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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0시에 만난 사람
시인 이은상 - ‘가고파’에 관한 이야기
시인 이은상
‘가고파’에 관한 이야기
1966.10.14 방송
(음악)

0시에 만난 사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는 이 시간에 시인 노산 이은상씨를 모시고 보내드리겠습니다.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네.

- 요즘 바쁘신 시간을 보내시는거 같은데요.

- 네.

-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셨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들을 이야기가 뭐 있나요?

- 아하. 선생님은 대구에도 가끔 내려가시고요.

- 네.

- 서울에도 오시고 하시는데.

- 대구에는 한 2주일에 한번. 청구대학에 강의가 있어서. 2주일에 한번씩 내려가는 정도에요.

- 그래서 아마 연락드리기가 힘든가봐요.

- 헤헤.

- 대구에도 내려가셨다 서울에도 계시고.

- 네.

- 이제부터 앞으로 여러 회에 걸쳐서 선생님 모시고 시인으로서의 일생이라고 할까요? 선생님의 좋은 시를 들어가면서 그 시에 얽힌 여러가지 일을 오늘 누벼가겠는데요. 선생님은 그 우선 저희들이 이은상 선생님하면은요, 가고파를 먼저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데요.

- 네, 그렇지요.

- 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이세요?

- 네, 마산이에요.

- 고향이 마산이시고요?

- 네, 고향이 마산이에요.

- 네. 그러면 선생님의 가계라고 할까요? 뭐, 집안 내력이라고 할까요? 뭐 여라가지고 듣고싶은데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 내가 낳기는 마산에서 낳는데 원래 우리 집은 서울이에요.

- 네.

- 그전 얘기식으로 말하면은 전주 이씨 문중이고, 건영군 파에 속하는데 그러니까 전주 이씨 문중이 되기 때문에 자연히 옛날에는 그 역시 남다른 위치에 있다고 이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 네.

- 지금 내 아버지가 살아계신다고 하면은 금년에 107살이 되는데, 그러니까 지금서 100년전에 낳셨거든요. 그런데 대원군 당시에 그 천주교도 학살한 일이 있었거든요.

- 아.

- 그 대원군이 천주교도 학살하던 때가 내 아버지 7살때였습니다.

- 네.

- 그런데 그 우리 할머니가 문중에서 다른 사람 다 믿지않는 천주교를 믿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천주교를 믿어가지고서 전주 이씨 문중에서 파문을 당했어요. 그러는 즉, 말하면은 문중에 없는 일로 서학을 한다고 서양학문.

- 음.

- 말하면은 그때 천주교를 서학이라고 했으니까, 그 서학을 한다고 해서 내쫓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린 아버지를 거느리고 할머니가 자연히 갈 데가 없으니까 서울서 일가 친척집을 돌아다니다가 다 받지 아니하니까 충청도를 내려갔다고.

- 네.

- 충청도에서도 역시 문중에서 소문이 나기 되니까 받지 않았고, 그래서 경상북도 문경에 갔더라고요. 문경가지고서 지금도 전주 이씨 가계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거기서 얼마쯤 지나다가 거기서도 서울 소식을 듣고서는 또 내쫓았던 모양이에요. 하니깐은 갈데가 없어서 부산으로 경상남도 동래, 부산으로 내려갔던 모양입니다. 그래가지고서 어느 결에 젊은 청년이 되게 되니까 아버지가 자수성가로 자신이 스스로 집을 이루어야겠다 하는 결심을 품고 여러군데로 돌아다니면서 의학을 공부를 했더라고 합니다.

- 네.

- 의학을 공부를 해자기고서 그야말로 옛날말로 한의이지요. 이렇게 큰 의사가 되어서 아주 의술이 용하고, 그렇다고 해가지고서 경향각처에서 많이들 몰아드리고.

- 아, 명의를 찾으러?

- 네. 그래가지고서 자기 공부하는 동안에도 충청도에 어떤 명의가 있다고 해서 가보면은 자기만 못하다는거에요.

- 아하.

- 또, 서울에서도 역시 또 잠입을 해가지고서 서울에 명의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물어보면은 여러가지 문답을 해보면 자기보다도 못하더라는거에요. 그래서 그만큼 자신을 얻어가지고서 개업을 했는데, 개업을 하자 또 운이 좋았던지 많이들 병자가 찾아오고 해가지고서 참 불과 얼마 안되는 시일안에 자수성가를 했어요. 그래서 수천석을 참 벌어들인 모양이지요.

- 네.

- 했는데 그 때 나이 40이 넘었단 말이지요. 넘었는데 그 자기 생각에 인생 40이 한방인데 그거를 보면은 역시 내 선친이 망부석이지만은. 대단히 본받을만한 점이 참 있었던 어른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전반 생을 돈을 벌고 고생을 했으니, 후방 생은 돈을 써야겠다. 쓰고 가야지 이거 돈 벌러 세상 낳은것은 아니니까 돈을 어떻게 써야 하겠느냐? 하는것을 생각한 나머지에 나라는 점점 기울어져 가고 하니까 그야말로 합병당한건 아니지요? 아직도 아니지요?

- 네.

- 아니지만은 점점 한국말엽이 되어오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돈쓸 곳을 마련한다고 해가지고 마산에 한 곳을 찾았어요. 그때 마산은 지금은 참 굉장한 마산이지만은 집도 별로이 없고, 아주 허허 벌판 들판 밖에 안되었던데 그 들판에다가 새 개척지를 만드느라고 빈 들판을 찾아갔던거지요.

- 아하.

- 그래서 빈 들판을 찾아가서 마산에 오늘에 개항이라고 하는것은 마산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입니다만은 우리 집안에서 마산을 개항을 전망 했고.

- 네.

- 기차도 다니지도 않고, 전기도 없을때 전기도 끌고 기차도 끌고 전부 해가지고 했는데 내가 부산서 베어가지고서 마산에다가 가서 낳았거든요.

- 그러니까 그때 배로 부산에서 어머님이 배를 타고 배에서 아기를 베어가지고서 대단히 고생을 하시면서 마산에 가서 낳았다고 하니까 내가 지금 나이 예순넷이니까 64년이 되었습니다.

- 아하.

- 벌써 태어난지가.

- 네.

- 그래서 고향이 되었지요.

- 네.

(음악)

- 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아련한 향수라고 할까요?

- 헤헤.

- 지금 가고파라는 곡을 들었는데요 이, 가고파는 곡은 언제 지으셨어요?

- 가고파라는 곡은 물론 마산을 그리워서 한건데 나중에 마산으로 언제 떠냤느냐고 하면은 이 얘기를 다음 날 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은. 내가 이 가고파를 지은것은 서른살때.

- 네.

- 그러니까 마산을 떠나서 벌써 십여년이 된 후에 서울에 앉아서 서른살 되던 때에 가고파를 지었던 것입니다.

- 네. 그런데 그 마산에 모두 식구들이 가셨다는 얘기 하셨는데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 네, 마산에 간것은 아까 말씀대로 아버지가 자기 사업할 곳을 개척할 곳을 찾았다. 그래서 가셨기 때문에 거기 가셔서 비로서, 처음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신학문, 신사상을 받아들였던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마산에 처음 세운 이가 아버지이고.

- 네.

- 또, 학교라고 하는것을 처음 세운 이가 아버지이고. 그래서 내년이 60주년 기념일이에요. 창신학교라고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경남에서는 대표적인 학교입니다. 그 남학교와 그 여학교와 학교를 2개씩에 짓고 교회를 짓고 해가지고서 이제 아버지가 말미 말하자면은. 교육사업과 종교사업을 시작을 했던 것이 아버지의 마산 그 개척에 첫 페이지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을 불러들여야 되었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털어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해가지고서 이웃 촌락에 있는 만 하만이고, 일행이고, 여러 고을에 있는 그 이민들 무료로 집게 가지고 와서 살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이제 불러들여서 마산에다가 이민을 시키게 시작을 했던거 그런 사업을 많이 했었지요.

- 네.

- 그러면은 아버님의 공이 정말 마산시민으로서는요.

- 네, 그래서.

- 크다고 할수가 있겠는데요?

- 나중에 돌아가셨을때에도 역시 마산에서도 전체 사회장 단체장을 지내드리고 그저 그렇게 했었지요.

- 네.

- 선생님의 형제는 많으셨어요?

- 예. 지금 형제는 본시 다섯이 있었는데 사내 다섯이 있었는데, 내가 맏이고 또 내가 밑에 아우는 지금 무역회사를 하고 있는 아우가 하나 있고 그 다음 밑에 아우는 지금 연세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있는 그 길성이라고 하는 그 사람이 내 그 다음 그 다음 아우이고.

- 네.

- 그 다음 밑에 아우가 정상이라고 있었는데 스무살에 왜놈한테 독립운동 학생독립운동혐의로서 용산경찰서에서 갇혀가지고서 매맞아서 그거로 죽었기 때문에 내가 그때 무상이라고 하는걸 써서.

- 아하.

- 그 배제학교에 내가 무상판권을 넘겨 가지고서, 지금도 무상 그거 판권 그거 수입을 해가지고서 정상장악회라고 하는걸 해가지고서 지금도 학생을 양성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 네.

- 학교에서.

- 네.

-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아우는 실업가로 있는 아우가 하나 있고, 지금 형제로는 4형제가 남아있습니다.

- 결국은 아버님께서는 다복해 하셨겠어요?

- 헤헤.

- 믿음직한 아우님들을 두시고요, 그런데 선생님 마산에 계시면서 마산에서도 유명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지요? 선생님 제자분도 되시는.

- 네, 그렇습니다. 마산에서 지금 중앙문단에 나와서 활약한다고 할까? 중앙문단에 널리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분은 김용호군, 또 이원수군 그 두사람이라고 하겠는데.

- 네.

- 김용호 시인, 이원수는 동요 작가인데.

- 네.

- 그 두 사람은 그 다음으로 내 후배이고, 내게서 배우고 했습니다만은 지금 와서는 다 당당한 위치에 있고, 다 실력이 있어서 얼마나 좋게 발전했는지 참 우러 볼만한 그런 인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 네.

(음악)

- 그런데 선생님 이노산이라는 호가요.

- 네.

- 그 마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

- 네. 그 노산은 지금 구마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마산을 들여다 보고 역 근처에 있는 바른 편손에 있는 그 산이에요 언덕이에요.

- 네.

- 그런데 지금 그 집들을 많이 지었습니다만은. 그 전에는 좀 좋은 동산으로 숲도 많고, 새소리도 좀 나고 하던 그런 좋은 동산이었는데 바로 그 산 이름이 노비산이에요. 날비자 그런데 날비자를 떼내버리고 그냥 백로라는 노자하고 뫼 산자하고 그 노산이라는 산 이름을 가져다가 내 호를 삼았는데 바로 내가 그 산밑에서 자랐고 또 그 산에서 시상을 길렀고.

- 네.

- 또 그 산속에서 밤낮 돌아다녔고, 그랬기 때문에 정든 산이기 때문에 내가 노산이라고 하는 호를 역시 노산 그 호 자체가 벌써 고향을 그리운 그런 사람으로서 나타나셨지요.

- 네.

- 정말 마산을 자랑하실만하고 마산에 푹 젖으신 선생님이신데요.

- 네.

- 선생님의 시조선집 노산시조선집 이라고요.

- 네.

- 그 안에도 선생님의 주옥같은 시들도 많이 실려있던데.

- 네.

- 그 먼저 가고파라고 하는 시 좀 전에 소개해주셨지요?

- 네. 그런데 가고파는 서른살때 내가 지었던건데.

- 네.

- 그건 8절인지 아마 많습니다, 길어요.

- 네.

- 긴데 그 첫절만은 한번 읽어보려고 하면은.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나르리 가고파라 가고파

그렇게 하고 읽어졌던 것이지요.

- 네.

- 그런데 여기 이 시조에 그 가고파라 가고파라고 하는 이런 말이 본체 우리말에 없는건 아니지요. 아니지만은 이런 시 용어를 썼기 때문에 그 가고파라고 하는 마침 내 말을 아주 독점한 말처럼 되어서.

- 아하, 네.

- 지금은 찻집에도 가고파, 차방 많습니다만은.

- 하하.

- 그만큼 새로운 말을 만들어 봤던 그런데에서도 하나의 기록이라고 할수 있겠고요.

- 네.

- 그밖에도 선생님.

- 네.

- 고향을 두고 지은 시들이 많은걸로 알고 있는데요?

- 그 밖에 저 무엇보다도 전에 이런것이 있었어요. 여기 내 동아일보에 참 그 뒷 얘기입니다만은 이상범씨 창전 선생하고, 주요섭씨 그 두 분이 다 같이 동아일보에 있을 때인데.

- 네.

- 그 두분이 어느 여름에 그것이 때는 내가 31살될때입니다. 여기 내가 동아일보에 있을때가 그런데 가고파 진 다음에 해지. 그 때에 마산 근처 또 통영이라고 하는 곳으로 충무시. 그리로 이제 여름에 피서를 간다고 하는 휴가를 맡아가지고 가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정거장에 나갔다가 정거장에서 그냥 붓을 들고 거기서 참 내가 즉흥으로 시를 몇 수 써가지고서 그 주요섭씨하고 이창전 선생하고 두분에게 줘서.

- 떠나는 길에요?

- 가져가서 읽으라고.

- 네.

- 가져가 읽으라고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런데 거기서도 나는 이 마산을 자랑하고 싶어서 합포역 내리시는 노비산이 거기입니다. 내 가슴 못 마져오나 날 본듯이 여기요.

- 하하, 네.

- 그것이 곧 노비산이 내 노산이니까.

- 그렇지요, 네.

- 나는 안가도 그 산이 널 맞을거다. 삼랑천이라는 이름이 냇물인데 그 냇가에는 우리집이 있었거든요.

- 네.

- 삼랑천 둑을 끼고 길게 난 새 한길은 내 살든 옛집 터라오 부디 밟아보시오 그렇게 하고 또 이제 시를 써준것도 있었고, 또 옛 주인 친구신줄 노방초야 아냐만은 그 길은 뿜내고 걸읍시요 타향한이옵니다.

- 아하.

- 만일 친구에 고향이니까 내고향처럼. 타향 뻐기고 한번 다녀봐라.

- 네.

- 이렇게 까지 하면서 고향가는 사람들에게 고향을 소개하려고 하던 그 심경, 그것이 31살때에 심경이었고.

- 네.

- 또 그 다음해에는 참 수십년 못가보고 있다가, 내가 48살될 때 이제 해방하고 난 뒤에 한 5년 더 있고 해방 1945년때인데.

- 네.

- 1950년대 이니까 48살때에 내가 그 고향에 한번 갔다가 오면서 고향가서 내가 스스로 자랑삼아 한 시가 있었어요. 옛날 어릴때 도깨비 나는 골목이라고 잘 안가던 골목이 있었거든.

- 무서워 하는 골목? 네.

- 그럼. 그런 참 동심을 일으켜서.

거리로 내려서니 새로 난 큰 길이 서툴구려.

긴 길 접어들어 좁은 뒷길로 가고뿐인데.

어려서 도깨비 난다고 하는 그 무서워한다고 하는 그 골목길 찾아.

가방을 손에 들고 나그네로 왔건만은.

여보들 얕보지를 마요 내야 바로 예서 나 자라고.

피 속에 뼈 마디 속속 이상 정전기가 베었다오.

- 네.

- 하고 마산 정기를 내가 차지했다고.

- 아하.

- 아주 프라이보이를 한번 해보는셈이지요.

- 네.

- 그런 노래를 읽었습니다.

- 어렸을때에는 그 도깨비골목 이라고 하고 피했는데 이제는 그리워 졌나보지요? 선생님. 그 길로 접어들어서.

- 네.

- 일부로 찾는다는 시.

- 그렇습니다.

- 참 잘들었습니다.

(음악)

- 그런데 선생님은 마산에는 요즘 자주 가시는 편이신가요?

- 못가요, 지금은 아버지 무덤이, 산소가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자주 가야될텐데 이따금 밖에는 못갑니다.

- 네.

-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미안 죄송한 일을 많이 치뤘지요. 하지만 자주 가게 됩니까? 어디 바빠서 그리 못가게 되었는데.

- 이선생님만큼 마산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들도 드물겠지만요. 처음에는 그렇게 발전하지 못한 곳이 지금은 너무나 많이 발전이 되서.

- 네, 굉장히 발전되었지요.

- 감회가 깊으시겠어요?

- 네, 마산은 지금 상당한 발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요새 참 이 얘기 끝입니다만은. 그 경남도청을 그리로 옮긴다는. 또 마산항도제 그러는걸

대마산 항도제라고.

- 하하.

- 하는것이 대마찌 났다 보지요.

- 네.

- 학교와 모든 곳이 굉장히 번창해져서 뭐 옛날에 마산하고는 전혀 다를 정도로 발전했지요, 발전했는데 이 도청이전 문제같은 것도 가령 진주에서는 진주로 이전해야된다. 마산에서는 마산으로 이전을 해야된다. 나는 또 생각할적에 뭐 아무데 라도 좋지요. 옛날에 청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활을 청나라 사람이 얻었다고.

- 흐흐.

- 밤낮 내 나라에 있는거니까 마산이 발전해도 좋고, 진주가 발전해도 좋고 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는거니까 조그럽게 편협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공정한 안목으로 본다고 해도 역시 바다를 끼고있다, 또 육지를 끼고 있다. 또 그 한 도의 중심지이다 이런식으로 참는다면 마산이 좀 더 낫지 않을까? 이것은 고향인식이라고 하는것 보다도 아무래도 그게 더 좋은 유리한 조건이 공정하게 본다면 그게 낫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만은. 진주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고적지는 되지요.

- 네.

- 옛날 도호부가 있었고.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를 본다면 옛날에는 바닷가를 그렇게 좋게 치지 않았습니다. 말하면 해우창생이라고 해서 그래서 바닷가에는 쌍놈들이 사는데처럼.

- 흐흐.

- 그렇기 되었기 때문에 옛 관례이고, 지금은 오히려 현대 의식으로는 바다를 찾아야겠지요.

- 네.

- 교통관계, 물가관계, 산물관계 이런것이 그렇기 떄문에 옛 관습으로 본다면은 역시 속으로 찾아들어가는게 좋을거고, 새로운 현대미로 본다면 역시 항만을 찾아가는 것이 발전상 더 좋을 것이라고도 생각이 됩니다만은 옛 그만큼은 그 얘기는 옛 문제이고, 어쨌든 이제 마산은 아름다운 도시. 공기좋고, 물 좋고 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는 사람은 역시 문학적인 소질을.

- 흠흠.

- 타고 날수 있지않나.

- 네.

- 그런 생각을 가질수 있습니다.

- 네.

- 그래서 밖에 김용호군, 이원수군 두 사람 말도 했습니다만은 앞으로도 지금도 현재 내가 젊은이들 이름을 잘 몰라서 잘 소개를 못하는것이 민망합니다만은 많은 사람들이 배출되어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잘 나오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 네, 누구나 차이가 나는 것은 좋지만은 이 마산처럼 많은 얘기 해주셨는데.

- 헤헤.

- 정말 좋은 곳인가 봅니다.

- 정말 좋습니다.

- 감사합니다.

- 네.

(음악)

0시에 만난 사람. 오늘은 노산 이은상씨를 모시고 보내드렸습니다. 대담에 최춘자 였습니다. 여러분 내일 이 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입력일 :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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