하면은 그 사람들은 프로레타리아가서 계급 뭐 들어가보니까 그 민족적 차별하는 모습 뭐 이렇게 하는 문제가 우선 젊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하나의 그런 장소가 되었더군요.

- 네.

- 상당히 그 그때에 한국사람 젊은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매력을 끌었어요. 그때에는 순전히 공산주의라던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그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이 그 쪽으로 쏠렸다고 말할수가 있겠지요.

- 네, 그렇겠지요.

- 젊은 사람들로서는.

- 네.

- 그렇게 되어서 상당히 프로레타리아 문학 그 방면으로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네.

- 그때에 계셨던 그 한국 유학생중에요.

- 네.

- 함께 그룹해 참가하시고 또 교우관계를 맺으시는 분들은 안계십니까?

- 그때에 김영재씨라고.

- 네.

- 지금도 계십니다만은 그 이가 역시 나프명을 입을때 그 이가 그 일본시를 썼습니다. 많이 편파적으로 했습니다. 대륙에 노래라고 해서, 그 사람 그 아주 큰 일본군단에도 그 때에 편파적이었고, 그때에 거기에 같이 그때에 참여했던 사람은 김영재씨밖에 없고요, 없고. 그 다음에 이제 한국사람으로써 그때에 많이 와 있었지만은 그 사람들이 일본말로서 발표하지는 않았고요. 다만 그 사람이 와 있기만 했는데 일본말로 발표한 사람은 김영재씨가 그때에 같이 발표를 했습니다.

- 네.

- 선생님의 좀 전에 말씀하시기를.

- 음.

- 그 시를 쓴다는거.

- 음음.

- 젊었을때.

- 음.

- 감정적이고.

- 음.

- 감성적인

- 음.

- 열망이에요.

- 음.

- 하나의 표현으로써 시를 쓰고 붓을 들어서 감정을 노래하고 그런 얘기를 해주셨는데요.

- 음.

- 그러한 아름다울때에 젊었을때이니까요. 청춘다운 얘기도 있을만 하고 에피소드도 있을거 같은데요.

- 네, 그게 뭐 그 뭐 에피소드라고 할까요? 뭐 그런것을 지금 생각하니까 하나 생각이 나는군요. 그거 내가 프로레타리아라고 하니 문학을 하기 직전에 얘기입니다만은 내가 일본 동경사범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2학년될 때인가 봅니다.

- 네.

- 그 때에 그 한국 여학생으로서 김 내 그저 이름은 숨겨야 되겠습니다. 여기 어느분의 그 애인이었기 때문에. 난 그거 모르고서.

- 그렇지요.

- 생존해계시는 분이십니까?

- 아닙니다. 그 이는 작고 했습니다만은.

- 네.

- 그 이 자제가 여기 문단에 있는 분입니다. 이름을 숨겨야 되겠는데.

- 아하하.

- 김 무슨 공공 양이라고 하는 분인데. 그이가 거기 츠이쓰다 여학숙이라고 영문학과를 나와서 하고 있었어요.

- 네.

- 나보다는 나이가 위이긴 위이지요.

- 연상의 님이군요?

- 네, 연상이지요.

- 네.

- 그거는 뭐 그때에 내가 젊은 시절이라는건 다 지금도 아마 그랬습니다만은 결국은 뭐 굉장히 정열적이니까 뭐 불문을 가리지 않고서 뭐 그런 모험을 할때 아닙니까?

- 하하.

- 그래서 내가 그 이를 퍽 사모하게 되었어요.

- 네.

- 만나서 유학생에서 만나고 해서 그래서 굉장히 대담한 편지를 썼습니다. 굉장히 대담한 편지를 썼거든요.

- 네.

- 일종에 구연적인 것을 했는데. 그런데 그 이는 나를 퍽 좋아했기는 했는데. 그 이가 나를 좋아한다는건 하나의 동생으로써 나를 좋아했지요.

- 네.

- 무슨 상대에 애인으로서 사랑하는것은 아니거든요. 아닌데 그게 그 편지가 지금도 내 구절에 있습니다만은. 나는 참 당신을 여간 참 귀엽게 생각을 한다고 그랬어요.

- 하하하.

- 귀엽게 생각을 한다고.

- 네네, 그랬군요.

- 나를 귀엽게 생각한다고 하지만은.

- 네.

- 하지만 나는 이미 벌써 애인이 있는 사람이다 말이에요.

- 네.

- 있는 사람이다. 또 그렇지 않아도 연령이 된것도 2년인가 그러는데 우리가 사랑을 해서 정말 행복한 결실을 맺을수가 있겠느냐? 잘 냉정하게 생각을 하고 그렇게 참 일종의 거절의 편지를 받았지요.

- 네.

- 그래서 그 순간은 굉장히 실망을 했지만은 참 시간이 지나서 정신을 차려보니까 그래서 그의 말이 옳다고 해서 그래서 문단처럼 참 그 사람을.

- 따르고?

- 네, 섬기고 따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 네.

- 그 사람을 폐병으로써 일찍이 잡고 그랬지요.

- 아하.

- 일찍이 잡고 그랬지만은 내가 동경에 있는동안 벅찬 누이처럼 연상의 누이처럼 그 친근하고 그렇게 지낸일이 있지요.

- 네.

- 그 때에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할까요?

- 하하, 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처음 그러면 연애편지를 쓰신 셈이세요?

- 네, 그렇지요. 처음으로 쓴 셈입니다, 그전에는 뭐 그전에는 또 지금도 뭐 여학교들은 다들 무슨 뭐입니까? 동성연애라고 있지요.

- 네네.

- 그 남학생들도 그런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학생시절은 그런 에피소드들도 있지만은 그런것은 우리가 뭐 얘기를 할수 없고, 여성에 대해서 여성에 대해서 내가 연애편지를 쓴 건 동경에 있을때 김 공공 양에 한테 쓴 것이 첫번이라고 말씀드릴수가 있어요.

- 네. 첫번째 편지를 쓰실때에는? 아마 오랜동안 생각을 하시고.

- 네, 그거는 뭐 며칠걸렸지요.

- 네.

- 며칠걸려서 자꾸 꾸뻑꾸뻑 해갖구서 말이지요. 참 뭐 그 뭐 참 그 때에는 자기 전체를 부어넣는 생각을 가지고서 썼어요. 그리고 긴 아마 지금 생각할때도 아마 200자를 한 20여매 썼던가요?

- 아하, 네.

- 그랬던거 같아요, 역시 젊을때이니까요.

- 아마 그 편지가 지금 읽어진다면은 아름다운 시 한편이 되었겠지요?

- 네.

- 그렇겠지요?

- 네, 그렇겠지요. 감상적으로 쓴 것이지만요. 그때에 아름다운 수사같은 것을 문학구절에 깍아달라고 그랬지요.

- 네. 돌이켜보면 참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생각되지요?

- 네.

- 지금 생각하면 참 감회가 깊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 네.

(음악)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평론가이신 백철씨를 모시고 보내드린 0시에 만난 사람. 대담에 최춘자 였습니다. 여러분 내일 이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입력일 : 200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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