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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에 만난 사람
이하윤(서울대 사범대학교수) - 학창 시절 얘기
이하윤(서울대 사범대학교수)
학창 시절 얘기
1966.09.23 방송
(음악)

0시에 만난 사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별빛도 짙어진 9월의 밤빛도 모두모두 사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밤 당신의 고요한 창가에 화려한 꿈을 수놓아 주는 0시에 모신분 오늘부터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이하윤씨를 모시고, 여러가지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 이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십니까.

-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 오래간만 입니다.

- 전에 0시에 처음에 한 번 나오셨고요. 오래간만에 다시 뵙는거 같은데요.

- 예. 아마 한 번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 네. 요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동안 격조했었는데요.

- 요새. 뭐 그냥 집에서 책 읽고, 학교에 가고 원고 쓰고 그러죠.

- 네.

- 네.

- 강의 준비도 바쁘시겠고요.

- 네.

- 요즘 학생들은 아마 공부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겠죠?

- 그렇습니다. 요새 공부 잘 합니다.

- 그런데 선생님께서 기억력은 아주 대단하시다고 제가 들었는데요.

- 지금은 나이들어서 그렇지도 않아요.

- 하하하.

- 다 잊어 버렸어요.

- 전에는 기억력이 무척 좋으셨나봐요?

- 그 전에는 기억력이 아마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글 같은거 암기하는데도 상당히 빨리.

- 네.

-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했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연령이 뭐 그 문제가 연령에 있더군요. 나이 먹으니까 역시 기억력이 좋지 않아요.

- 하하. 그래도 선생님의 같은 연세에 비하면은 아주 좋으신거 같아요.

- 글쎄, 남들은 그렇다고 그러지만, 난 글쎄, 나도 또 그렇습니다. 늙었다는 생각은 도무지 없습니다. 지금도.

- 그렇죠. 네. 아직도 젊으신데요.

- 그렇습니다. 네.

- 선생님, 저의 신동아지에 실리는 문단과 교단에서.

- 네.

- 해외 문학파에서 비교문학까지 좋은 글 쭉 실려주고 계신데요.

- 그게 좋은게 아닙니다. 그저 기억력을 더듬어서요. 그저 생각나는대로 쓴거고, 조금 더 정리해서 쓰면은 아마 논문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좀 더 자세히 쓸거 같으면 자서전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은.

- 그렇죠.

- 그런 정도에서 우선 했습니다.

- 하하. 네. 그래서 그 글을 읽으면서도요. 선생님께서 정말 대단한 기억력 갖고 계시는구나. 또 한번 느꼈는데요. 이제 오늘부터 여러회에 걸쳐서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 글쎄. 모든지 물어보세요.

- 추억이든지.

- 네. 재미있는 걸로 물어보세요. 물어보시길 잘못 물어보시면요.

- 네.

- 대답이 싱겁게 나옵니다.

- 그럼 큰일 났습니다.

- 하하하. 청취자 여러분들의 마음을 제가 대신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요.

- 네.

- 그럼 우선 선생님의 학창 시절 얘기부터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네.

- 선생님은 서울서 공부하시다가 일본으로 가셨는데요.

- 그렇습니다.

- 서울서는?

- 서울서 그러니까는 우리가 중학교, 지금 중학교와는 다릅니다만은.

- 네.

- 3.1운동 때에 1학년에 입학했습니다.

- 네.

- 1919년에. 여기서 만 4년동안 경성종학보통학교, 그 다음에 제일고등보통학교라고 됐는데.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 네.

- 그 학교에 다니셨던 이야기.

- 네.

- 그 학교를 다니셨군요. 그 때는 학풍이라고 할까, 어땠습니까?

- 그 때는 3.1운동 직후가 되서요. 상당히 우리로서는 학생다운 분위기 속에 잠긴 것은 2학년 때부터입니다.

- 네.

- 1학년때는 뭐, 거의 선배들은 구속 검거돼 들어갔고, 또 학교에서도 감시가 대단했고, 그래서 또 정모, 정복도 입지 못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끔 학교에서 휴교처분도 우리들이 휴학동맹도 하고.

- 자진으로.

- 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1년동안은 학생다운 맛을 모르고 지냈어요. 그리고 또 같은 학급에도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이 많이 있어서.

- 그래요? 어느정도 차이가 있었어요?

- 말하자면 한 4~5세 차이가 있으니까. 그때, 또 그때는 우리나라 관습에 의해서 이미 기혼자가 많고요.

- 조혼때문이죠?

- 그렇죠. 애들이 있는 사람도 있고.

- 아. 하하하

- 그래서 그 키도 고르지 않고, 연령도 고르지 않고, 흔히 말하면 고등공민보통학교 비슷한 정도죠.

- 네. 결혼하신 분은 아버지가 되는 사람도 있었겠죠.

-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조사에도요. 처, 자 이런 것이 있습니다.

- 아. 하하.

- 아내가 있느냐, 없느냐. 자식은 몇 이냐. 이런걸 다 써 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우스운 얘기죠. 지금 생각하면.

- 그 때, 선생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 내가 그러니까 아주. 우리는 정년에 들어갔죠.

- 네.

- 정년이라는게 뭐냐하면 만 12세에 입학했죠. 우리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서요. 읍에서. 그래서 아주 일찍 공부를 했습니다. 머리 일찍 깎고, 머리 깎은 얘기 하면 지금은 우습습니다만 그 때는 결혼한 사람은 상투를 짰고요.

- 네.

- 결혼 안한 사람은 머리땋고 다닌 것이 시골 보통 학교, 지금은 국민학교죠. 공민학교 비슷한 건데.

지금 말하자면, 학생들 그런거 많았습니다.

- 네. 그러면 그 때에도 상투 튼 학생이 있었어요?

- 그러믄요. 들어오면 그 이튿날 깎는거죠.

- 아.

- 학교에 들어오면 그 이튿날 자르고 들어오니까, 상투 밑이 퍼렇게 됩니다.

- 아, 재밌게 되는 군요.

- 네. 하하하하.

- 그런데 그 머리를 깎는데 대해서 무서운 마음을 갖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겠는데요.

- 아, 무서워하고 말고요. 그 머리깎으면은 이거 유교사상에 젖어서요. 자기 몸과 이런거 다 부모께 받으거라고 해서 불효라고 해서요. 집에 들어가면 큰일난다고, 또 집에서 사실 꾸지람하는 부모님도 계시니까.

- 네.

-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또 학교에서는 말이죠. 가위를 들고서 몰래 운동장에서 뒤에서 싹둑 자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 네.

- 뭐 엉엉 울고 야단났죠, 그러면 잘라놨으니까, 할 수 없으니까 이발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자르죠.

- 하하하.

- 하하하. 선생님 고향은 어디세요?

- 난 강원도 이천입니다. 지금 여기서 서울서 가까운데, 가깝다고 하면서 지금 3.8 이북이고요. 39도선 거의 가까울텐데, 그것이 3.8 이북에 들어갔고, 그 휴전선이 되어 철원일부가 휴전선 이남에 들어오게 됐는데, 우리는 그대로 그 뒤에 있습니다.

- 네. 그러면 강원도 이천에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오셨겠군요?

- 그렇습니다.

- 서울에서는 어떻게 친척댁에 계셨어요?

- 하숙하고 있었습니다.

- 하숙생활이요?

- 네. 뭐 우리 고향에서 서울오려면요. 이틀걸립니다.

- 네.

- 불과 3~400리 밖에 안되는 곳이지만요. 기차를 경원선 평강읍 혹은 평강역이 복개역의 중앙선의 중간 인데, 거기까지 나오려면 100리를 나옵니다.

- 걸어서요?

- 걸어서 나오는데, 짐이 있으니까 말을 타고 나왔죠.

- 네. 그냥 말등에 타셨어요?

- 그렇죠. 말에 부담을 안주려고 거기서 안장을 하고 앉아서 하루종일 옵니다. 여름이나 하루종일이죠, 겨울에는요 새벽에 떠나서 밤 늦어야 도착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말이 말죽이라고 점심을 먹는데요.

- 네.

- 말죽거리라고 지금도 있죠, 동네에.

- 네.

- 말이 죽을 먹는 거리라고 말죽거리라고 그러는데, 거기서 두 시간가량 걸립니다. 말이 점심 먹는데. 사람은 30분이면 먹는데, 말은 두 시간을 점심시간을 소요합니다.

- 네.

- 그래서 시골에서 그 전에는 당나귀를 많이 타고 다니는게 그 까닭입니다. 당나귀는 자기가 자전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당나귀는 자기가 경마해서 타고다닐 수 있고요. 당나귀는 보리만 먹일거 같으면 간단히 점심을 먹일 수 있거든요.

- 네.

- 그래서 옛날에 시골에 촌으로 볼일 보러 다니는 분들은 나귀를 타고 다니시거든요.

- 네.

- 우리는 그런 나귀가지고는 안되니깐요. 짐을 또 가져가야 하고, 짐을 싣고 마루에 앉아서 하루, 백리가 꼭 하룻길입니다.

- 네.

- 걸어서도 하룻길이요. 백리가. 그러다가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 해서 6인승 자동차.

- 네.

- 버스 대용이죠. 말하자면. 그런것이 휘장 자동차라는 것이 있었어요. 여섯사람 타는 거. 그게 비로소 생겨서 그거를 그 때부터 이용하게 되었죠.

- 네.

- 그 전에는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 하하하. 교통기관이 덜 발달 되었었군요.

- 네.

(음악)

- 그런데 이 선생님께서 서울까지 공부하러 오셨던 그 말위에서의 고생스러움. 여러가지를 생각해보니깐요.

- 뭐 고생이 아니죠.

- 하하. 학구열에 대한 마음이 대단하셨고요. 또 선생님 댁에서도.

- 그렇습니다.

- 이해와 뒷받침이 아주 크신걸로 느껴지는데요.

- 뭐 그때에 이 은덕은 기독교의 은덕이라고 볼까요?

- 네.

- 역시 일찍 기독교가 들어와서 역시 그쪽에 열린 교육방법이 열리게 되죠. 미션스쿨이 생기니까.

- 네.

- 우리나라, 우리는 대부분의 우리 동료들은 개성으로 많이 공부하러 갔습니다. 한양서원이라는 것이 개성의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인데.

- 네.

- 지금 송도고등학교는 아마 여기 나와서 대전이나 저 남쪽으로 가 있는 줄로 압니다만, 거기에서 고학하는 사람들도 많이 도와줬고, 또 기독교 신자들은 거기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우리집은 독실한 신자집안이 되서 그래서 일찍 학교에 들여보냈고, 또 예배당에 다니면서 새로운 문화라고 그럴까요. 소위 기독신보도 그때 국문으로 나왔고, 성경, 찬미가가 다 국문으로 나왔고, 그래서 늘 내가 기독교 문화가 우리나라 문학예술에 끼친 공로도 상당히 크다고 보는데요.

- 그렇죠.

- 네. 그런데 우리집안은 소시주죠. 말하자면은 그런데, 할아버지 교회에 독실하게 다니셨고, 나는 또 승중에 독자에요.

- 네.

- 그러니까 나 하나의 학비는 넉넉히 댈수 있어서, 개성 사립학교에 보내지 아니하고, 서울이라는데가 첫째 중요했고, 또 서울에 오면은 말하자면 관립학교에 들여보낸다. 어떤 생각에서 그랬는지,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비교적 수재들이 많이 다닌다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게 된겁니다.

- 네.

- 그래서 졸업을 하고 나니까 만 12세가 되지 않아요. 그럼 머리 좋은 사람도 들어갔지만요.

- 네.

- 그래서 1년동안 서당에 다니면서 또 한문을 공부했습니다. 졸업하고 나서.

- 한문공부. 네.

- 물론 졸업하기 전에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한테 천자라던가 동몽선습이런건 배웠습니다만.

- 네.

- 그 이상은 더이상 배우지 못하고 있다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글방에서 한 1년동안 한문을 배웠습니다.

- 네. 그런데 독자시니까 집안의 귀여움도 대단하셨겠는데요?

- 뭐 그런편이죠. 네.

- 하하. 선생님의 성격은 그 때 어떠하셨어요? 어렸을 때의 성격.

- 뭐. 말하자면은 영어로 말하면 스라이 하죠.

- 수줍은.

- 뭐 티미트 하다고 그럴까. 좀 좋지 않게 말하면 티미트 하고, 아니면 스라이 한 편인데, 그것이 객지에 나와서 고생을 하고.

- 네.

- 또 혼자서 자발은 아니지만, 학자금을 받고 썼지만은. 혼자서 역시 서울에 와있고, 또 일본에 가서 일본에 동경에 가서 6년동안 있는 동안에 성격이 대단히 달라졌습니다.

- 네.

- 네. 용기가 나게 되고요. 지금은 오히려 라프한 편입니다.

- 하하하.

- 하하.

- 성격도 자꾸 세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요.

- 변합니다. 변해야 좋은데요.

- 네.

- 너무 또 변하면 좋지 않고요. 또 타고난 것이 좋지 않으면 변하는게 좋죠. 그런데 자기 성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요. 어떤 때는 아주 대단히 미워. 미운 생각이 들 때가 있죠.

- 네.

- 자기가 왜 내 성격이 그런가.

- 그렇죠.

- 그러나 또 어떨 때는 자기 성격이면서 또 참 괜찮다. 이런건 괜찮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됐나. 나와서 후천적인 것을 후회해본 적도 있죠.

- 하하. 그래서 자꾸자꾸 인격이 또 형성되어 가는게 아니겠어요?

- 글쎄요. 그런건지 모르겠지만은 이 샤인한 사람들이요. 프라이드가 좀 세어서요.

- 그렇죠.

- 그런 예술가들이 그런 사람이 많은데요. 자기 좋은 작품 쓰고, 남의 앞에 얼른 잘 내놓지 않고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연애를 잘 못합니다.

- 아.

- 하하하.

- 은근히 미리 말막음을 하려고 하시는데요.

- 아니에요.

- 네. 그런데 서울에 오셔서는 하숙생활을 선생님 하셨다고 말씀 하셨는데요.

- 광화문에 있었습니다.

- 대부분 하숙생활 하신 분들은 학창생활하면 즐거움을 하숙생활에서도 많이들 느끼셨다고 하시는데.

- 지금 생각하면 그리운 것이 많죠.

- 네.

- 그 때, 자기가 생활할 적에는 아주 무미건조한거죠.

- 독방에 계셨어요?

- 독방에 주로 많이 있었고, 또 함께 우리 외숙되는 분들이 먼저 와 있었기 때문에.

- 네.

- 함께 있어본 일도 있고. 그리고 독방에 있을 일도 있고, 대개 그렇습니다. 저는 남모를 학생과는 별로 있어본 일이 없습니다.

- 네. 하숙생활 생각하면 머릿속에 떠오르시는 재미난 일 같은거 없으셨어요? 친구들이 습격을 와서 곤란하셨다거나.

- 글쎄요. 그 때는 그런것도 없어요. 지금 그 때의 친구들이 놀면 다른 학생들과 다릅니다. 질이.

- 네.

- 아주 원시적이라고 할까요? 그 때는 돈 있으면 배고프면 설렁탕 먹고요. 또 돈이 조금 모자르면 호떡 사먹고, 그렇고. 그렇지 않으면 땅콩, 그 때는 깐게 없습니다. 중국사람만이 깐 땅콩을 설탕에 버무린거. 중국사람이 팔았지, 그 이외에는 한국사람들은 되로 까지 않은거.

- 네.

- 그런거나 사다먹고, 그저 그렇게 지냈죠. 그러니까 하숙에서 삼시 주는 거 그것만 먹고 있었지, 별로 이렇다할 요새말하는 우리의 오락이라던가 취미라는 걸 충분히 함양 못했죠.

- 네.

- 대개 운동같은거 테니스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거나 하고,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그거나 하고, 그런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에요.

- 네. 그 때는 호떡 얘기가 참 많이 나오던데요.

- 호떡집이 많고요. 호떡이 지금보다 맛이 있고요. 싸고.

- 음.

- 그러니까 그걸 자연 사먹게 되죠.

- 네. 중요한 간식도 될 수가 있겠네요.

- 그렇습니다.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호떡에도. 요새도 다 있지만은 그 때것만 아주 못해요. 맛이. 제조방식이 다른 모양이고, 전분이 달라진 모양입니다. 조금 고급화한 모양이에요. 요새는.

- 하하.

- 요새학생들 호떡 잘 먹습니까?

- 네. 호떡집에도 많이 가는 모양인가봐요.

- 호떡을 사다먹다가 그 때는 배가고파서 남았다가요. 책상서랍에 넣었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배고플때 먹으면 정말 진미입니다. 천하에.

- 네.

- 꿀맛이겠군요.

- 그렇습니다.

- 하하하.

(음악)

- 그런데, 선생님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걸 여쭤보는지 몰라도요.

- 예.

- 남자들 사이의 우정은 아주 대단하고요.

- 네.

- 흔히들 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 글쎄요.

- 남자들은 신의가 대단하고.

- 그렇지 않겠지만은 좌우간 보통학교, 지금 국민학교 때의 친구들. 또 중학 고등보통학교, 지금 중,고등학교지요?

- 네.

- 친구들.

- 네.

- 일생 잊을 수 없고, 서로 만나면 정말 자기 친척을 만나는 것보다도 더 자기 형제를 만나는 것보다도 더 반가운 이런 관계에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같이 한 반에 공부할 적에 서로 뜻이 맞아서 사귀었다던가, 아마 이런 친구들은 참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당시 나하고 같이 이렇게 같이 서울서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퍽 드물어요.

- 네.

- 중간에 전부 죽던가.

- 아.

- 그렇지 않으면 따로 떨어지게 된다던가.

- 더군다나 우리나라 같은 지금 실정에 있을거 같으면은 지금 아픈 가운데 갈려있고, 그런 관계상 뭐 그렇다고 해서 나의 친구가운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만은 여하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오래 산다는것도 사람도 어렵고 같은 곳에 살기는 어렵더군요, 외국에 가 있는 사람들도 있고. 생사불명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 네.

- 그래가지고 그 때에 한참 열네살, 다섯살, 여섯살때 만나서 뜻이 맞고 책상을 나란히 하고 같이 앉아서 공부할적에 생기는 우정 그것은 참 아주 가장 귀여운거 아닌가?

- 네.

- 이 사회에 나와서 또 대학에 올라가서 사귀는 사람들은요, 이해관계라는게 상반되요 어느정도까지. 그러나 요새 말하면 국민학교라던가, 중학교에서 생기는 그 우정은 이건 저절로 그냥 우러나서 생기는거니까 이해관계가 전혀없지요.

- 네.

- 그러니까 그 우정은 참 귀한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 정말 귀하지요? 네.

- 네. 내 친한 친구도 하나 있었는데 아주 퍽 친하게 지내던 사람인데 형제와 같이 그 사람이 지금 일본에 가 있다가 생사를 알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 네, 연락이 끊어졌어요?

- 그렇지요, 어떻게 되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 대개는 지금 아마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인데.

- 네.

- 정말 중간에 헤어지고 보면 남이 되고 많은거지만요. 그 외에 여기 몇분 남아있는 사람 가운데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그분들 역시 지금 같이 나보다도 오히려 한두살 더먹은 분들 있는데. 직업은 지금 다 다르지만 정말 전문학교나 대학때부터 전공을 달리했으니까 그때부터는 서로 길이 갈렸지만은. 그래도 그 때 한 마당에서 또 한 교실에서 배울적에 사귄 그 우정까지 대단히 귀하고 아름다운거라고 생각해서. 영원히 아마 피차 그럴겁니다. 저쪽에서도 잊을수 없는 그런 점이 있습니다.

- 네.

- 네.

- 지금까지 서로 교제하시고 만나시는 분은 안계신가요?

- 많이 있어요, 지금요.

- 네.

- 우리는 원래가 삼일운동때 입학을 했기 때문에요.

그 중간에 퇴학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 네.

- 중간에 퇴학을 맞은 사람도 있고 또 자진해서 물러난 사람도 있고. 물론 그때는 또 지금과도 달라서, 상당히 그 향열은 팽배했었지만은. 전부 농촌 위주로 학자가 조달되는거기 때문에, 농촌이 좀 핍회화가면은 결국 서울을 보내지 못하게 되지요.

- 네.

- 그러니까 할수 없이 부모네가 시골로 데려갑니다. 그러면 학교에 못 다니게되는 수가 많지요. 중도 휴학이 아니고 퇴학을 하는거지요.

- 아.

- 지금처럼 여러가지 방면에서 이제 우리가 사설하고 생활을 영위할수 있다면은 그 다음으로 있겠지만은. 그때는 전부 추수 일년에 뭐 몇백석이다 몇천석이다 몇만석이다 이것을 제 삯에 기증으로 삼고 있을때이니까요.

- 네.

- 네.

- 그렇겠지요.

- 그래서 불경기가 닥쳐오면요,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계속 못하게 됩니다.

- 아.

- 네.

- 그만두는 사람의 마음은 헤어날수가 없겠지요?

- 그렇지요, 헤어날수 없지요.

- 그러나 그때에 학생수요는 지금 대학생수보다도 더 적으니까요, 중학교 학생들이.

- 네.

- 여학교도 그렇고, 남자 중학교도 그렇습니다. 불과 다섯 여섯 손가락을 꼽는 학교에 한 학년이 백명내지 그저 많아야 이백명.

- 네.

- 그런 정도니 뭐 불문가지 아닙니까?

- 아, 그렇겠지요?

- 네.

- 그러니까 아마 서로 남학생 여학생 사이에도 낯이 많이 익겠수도 있겠지요?

- 길에서 만나면은요.

- 네.

- 알수 있습니다. 인사는 안하지만요.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면. 저 편에서 이제 반대방향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하고 매일 똑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되지 않겠어요?

- 네.

- 대개는 그때에 걸어다니는 일이 많습니다. 이 전차밖에 없었었니까.

- 네.

- 그때는.

- 교통기관이요?

- 그럼요, 전차로 다니는데 뭐 몇사람이나 전차로 다니지 그렇지 않으면 전차를 보통 안 탑니다. 서울시내에서 말이지요. 전차안타고 걷더라도 30분일거 같으면은 어디든지 다 학교에 나갈수 있는 그런 서울에 판도가.

- 좁았겠지요?

- 그렇게 밖에 안되지요.

- 네.

- 그러니까 매일 그 만나는 그 학교 남학생도 만나지만 여학생도 만나는데. 여학생은 좀 인상이 깊으니까.

- 아하하.

- 거기 어디에 나가면은 그 여학생이 올거다 오늘 안오면은 섭섭하고 그랬지요.

- 네.

- 그 때에는 남여규제가 물론 어려웠겠지요?

- 어렵습니다,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되어서 하숙에요.

- 네.

- 같이 있게된다던가, 부득이 알게되는 그런 정도이지만. 여학생들은 대개 기숙사에 많이 들어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친척집에 가 있기 때문에 그런 예도 드물고, 또 친척관계로서 서로 교제하는 수도 있지요.

- 자기가 친척이 있는 친척하고 같이 있는 여학생이 있으면 말이지요.

- 네.

- 그래 이제 자연히 알게 되지요. 기숙사에서도 알게되고, 사설학원 영향 집에서도 알게되고. 그래서 혹 그런데서 이제 교제가 이뤄질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은 조금 이제 그 때는 탈선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는데. 그러는 사람들 더러 있었겠지요, 연애를.

- 아하하.

- 한더던가, 그러나 서울장에서 만일 여학생하고 한번 종로라도 걸어가면요. 그 이튿날 학교에 가면은 소문이 다 납니다.

- 아.

- 나는 내 친척 누이 되는 아랫벌 누이 동생되는 사람이 하나 있었고, 또 우리 저 고모벌 되는 분이 한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걸어가도 그 이튿날 학교에 가면은 다 압니다. 여학생하고 걸어다녔다 대단히 흥미있어 하지요.

- 네.

- 네, 그때 그래서 일례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재미있는거를. 그 경성고등보통학교는 좀 높은 언덕에 있었습니다. 지금 경기고등학교가요. 그리고 그 아래가 이제 동아일보사 여기 옮겨 오기 전에.

- 네.

- 사옥이 있었지요? 네, 사옥이 있었는데 사옥이 구옥입니다.

- 네.

- 그 근처에 이제 원동이라고 하는데 원서동입니다. 그 화동인데 원서동에 그 원동자켓이라고 유명한 여자가 있었어요.

- 네.

- 이건 뭐냐면은 그 자켓을 입고 다닙니다.

- 네.

- 그건 스웨터이지요, 자켓을 입는데 여자가 자켓입는 사람이 서울에도 하나 둘 밖에 없어요.

- 아, 손 꼽을 정도이군요?

- 네, 그러니까 원동에 사는 여자였는데 쟈켓을 입었는데 원동자켓이 왜 유명하냐면은. 바이올린을 들고 다녔습니다.

- 아.

- 또 바이올린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드뭅니다. 바이올린 그 일선에는 그 바이올린이 그냥 케이스만 있다고 그런말도 있는데.

- 아.

- 그건 둘째가라서 모르겠습니다만은.

- 시간이 다된거 같은데요, 내일 이시간에 그 얘기 계속해서.

- 네, 그럴께요.

- 들려주십시오.

- 네.

- 궁금한 얘기인데요, 감사합니다.

(음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이하윤씨를 모시고 보내드린 0시에 만난 사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아나운서 최춘자였습니다.

(입력일 : 200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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