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에 만난 사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밤이 자꾸 깊어 갑니다. 여러분을 사색과 낭만의 세계로 안내하는 이 시간 0시에 만난 사람은 오늘부터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 중앙회 회장이신 팔봉 김기진씨를 모시고 여러가지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 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예, 안녕하십니까.
- 이렇게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김기진 선생님하고 소개 말씀 드리니까 아마 청취자 여러분에게는 그리 익숙치 않을거에요.
- 그럴까요?
- 팔봉 선생님이 더 귀에 익숙할텐데요.
- 네. 아마 그런가봐요.
- 네. 선생님의 호가 팔봉이신데, 김팔봉 선생님이 더 아마 정답게 더 익숙하게 들릴꺼 같은데요.
- 네.
- 선생님의 이 팔봉이라는 호, 언제부터 가지셨어요?
- 이거 1923년부터 가졌어요.
- 네.
- 그 때, 개벽사라고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개벽잡지가 있었는데, 소파 방정환씨와 김기진씨 이런 분들이 되기 전에 그 때 김기진씨가 날더러 글을 쓰라고 해서 글을 한 번 썼더니, 글 하나는 맨 책 꼭대기에 들어가게 되고.
- 네.
- 하나는 권 말에 맨 끝에 나게 되고. 근데, 둘다 김기진이란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 목차 여백을 놓는 것을 보이더니, 이거 꼭대기에도 김기진이, 끝에도 김기진이. 아래위가 다 김기진이니까 하나는 이름을 고치자고, 그래서 하나 마음대로 고치라고 그랬더니, 호를 하나 짓자고.
- 네.
- 그래, 난 지을 줄 모르니, 하나 지어달라고 그랬죠. 하하.
- 네.
- 그랬더니 김기진씨가 지어준 거에요.
- 김기진씨께서요.
- 예. 그럼 내가 어디서 나왔느냐고 그러니까, 청주 팔봉산 밑에서 나왔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아 그러면 좋다고. 팔봉산이니까 그렇게 하자고, 그래서 그 때부터 팔봉이 되었지요.
- 아, 팔봉산 밑에서.
- 네.
- 출생하셨기 때문에.
- 네.
- 아마 그 팔봉이란 호가 참 좋은가봐요.
- 좋은지 나쁜지 모르죠. 그 이름이 음은 좋다고들 그래요. 음은 부르기가.
- 네.
- 팔도 좋고, 봉하는 것도 좋고. 합쳐서 팔봉하고 부르는 것도 부르기가 자연스럽고, 듣기도 좋다고 그래요.
- 네. 김 선생님 이렇게 모처럼 모셨으니까 앞으로 여러회에 걸쳐서 또 좋은 말씀 부탁드려야 겠는데요. 우선 궁금한 것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하는 것인데요.
- 네.
-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 요즘 뭐 그 저 날마다 아침 먹고요. 그리고서는 즉 국민운동 중앙회를 맡았으니까 사무실에 나가는데, 워낙 나이나 먹고, 기운이 부족하니까 젊은 사람들하고 버스 같이 타느라고 경쟁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출근시간 다 지난 뒤에 열시나 가까이 되서 집에서 나오죠.
- 네.
- 그래가지고 버스를 타고 나와서 미아리까지 와가지고 거기서 즉 급행버스를 타던지, 혹은 저 급할 때는 택시, 만나면 택시를 잡아타고, 그렇게 들어오지요.
- 네.
- 그리고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았다가 지방에서 오는 손님들 그저 직원들한테 선전 들어오는 거, 뭐 안건 같은거 들어오는거 결제하고 의논하는 거 있으면 상대하고, 그리고선 하루 종일 있다가 일곱시 쯤해서 집으로 나가는 거. 그거죠. 그렇게 지내죠.
- 네.
- 요새.
- 선생님 댁이 수유리 쪽이죠?
- 수유리 아주 산 속에 삽니다.
- 네. 언젠가 선생님의 수필일까요?
- 네.
- 한번 읽었더니, 그 뒤에 샘이 있고요.
- 네.
- 조그만 냇물도 흐르고.
- 네.
- 무더운 여름철에도 세수할 수 있는 좋은 곳이라고 들었는데요.
- 그래요. 아주 자리는 좋습니다. 내가 사는 데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 네.
- 집 짓고 살만한 아주 터로는 서울 가까운 근교에서는 그만한 데가 아마 없을꺼 같아요.
- 네.
- 물 좋고, 흙이 흙이 좋고.
- 네.
- 또 전망이 좋고, 교통도 그렇게 멀지 않고, 시내에서요.
- 네.
- 그렇게 멀지 않고, 버스타는 것도 한 15분 가량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 버스정거장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과히 불편하지 않고, 그리고 환경이 좋아요. 수목이 우거져서요.
- 네.
- 뭐 여러가지 조건으로 봐서 아마 그만한 데가 없을거 같아요.
- 그렇죠?
- 네.
- 신선한 공기도 마음껏 마실 수가 있겠고요.
- 네, 그래요.
- 네.
(음악)
- 그런데, 김 선생님께는 아무래도 화제가 이 토월회의 얘기로 옮겨지게 될거 같은데요. 이 토월회 하면은 그 문학을 연구하는 단체라고 할까요? 또 신구운동을 일으킨 회라고 할까요.
- 네.
- 어떻게.
- 처음에는 시, 소설, 희곡 그것을 주로하고서 연구하는 문학단체로 다가 우리가 만들었었죠.
- 네.
- 동경서, 일본이죠.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그 때 박승희, 또 김을한, 이서구, 박승목, 연학연, 내 형님 작고한 내 형님 김덕진, 그리고 나 이렇게 일곱사람인가가 먼저 발기를 했었어요.
- 네.
- 그래가지고 문학 연구하는 단체로 출발했던 건데, 한 1년 후에 저 박승희가 그 때 연극을 전공하는 지망을 세워가지고, 일본에서 그때 한참 성행하던 소극장 운동.
- 네.
- 작은 극장 운동이죠.
- 네.
- 오사나와 가오루라는 사람이 스키지에다가 소극장을 짓고 그리고 소극장 운동을 그때 맹렬히 활발히 일으킬 때인데, 그 때 거기에 자극을 받아가지고 박승희가 그걸 열렬히 주장했어요. 우리 먼저 고국에 나가서 연극다운 연극이 없으니, 먼저 신구 운동을 일으키자.
- 네.
- 토월회 이름으로. 그래 좋다. 그러면 반대할 사람 하나도 없으니까. 그전에는 한 달에 한번씩 시작해서는 시나, 소설이나, 감상문이나 뭐 희곡이나 이런거 가지고 한 달에 한번씩 우리집에 모여서 이제 과자하고 과일이나 사다 놓고서는 그걸 돌려가면서 자기 글 낭독하고 그러고선 거기서 서로 비평하고, 그러던 회에요. 토월회가.
- 네.
- 그렇게 지내고, 그런데 박승희의 주장으로 제창으로 우리가 신구운동을 하기로 하고 그리고선 1922년 1922년 가을 부터, 23년 여름에 고국에 돌아와서 방학동안에, 공연을 가져보자. 이렇게 해서 22년 가을부터 토월회 준비에 착수했었죠.
- 네.
- 그래서 토월회가 그 이듬해 1923년에 7월달에 서울서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을 가졌었죠.
- 네.
- 그렇게 되었습니다.
- 네. 처음엔 그러니깐은 연극단, 연극이 한국에 없어서 신구운동을 일으켜 당면과제로 시작된 것이.
- 그렇죠.
- 토월회 첫번째.
- 네, 출발. 네.
- 처음에는 어떠한 작품을 갖고 공연을 했어요?
- 맨 처음에는 요. 그 지금 작자 이름을 잃어버렸는데, 기 갈, 줄일 기자에다 목마를 갈자하고.
- 네.
- 기 갈이라고 하는 1막짜리 연극을 하고, 그리고는 즉 안톤 체호프가 지은 곰이라고 하는 각본이 하나 있어요.
- 네.
- 그것도 1막 짜리고. 또 버나드 쇼가 쓴 1막 짜리 각본의 그것은 또 제명이 퍽 깁니다. 그 여자가 그 남편에게 뭐라고 거짓말을 했느냐.
- 아하.
- 이렇게 기다란 이름의 각본인데.
- 네.
- 그래서 오로라, 오로라라고 하는 이름으로 개명을 해가지고 그 거 하나하고, 그 번역극 세 가지하고, 박승희가 쓴 창작극 길식이라고, 길식이라고 하면 사람 이름이죠.
- 네.
- 길식아, 길식아 하는 어린, 살아가는 사람의 이름인데, 청년의 이름인데, 그 길식이라고 하는 각본하고. 그 1막짜리 각본 4개를 가지고, 처음에 제1회 공연을 가졌었어요.
- 네.
- 그러니까 뭐 우리 레퍼토리로서는 실패한거죠. 말하자면 뭐 처음으로 신구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그 때 총 관중들의 지식이 그리 수준이 높지 못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한테 짤막짤막한 연극 4가지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 흥미가 대관절있을 이치가 있을리가 없을 거거든요.
- 네.
- 우선 그래도 얘기가 굴곡이 심해가지고 무슨 눈물도 있고, 활극도 있고, 이래야 좋아하는 그때 관중들이었는데.
- 네.
- 그런사람들한테 도무지 적당치가 않은 각본을 선택해가지고서.
- 더구나 번역극들이고요.
- 네. 번역극들이 세 가지나 되어가지고 그래가지고 실패했었어요. 제 1회 공연은.
- 네. 공연 기간은 길었습니까?
- 공연기간은 길었습니다. 그 때 일주일씩을 했는데요.
- 한 작품가지고요?
- 그렇죠.
- 네.
- 한 작품가지고 4막을 하는데, 그것을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했는데, 그 때 평이 그랬어요. 그 동경가서 유학하는 토월회 학생들의 연극은 은 그릇에다가. 은 그릇에다가.
- 네.
- 은으로 만든 그릇에다가 설렁탕 담은 거 같다고.
- 아하하.
- 그렇게 표현을 들었어요.
- 네.
- 왜 그런 말을 들었냐하면은 하니, 무대장치라던지 배경은 참 훌륭했었어요.
- 네.
- 그 때 내 형님이 미술학교 재학중이었었고, 또 그 배경을 전부 일본서 만들어가지고 나왔었으니까요.
- 네.
- 그것을 여기 와서는 글을 짜서, 틀만 짜가지고서는 세우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배경을 만들어 가지고 왔었기 때문에 배경 그림만은 훌륭했었어요.
- 네.
- 아주 입체적으로 만들었었는데, 그 때까지 그 때까지 우리나라에서 연극하는 사람들이 그런 배경을 가지고 연극을 못 해봤었거든요. 그런데 토월회의 학생들이 처음으로 그런 무대를 구경시켜 줬지요. 그러니까 모두 처음에 구경꾼들은 그 때 조선극장이라는게 지금 인사동에 있는 종로구청자리에 있었는데요.
- 네.
- 조선극장에 그 때,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라는게 있었습니다. 2층 3층까지 관중들이 그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다니고 그랬죠.
- 네.
- 제일 대표적으로 좋은 극장이었었는데, 그 극장이 가득 만원이었었는데 그 첫날 맨 끝머리에 순서가 박승희가 나오는 박승희가 주연으로 나오는 그 버나드 쇼의 오로라라고 하는 각본이었는데, 그런데 그 내가 무대 뒤에서 프로모터를 내가 했었는데.
- 프로모터 하셨어요?
- 네. 서로 돌려가면서 내가 길식이라고 하는 각본은 내가 주연 배우로 나가고.
- 네.
- 오로라라고 하는 각본에는 그 박승희가 나가고 그랬는데, 내가 할 적에는 박승희가 프로모터를 봐주고, 박승희 때는 내가 프로모터를 봐주고 그랬는데. 거기 스토브가 있는데, 스토브 뒤에 숨어 앉아서 대사를 읽어주는데, 이 사람이 처음 무대에 올라선 첫 날이니까 그만 상기가 되어가지고 아무리 일러줘도 못 알아 듣습니다.
- 대사를 전부 잊어버리셨군요.
- 전부 잊어버렸어요. 전부 잊어버려서 관객석에서 들리지 않이할 만큼 가는 목소리로다가 일러줘도 못 알아 들으니까 조금 더 크게 불러주거든요?
- 네.
- 그래도 못 알아 듣고선 이미 자꾸 그 스토브 앞으로만 가까이 와요.
- 하하하.
- 아, 그래 난 발자국 소리만 들으면 아는데, 벌써 무대 한 가운데 있어야 할 놈이 한쪽 구석으로 왔구나 생각을 하고 좀 더 큰 소리로 일러줘도 그래도, 뭐야, 뭐야. 뭐야. 묻기만 하지 영 못알아 듣는거에요.
- 하하하. 아주 긴장이 되셔서 완전히.
- 예.
- 당황하셨군요.
- 네. 그러더니 조금있더니 무대 안이 조용해요. 난 무대를 못보니까, 숨어 앉았으니까 조용하니까는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여기 그 때 상대역이 이월화가 그 때 상대역이었는데. 이월화가 아, 이 양반이 어디가셨을까? 아, 왜 안오실까? 이때 까지 안오실까? 무슨일로 나가셨을까? 뭐 이런 소리를 각본에 없는 대사를 한 단 말이죠.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아, 조금있더니 그 막을 무대앞에 막을 내려버리고 말았잖아요. 그리고 그 무대 뒤를 맡아보는 사람이 즉 분개를 해가지고서는 나와보라고. 그 나와보니깐은 무대뒤로 나와보니깐은 벌써 관객석에는 무대가 막을 내려서 무대가 보이지 않겠는가 그래놓고서 관객석에서 불을 켜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니깐은 박승희가 연극을 하다말고 나갔다는거야.
- 정말이요?
- 그냥 무대에서.
- 네.
- 가출했다는 말이야. 그 어디 갔냐고 하니깐은 저 3층에 아마 화장실에 갔는가 보라고. 그래서, 불이나게 화장실에 올라가봤더니 아 이녀석이 저 연극복을 입은채 책상위에 걸터 앉아서는 실수를했다고 그랬다고 부채질하고 덥다고 부채질을 하고 있잖아요.
- 네.
- 그래서 내가 아니 이놈아 너 어찌 왜 연극하다말고 여기와서 왔냐니깐은 도망왔냐고 하니깐은. 아니 이거 형 못하겠어, 형 못하겠어. 하고.
- 하하.
- 계속 그러잖아요.
- 네.
- 그래도 내려가야 한다고. 그래도 안 내려간다는 말이에요. 그 때까지 극장에서 연극 구경하던 관중들은 그 각본에 그렇게 되어 있는가보다 싶어서 물 끼얹으듯이 조용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 네.
- 그러고 있는데 그 무대 막이 내려지고 그 관객석에 불이 환하게 켜지니깐은 그때서야 즉 연극이 중단된줄 알고서는 막 떠드는거 아니에요.
- 그렇지요.
- 그래서 이 나쁜 놈들. 연극하다 말고서 이놈들 막을 내린다고. 돈들 물러내라. 하고 소리를 고함을 지르고, 야단치고 그 때 이제 고범 이석우씨가 우리 같은 토월회 동인이었는데. 먼저 돈이 없어서 유학을 관두고서 중단하고서 나와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었어요.
- 네.
- 그래서 하는수 없이 동아일보 기자 이석우씨를 보고서는 네가 나가서 이거 또 관중들한테 사과의 말씀을 하고, 사면을 이뤄달라고 하고.
- 하하.
- 그 양해를 시켜서 돌려보내달라고 그래서 이석우씨가 나가서 아주 그만 깎듯이 절을 하고, 용서해달라고. 이거.
- 대신 사죄를 한 셈이로군요?
- 학생들이 되어서 이거 정말 이렇게 되었다고. 그래서, 간신히 돌려 보냈지요.
- 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박승희씨도 아마 그 신구운동을 일으키겠다는 가성한 뜻과는 달리 아마 무대에 서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으셨던 모양이지요?
- 그렇지요, 뭐 그냥 눈에 뵈는것도 없고, 별 기억이 생각이 통 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 네.
(음악)
- 그런데 연극공연을 하려면은 그 여배우도 필요할텐데요. 그 당시만 해도 남여칠세 부등석이니. 또 남여 사이에 또 내위를 할 때가 아니겠어요?
- 그렇지요.
- 그런데 여배우 구하시기는.
- 그참 힘들었어요.
- 쉬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 몹시 힘들었어요.
- 힘드셨습니까?
- 네. 처음에 공연을 앞두고서는 먼저 박승희가 겨울 방학때 일본서 돌아와가지고 서울서 두달, 석달동안을 묵으면서 여배우를 신파배우 아닌 여학생중에서 이제 고른다고 그래가지고서는.
- 순수한 연극하기 위해서요?
- 순수한 연극하는 사람을.
- 네.
- 우선 동지로서 구했지요. 그랬는데, 연극을 구하지는 못하고서는 4월달까지 서울에 있다가 4월달에 동경에 있는 저는 그때 겨울방학에 동경에 그냥 머물러 있었니까 저한테 편지를 하고서 네가 좀 나와서 대신 좀 여배우 여배우감을 골라보라고. 나는 새학기에 좀 들어가봐야겠다고. 그래서 나는 신학기 그 때에 내가 이 교대학 영문학과 본과 1학년이었는데.
- 네.
- 신학기가 된지 얼마 안되었건만. 스토리 줄기때문에 나왔지요. 그래가지고 나와서 겨우 하나 구한것이 이정수라고 하는 진명여학교. 지금 그게 지금 진명고등여자부학교이지요?
- 네.
- 진명여자고등부학교라고 그랬는데.
- 네.
- 지금 진명여자고등부학교 2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을 하나 구했어요.
- 네.
- 그런데 이 여자가 안톤 체바흐의 각본이라고 하는 곰이라고 하는 각본의 주연을 맡았었는데. 그 상대역은 우리나라에서 테니스를 잘하는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던 사람의 연학연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네네.
- 아, 연학연 우리나라 정구사 정구역사 테니스 역사에서는 연학연하고 황명언하고 두 사람이 아마 최초로 최고봉으로 오르는 사람이겠지요?
- 네.
- 연학연이라는 사람이 그 우리 그때 토월회 동인에 한 사람인데 그 사람하고 이정수하고 둘이서 안토체바흐의 각본을 했었지요. 그런데 이 이정수라는 여자가 내가 알기에는 아마 우리나라 못하는거 중에서는 제 1호에요.
- 네.
- 그 때에는 여학생의 수요도 얼마 안되고, 여학생하고 남학생하고 같이 길을 걸어다니는 일이란 절대로 없고, 길에서 서로 인사하는 일이라는 것도 없고, 그렇게 참 남여의 사이가 멀고, 서로 경원해서는 하던 때인데.이 때에 이정수는 양말을 안 신어요. 노 스타킹이라고 하는데 아주.
- 살이 그대로 맨살을 드러내는거겠지요?
- 그렇지요. 못할걸요. 하나의 무슨 특수적 필수적원처럼 되어있는데.
- 네.
- 노 스타킹인것뿐만이 아니에요. 노 드레스에요. 드레스도 안 입어요.
- 어.
- 하얀 속 치마나 입고, 거족에 무슨 치마 하나입고, 그것뿐이야. 허허.
- 허허.
- 그러고 다녀요. 이 여학생이 이제 아마 지금 혹 기억하시는분은 아시는지 몰라요. 우리 예비사단에 사단장으로 있던 이량씨라고 있어요.
- 네.
- 만주서 만주국 대장노릇까지하고 하던 분인데. 할일없고 군에 들어와가지고서는 군에 다년간 복무하던 사람인데, 그 이량씨의 사촌동생되지요, 이정수라는 여자가.
- 네.
- 그래서 그 때에 이정수라고 하는 여자 하나를 여학생을 내가 하나 얻고.
- 어떻게 해서 선생님께서는 이정수양을 여자를 아셔서 연극운동을 하게끔 하셨습니까?
- 그 때에 고범 이석우씨가 한흥여관이라고 하는 낙원동 파고다공원 옆에있는 여관에 묵고 있었는데. 내가 동경서 와가지고 있을때가 이 집 이석우씨 있는데 밖에는 없으니까.
- 네.
- 이석우씨는 저 안양서 그렇지요. 본집이 안양이니까 안양에서 통괄하기로 하고, 이석우 있던 방을 내가 들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때에 누가 이석우씨한테 이런 여자 여학생이 있으니 한번 만나봐라. 그래서 이정수를 만나본 일이 있데요.
- 네.
- 그래서 만나보고서는 내 얘기를 하고 그랬더니 이정수 말이 나를 잘 안다고. 간접으로.
- 김 선생님을요?
- 어. 이정수 말이.
- 네.
- 간접으로 잘 안다고는 아마 저 오라버니한테서 그 전에 들은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 네.
- 그 이량이라는 사람은 그 전에 내가 알았었으니까요. 저는 함경남도 원산사람인데.
- 네.
- 그래서 그런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알았다고 그러서는 한 두번 만난 일이 있으니 기진이 너 네가 이정수 한번 만나볼래? 이렇게 묻더군요. 네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연락을 해가지고 찾아오도록 했어요.
- 네.
- 그 여관으로 찾아왔기에 만났지요. 그리고 만났더니 그 이정수가 그 때부터는 날마다 오는거에요. 나한테. 그 와서는 책 봐 가지고 와서는 아침에 학교가는 길이라 하고, 와서는 학교가지도 않아요.
- 네.
- 그냥 하루종일 여관에서 놀다가 가요. 그리고 즉 말하자면 그 때에 나한테 마음을 마음을 두고서 따라다닌거 같아요. 그때에.
- 하하, 선생님의 마음을 예?
- 흐흐. 그러고보니 그 후에 조금있다가 또 이석우씨의 일과견있는분의 신파하지는 않고, 연극도 하지도 않고, 연극의 취미가 있는 부인이 하나 있다고 그래서.
- 네.
- 그래서 그 가정 부인인데 그 부인을 하나 구하고, 그리고 즉 이정수하고 그 부인하고 둘을 구했는데. 아무래도 하나 각본이 4개이니까 아무래도 하나 한 사람 더 있어야겠다고. 그래가지고서는 구한다는것이 영 독특한 사람이 없고, 참 그래도 기술이 있는 사람이래야 할테니까 그래도 전에 잠깐 무대에 신바람 무대에 나왔었지만은 이월화가 제일 좋다고 그래서.
- 이월화씨요?
- 이월화.
- 네.
- 네.
- 영화관에도 나오고 그랬지요.
- 네.
- 그 이월화를 여기와서 그려내라고. 그래서 그 때 백조 동인으로 있던 안석주씨 그림 그리고.
- 화가이지요?
- 네, 화가.
- 화가 안석주씨하고 나하고 둘이서 이월화씨 이월화씨 집에 가서 이월화 어머니한테 넙죽 절을 하고, 그리고서는 즉 우리 동경서 공부하는 참 훌륭한 집, 점잖은 집 아들들인데 이런 연극을 한다고. 그 따님을 달라고 애걸복걸해서 이월화를 끌어내고.
- 허락해달라고 하셨군요?
- 네, 그래서 겨우 여배우를 갖췄습니다.
- 네. 그래서 무대 여자분들이 세분이요?
- 세 분, 세 사람인데 작품 하나에는 또 그 세 여자가 다 나오는 각본이고.
- 네.
- 그러니깐은 여자 셋이면 넉넉했었지요.
- 네.
(음악)
팔봉 김기진씨를 모시고 보내드린 0시에 만난 사람. 내일 이 시간에 또 다시 뵙겠습니다.
아나운서에 최춘자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입력일 : 200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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