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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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0시에 만난 사람
이한구(전 이대 물리학장) - 14살에 장가를 갔는데…
이한구(전 이대 물리학장)
14살에 장가를 갔는데…
1966.10.07 방송
(음악)

0시에 만난 사람. 분주했던 하루가 지나고 이제 밤이 무척 깊었습니다.

이 시간에 보내드리는 0시에 만난 사람. 오늘밤부터는 전 이화여자 대학교 물리대학장이신 이한구씨를 모시고 보내드리겠습니다.

-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 아, 오랫만이에요. 잘 지내셨습니까?

- 요즈음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는데요.

- 네, 갑자기 그렇게 되었더군요, 네.

-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 뭐, 그저 뭐 늘 마찬가지이지요. 책도 보고 나들이도 하고 뭐 그래요.

- 네, 선생님 이 시간에 모시느냐고요.

- 네.

- 아마 프로듀서가 애를 쓴 모양인데요.

- 네.

- 요즈음 선생님 연락 드리기가 힘든거 같아요.

- 조금 있는데가 일정하지를 않아서요.

- 네.

- 집에 있는 시간도 그렇고 또 학교에 지금 일정하게 맡은것이 없으니까 잠시잠시 들리기는 하지만은. 그래서 좀 아마 고생이 될거에요.

- 네.

- 미안하게 되었어요.

- 아하, 요즈음 학교에도 가끔 나가시고 연구실에 계시나요?

- 네네.

- 네. 오늘 선생님 모시고 지난날의 여러가지 추억담이라고 할까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어서.

- 네.

- 이렇게 모셨는데요, 아무튼 동경시절에 있었던 유학생활을 통해서요.

- 네.

- 많은 얘기도 듣고 싶고.

- 음.

- 그 밖에 한국 문학의 모습도 선생님의 얘기를 통해서 듣고 싶은데요.

- 음.

- 동경 유학을 떠나시기 전에 선생님은 결혼을 하셨다고 제가 알고 있는데요.

- 네, 뭐 글쎄 뭐 하도 오래된 얘기인데.

- 네.

- 우리 시대만 하더라도 봉건사상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 조혼이라는게.

- 네.

- 그 조혼이라는 것이 상당히 유행했는데. 뭐 그 자세한 얘기 일단 토라져버리고 했는데. 하나 내가 특별한 얘기 그 잊혀지지 않는 중요한거 하나 있어요.

- 네.

- 내가 장가를 14살에 갔는데 그 때에는 이미 물론 일본이 합병을 했을 시대인데 일제시대인데 결혼연령이 17세인가 그렇게 되었을거에요. 남자가.

- 네.

- 17세인가? 그때에는.

- 네. 정년이요?

- 네.

- 그 전에는 미성년 결혼이라면 법에 걸려요.

- 네.

- 네, 그런데도 집에 할아버지, 뭐 집안 뭇 어른들이 본 장가를 보내야된다. 법의 위법기간아니에요?

- 네.

- 그래서 호적을 내 다섯살 명의서 열아홉살로 해놨어요.

- 아하, 네.

- 14살 먹은 날 더러 누가 물어보면 19살이라고 하라고.

- 네.

- 그 거짓말 시킨거죠, 그거 참 괴로웠던거에요.

- 네.

- 속이 두근두근 거리고 누가 물어보면 19살로 할라니까. 14살 된 사람이, 19살 그러면은 완전 어른인데.

- 네.

- 그거 지금도 그게 남아있어요.

- 네.

- 그리고 그게 그렇게해서 이제 결혼을 조혼을 시켰지요. 그러니까 조금 무리하게 해서 결혼을 시킨거 아니겠어요.

- 네.

- 그런데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하셨나요? 집안 어른들께서요?

- 글쎄요, 그 때에는 다 그렇게 했어요. 14살, 15살, 17살만되어도 그건 벌써 노총각이 되고.

- 아.

- 그렇게 생각했을거에요, 그 시대에는.

- 네, 그러면 사모님은 그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 나보다 3년 위지요.

- 그 때에는 전부 여자들이?

- 위지요, 네.

- 신부들이 나이가 위였지요?

- 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도 7년 연장인데요, 뭐.

- 네. 그래서 할머님들 옛날 얘기 들으면요.

- 네.

- 귀여운 새신랑이 그 신부에게 누룽지 달라고 그랬던.

- 네.

- 재미난 얘기도 많지요?

- 그런 정도 얘기는 없고요, 그래도 14살이면은 꽤 큰 편이지요.

- 네.

- 그때로서는.

- 네.

- 뭐, 그런 연령이면 어떻게 신랑구실을 하리라고 믿고 보냈겠지요.

- 그런데 선생님은 결혼하시는 날.

- 네.

- 결혼하신다고 실감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 네, 그 내가 바로 결혼한 해가 1918년이에요.

- 네.

- 그 삼일운동 전 해이거든요. 제 1차대전이 아마 끝날 무렵일거에요. 그런데 그 해에 스페인 감기라고 유행성 감기 굉장한 감기가 돌았어요.

- 네.

- 그래서 그 감기가 세계적으로 돌았는데 그 감기에 죽은 사람이 1차대전 죽은 사람 수보다 오히려 많다. 그럴 정도로 굉장히 지독했는데.

- 지독했군요?

- 네, 굉장히 지독했는데 나도 마침 감기에 걸렸어요. 나도 감기에 걸려가지고 날짜는 하기로 해놨으니까요. 음력으로 10월 11일인가 그러는데 하기로 했으면 가야되잖아요. 그러나 그냥 뭐가 뭔지 모르고 옷을 주어 입히고 말을 태워서, 그러니까 신부댁으로 가는데 아마 한 사천리 되었을거에요. 말을 타고 사천리를 가는데 전날 떠나서 갔어요. 앓으면서 갔지요, 신부도 앓으면서 가고요.

- 아.

- 신랑, 신부 모두 감기에 드셨군요?

- 네, 하하.

- 하하, 네.

(음악)

- 지금 들은 이 곡이 낙엽이지요? 고엽.

- 네.

- 정말 가을이 가깝게 느껴지는군요, 이 곡을 들으니까 문득 생각이 되는데요. 선생님 결혼하실 때도 음력 10월달?

- 네, 음력 10월달이었어요.

- 네, 그러면 낙엽이 훨씬 많이 지고나서 눈이 올때이겠어요?

- 네, 지금 같이 눈이 왔지요. 눈이 그 해에는 많이 왔어요.

- 또 우리 고향은 함경도 였기 때문에 아주 추웠어요. 그런 기억이 납니다.

- 네. 어린 새신랑께서 날씨도 차고. 아마 떨리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 하하.

- 흠흠. 그런데 좀 전에 말을 타고 가셨다고 했지만은 지금하고는 아주 풍습이 많이 달랐겠지요? 이 결혼하는 모습이.

- 지금도 시골에 가면 아마 그 식으로 하는데가 있을거에요. 그런데 그때 그 아버님이 내가 독자이거든요.

- 네.

- 그래서 뭐 서울에다가 그 관복이라고 해서 그 신랑입는 옷을 주문했는데 그때 만해도 이 교통이 불편해서 그게 미처 결혼 날짜까지 도착이 안되어서.

- 네.

- 네, 그래서 내가 입고 간 것은 그 이도령이 그 연개복 이도령이 이쁜 관하고 쓰고 간거 있잖아요.

- 네네.

- 바로 그런 식으로 하고.

- 네.

- 그렇게 그걸 뭐라고 그러나? 그 부채같은거 펴서 들고.

- 네.

- 그리고 간거지요, 그 뭐 아기 어린아이이지요, 사실은.

- 하하. 그리고 결혼하실때 14살이라고 하셨는데요, 학교는 다니셨어요?

- 학교는 나는 4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 네.

- 그리고는 그 때에 사정이 있어서 서울로 공부하러 곧 못 오고요. 2년을 그때까지도 집에서 그 와세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중학강의록이라고 하는게 있어요.

- 네.

- 중학 강의록을 2년이면 수료하는데 그러니까 뭐 간이 중학교 졸업 정도 되겠지요.

- 그런걸 읽고 또 한문서당.

- 네.

- 독학 한문서당?

- 그렇지요, 독학 한문서당 다니고.

- 네.

- 그러고 있을때이지요. 그런데 그 해가 1918년 그 이듬해가 삼일운동이 일어났지요. 그래서 이제 안되겠다 공부하러 가야되겠다. 하여간 집안사를 제치고 공부해야겠다해서 19년에는 전부 서울로 학교들이 전부 휴학이 되었어요. 전부 방학을 시켰으니까.

- 네.

- 그래서 못 오고 그 이듬해에 가을에 집에서 도망쳐서 서울로 올라왔지요.

- 아하.

- 만사제지하고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지요.

- 네.

- 그러니까 윗어른께 말씀을 드리면 허락을 안해주시니까.

- 네. 그렇겠군요?

- 집에서 경비대줄 형편이 안되니까 못간다고. 그 옆에 그 아저씨들이 계신데 그 이들이 하도 조르고 내가 조르고 그러니까. 여비를 몰래 마련해줘서 그래서 아주 그것도 동네 한 친구가 있어서 둘이 도망쳐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 네.

- 그러자면 여러가지 각오를 많이 하셨겠는데요.

- 네.

- 그러면은 사모님한테는 얘기 하셨습니까?

- 뭐 그 어리니까 그런 무슨 얘기 전에는 없지요.

- 네.

- 그리고서는 장래에 대한 얘기, 지금도 그렇지만은 그때에도 뭐 의논 하는 것도 없고, 또 그게 잘 안되지요. 그런 얘기를 밖에 내면 안되니까.

- 네.

- 그것도 몰래몰래 친구 어머니해서 또 그래가지고 그냥 떠나 올라왔지요.

- 남아의 큰 뜻으로 홀로 가슴에만 품으시고.

- 하하.

- 경주에 기미운동 그게 상당히 어린 마음에 충격을 줘서.

- 네.

- 그래서 하여간 공부를 해야된다.

- 네, 그러면 함경도에서는 삼일운동이 어떻게 번졌어요? 삼일운동은 거기도 다 독립만세를 부르고, 좀 늦게 알려지기를 조금 늦게 알려졌지만 그리고 4월에 양력 4월 중순경에 거기서도 만세운동이 여기저기서 불려지고요.

- 네.

- 그리고 모두 다 붙들려가서 난 그 때 15살, 14살인가 그럴때니까 어리니까 그건 뭐 대상이 안되지만은 어른들은 모두 가서 그 때에는 태형이 있어서.

- 네.

- 볼기를 스무 대를 맞고 나왔다는 등, 쉰 대를 맞았다는 등 그래서 뉘어 나오기도 하고.

- 네.

- 그러면서 한편으로 향학열이라는게 참 그게 굉장한거에요. 그 삼일운동이 중요하냐면은 동 삼일운동이 실패 성공문제가 아니에요. 그 향학열이라는거 그거 하나만 지키는것으로서도 충분히 성공한 운동입니다.

- 네.

- 난 그렇게 봐요.

- 네.

- 그래서 서울로 올라오신다음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 네, 서울로 올라와서는 또 서울에 와 계신 내 종향 사촌분들도 있고 동향에 있는 사람들 여럿이 서서 그 때에는 그러니까 학교를 정상적으로 가을에 들어갈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중동학교라고 있는데요. 그때에 그 중동학교 얘기를 하는것만으로도 굉장한데, 그때에는 시골서 올 수 있는 학교가 중동학교에요. 왜그러냐하면은 모두 오면은 상투 자르고 오니까요.

- 네.

- 정상적으로 학교에 들어갈수도 없고. 그 가을에 멀리 있는데 뭐 굉장해요. 그 얘기는 뭐 다할 수도 없는데. 내 있는 반에도 부자가 같이 다녔어요. 아버지 아주 막 상투를 잘라서 그 이마에 망근자축이 막 드러난 채로.

- 아하.

- 자기 아들하고 들어와서 공부한.

- 네.

- 그런건 정말 역사적인 그런 향학열이 아주 관로할때 중동학교 나도 들어가서 뭐 자리도 없어요. 그 멍석을 깔고 그리고 공부를 했어요.

- 네.

- 거기서 반년을 공부하는데 책상을 한번도 가지 못보고. 겨울방학 지난 다음에 겨우 이렇게 길다란 장의자.

- 흠.

- 그 호떡집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그리고 졸업을 하고. 졸업을 하고 그 이듬해에는 보성중학교 보의결로 3학년에 입학을 해서 들어갔지요.

- 네.

(음악)

- 그러니까 그 때 중동학교에서는 학생수를 제한하지도 않고 다녔던 모양이에요?

- 3부제를 했어요.

- 3부제요?

- 네. 오전반, 오후반, 밤반.

- 네.

- 나는 조금 늦게 가기 때문에 오후반에 다녔는데. 그 때에 뭐 그러니까 학생수도 모르지요, 얼마인지. 그런데 또 선생님들도 한분이 그저 최규동씨 같은분이 교장인데. 최대수라고 그러는데 대수 가르치는 분이 저 무슨 생물도 가르치고 그랬어요, 모두.

- 네.

- 그리고 그 때에 그 중등과 고등과 초등과 이렇게 있었는데. 고등과가 바로 한반 위인데 말하자면 거기에 오늘 다 유명해진 양주동.

- 양주동씨요?

- 네. 양주동 박사도 그 우리 한 반으로 있고, 또 시인으로 파인 김동향씨도 한 반으로 있었고.

- 네.

- 또 파인과 같이 납치되어간 역사가 민속적인 또 역사가로 유명한 그 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장으로 계셨던 선진태씨. 뭐 그러한 분들이 전부 우리 같은 반에 있었어요.

- 네, 훌륭한 분들이 많은가 봐요?

- 많아요.

- 연구 선생님 시에서요?

- 그만큼 뭐 우리야 대단하지 않았지만은 그만큼 그렇게 그 모두 밀려서 와서 공부를 한거지요.

- 네.

- 시설도.

- 가정형편도 어렵고 이런데도 불구한데도 와서 고학을 하면서 공부도 하고 뭐 여러가지 참 일도 많았어요.

-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뭐 시설이 불충분하다, 학생수가 많아서 공부 못 한다는 얘기가 성립이 안될거 같습니다.

- 네네, 성의지요, 열의지요.

- 네.

- 그게 참 중요한거지요.

- 학구열들이 대단했던 모양이지요?

- 네.

- 그러면 보성학교에 가셔서는 생활이 어떠하셨어요?

- 보성서도 그저 모두 이럭저럭 해서 고생을 했지만 더러 학비를 면제당하는 경우도 있고요.

- 네.

- 가령 무슨 성적이 좋으면은 수업료 면제, 또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은사에 황유돈 선생. 역사가. 그 이가 돌아가셨을 때 교장 정대현 선생이라고 있었는데, 그 두분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참 많이 후원을 해줬어요.

- 네.

- 네, 그래서 그럭저럭 하는중에 가정교사로 갔어요.

- 네.

- 가정교사로 가서 1년반 4학년이 되니까 5학년 이제 그 때에는 5학년까지인데요. 고등보통학교라고 그래서요.

- 네.

- 상급학교 시험준비를 해야되요.

- 그런데 가정교사 애가 셋인데 전부 국민학교 아이들인데 썩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그 시간을 다 뺏겨요 그 아이들한테.

- 네.

- 도저히 그래가지고는 상급학교에 갈거 같지를 않아요. 그래서 마침 일본에 내 종향된 한 분이 거기가서 물리학교에 계시고 다니고 계셨는데, 그래도 하여간 그 때에는 또 동경에 고학하러 가는 사람 굉장히 많은 시절이에요.

- 네.

- 뭐 어떻게든 살지 않겠느냐. 대개 그때에 신문배달을 하거나 이런거를 지내고 지냈을텐데, 그래서 아주 단을 내려가지고 여비를 마련해가지고 4학년 수여하고 그리고 일본으로 갔지요.

- 네.

- 네.

- 하하, 어려운 일본에.

- 네.

- 유학길이셨군요?

- 고학을 할 각오를 뭐 하고 다른 사람 다 하고 가는거지만은.

- 네.

- 그런 각오없이 일본에 갔지요.

- 그러니까 서울와서 공부하신 동안에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하고에 사이는 어떠셨어요?

- 뭐 사이야 무슨 좋고 나쁠 것도 없고,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건 함경도 저 멀리서 온 사람.

- 네.

- 우리수로 하면은 한 1700리 가량 되지 않을까 그러는데 내 고향이. 꼭 한번 왕복하는데 열흘 걸려요.

- 아후, 네, 상당히 먼 길이로군요.

- 네, 기차타고 문산가면 문산에서 배 타고 가는데 그 국도리 배라고해서 조그마한 배를 타요, 그러면은 항구마당 걸리는데 그 닷세가량 걸려요.

- 네.

- 나흘아니면 닷세 걸리거든요.

- 그러니까 꼭 여름방학 외에는 갈수가 없어요 1년에 한번, 네. 요새는 뭐 추석, 명절만 되도 갈수 있는 그런데 뭐 우리는 뭐 정말 유학이지요.

- 하하.

- 부모슬하를 떠나서 완전히 뭐 1년에 한번정도 들어간다.

- 지금은 뭐 교통이 발달되었으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면은 서울에 떠나가실 때에도 처음에 부모님의 반대를 받으셨는데.

- 흠흠.

- 이 동경유학 가실때에도 걱정하시 않으셨어요?

- 그 때에는 뭐 거의 집에서 의견을 물을세가 없지요.

- 네.

- 물어봐야 뭐 해결할 길은 없으니까요. 충분히 무슨 학비문제, 또 그때 일본갈려면은 적잖은 여비가 드는데, 배타고 기차타고 가는데 그런거 뭐 해결할 길도 없고 하니까, 주로 일본에 있는 그 형님하고 나하고 여기 서울에서 후원해주시는 선생님하고 가정교사로 있었으니까 그 집은 부자이니까, 그런 집에 여기저기 도움을 받아서 일본으로 간거지요.

- 네.

- 더군다나 또 독자이시니까요.

- 흠흠.

- 그 먼 타향으로 떠나시면은 걱정들도 많으셨겠는데요, 그 유학가실 때에는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 네, 뭐 긴 얘기를 다할수 없는데 중간에 2년정도는 쉬었어요.

- 네.

- 네. 처음 보성에 3학년 들어가지고 그 해 12월에 그 장티푸스라고 요새 그래서겠지요, 그 때에 장티푸스라고 하는거.

- 네.

- 몸이 좀 약했었어요. 그래서 그 회복을 하는데 상당히 오래 걸려서 1년 반을 쉬었어요, 내가.

- 음.

-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 왔으니까 보성중학교 때에는 나보다는 1년 아랫반 사람들이 내가 오니까, 1년 6반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 네, 그렇겠군요.

- 네, 그 1년 6반 그러니까 그게 진짜 처음 3학년같은 사람들 중에는 지금 이제 공군에 가 있다가 그만둔 소장인가 하는 곽근원이라고 하는 그런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동기가 되어서 2년 내 아랫반 사람들하고 같이 다녔는데, 그 사람중에는 그 좌익으로 유명한 임화라고 하는 사람도.

- 네.

- 그 반에 있었고.

- 또 이상희라고 소설쓰는 이상희도 그 반에 있었고.

- 네.

- 그 사람들하고 한 반에 있었어요.

- 네. 동경가실때에는 혼자 떠나셨어요?

- 네, 동향 사람이 둘인가 같이 갔었어요.

- 네.

- 그 사람은 고학은 아니고 일본으로 후임을 마치고 간 사람이니까요.

- 그 때에는 연락선을 타셨겠지요?

- 그렇지요, 네 부산가서 연락선을 타고 그러고 가는거지요. 지금은 뭐 미국가는거 같은 심정이지요, 하하.

- 그때에 그런 심정이셨어요? 하하. 네.

(음악)

- 그러니까 이 선생님께서 연락선에 몸을 싣고 현해탄을 건너 처음이시겠지요? 외국땅에 발을 디딛는것이.

- 네네.

- 그러니까 그렇게 시작된 동경생활이 거진 6년 3개월 동안 보내셨지요?

- 네, 그러니까 3월달에 가서 1925년 3월에 갔는데, 그래가지고 1931년 6월에 나왔으니까.

- 네.

- 네, 졸업을 31년에 하고 석달가량 더 동경에 남아있다가 이제 나왔어요.

- 네.

- 처음에 가셔서는 어떻게 해서 자리를 잡으셨어요?

- 거기 아까도 얘기했지만요, 그 일본에 간 내 사촌형님이 계세요.

- 네. 조형근

- 조형근이라는 분이 교육계에 아주 수십년 계속 표창도 받고 하는 분이 계세요.

- 네.

- 그분이 참 친동생같이 이렇게 해서 늘 이제 도와주시고 또 같이 가서 있으니까 그 이가 전부 1년동안은 봐주시니까, 1년 일곱반을 졸업하고 나오셨으니까요.

- 네.

- 그러면서 그 형님과 같이 식당에도 다니고, 자취도 하고, 그러니까 여름방학에는 또 이제 조금 고학을 했어요. 여름방학에도 하고 고학을 틈틈히 하는데

그때에는 여름에 빵장사를 했어요.

- 네.

- 네.

- 무슨 빵이었나요?

- 그 찐빵인데요.

- 네.

- 여기 만두, 서울서는 칼빵만두라고 그래서 판게 있습니다.

- 네.

- 칼빵만두라고 하는것은 서울에 그 화학생들이 칼빵틀에서 만들어가지고 만든 칼빵만두. 그 비슷한거에요. 그래서 그거를 하루에 한 100개쯤 팔면은 아마 한 2원가량 벌어졌을까요?

- 네.

- 1원 50전. 지금 돈 2원이 아니지요, 지금 돈 아마 200원부터 되겠네요.

- 네.

- 네, 더 되겠지요. 그렇게 하는데 그게 잘 100개 팔기가 어려워요. 또 이 변두리 된것도 팔아야 하니까요. 지역도 넓고, 또 역시 변두리는 가난하니까 가난한데 아니면 그런거 잘 안사줘요, 아이들이.

- 네.

- 아이들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한국 사람들은 엿장사를 많이 했습니다.

- 네.

- 인삼엿이라고. 그거는 잘 팔면 괜찮은데 수익은 수입은 많아요. 그런데 참 팔기가 어려워요. 가서 그거는 조금 넉넉한 집에 가서 그래서 그 집 그 부인이라던지 하여간 주인을 납득시켜서 사야 해야하니까.

- 아하, 네.

- 그런 사람중에는 또 나쁜 사람들도 들어있고해서, 한국사람 조센징이라고 해서 그렇게 좀 차별대우 한 사람들도 있고.

- 네.

- 그런데 벌써 고학생이라고 그러면은 대한민국 경멸하는 대하는 태도로 대하고, 경멸하거든요.

- 음.

- 네, 그거를 이제 인상좋게 잘 얘기를 해서 납득을 시켜서 파느냐고 참 힘들어요.

- 네.

- 네, 그런것도 하면서 지냈지요.

- 네. 그러니까 그 때에는 그 유학생 중에서 고학을 하시는 분이 많았겠지요?

- 네, 아마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거에요.

- 네.

- 그때에 한달 생활비가 어느정도 되었었는데요?

- 아, 그 때 돈으로 아마 적어도 최저로 25원내지 30원 지금돈으로 아마 얼마나 될까요? 한, 만원일까?

- 네.

- 네, 만원일까? 그 정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었을거에요, 만원 더 들었을지도 모르겠군요.

- 내일 계속해서 동경시절 얘기 좀 들려주십시오.

- 네.

- 감사합니다.

(음악)

지금까지 전 이화여자 대학교 물리대학장이신 이한구씨를 모시고 보내드렸습니다. 아나운서 최춘자였습니다. 0시에 만난 사람을 마칩니다.

(음악)

(입력일 : 20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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