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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에 만난 사람
소설가 전영택 - 결혼식 다음날 감옥 간 신부
소설가 전영택
결혼식 다음날 감옥 간 신부
1966.04.22 방송
0시에 만난사람. 밝은 새벽을 행해서 밤은 소리없이 깊어갑니다. 흔히들 외롭고 호젓한 밤이라고 하지만은 여기 즐길 수 있는 감미로운 음악과 정겨운 얘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음악)

0시에 만난사람. 밝은 새벽을 행해서 밤은 소리없이 깊어갑니다.

흔히들 외롭고 호젓한 밤이라고 하지만은 여기 즐길 수 있는 감미로운 음악과 정겨운 얘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생애 환희가 이 밤에도 곱게 번져가는 0시. 오늘은 목사이시며 소설가이신 전영택씨를 모셨습니다.

- 이렇게 나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기가 드시고, 좀 불편하시다고 하셨는데요. 괜찮으십니까? 요즘 건강이?

- 그냥 약속했기 때문에 좀 거동을 이끌고 나왔지요.

- 네, 고맙습니다. 요즘은 뭐 환절기가 되서 그런지 호흡기 병이 많이 나돌고요, 모두들 아마 건강들에 좀 조심들 하셔야 될 때인거 같아요. 청취자 여러분들이야 그렇지만. 모처럼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전 선생님께서 오늘밤에 이렇게 모시니깐요, 옛날 결혼하셨을 때 얘기가 듣고 싶어지는데요. 처음이자 방송시 마이크 앞에 앉기 전에 주위분들이 뭐 지나간 날에 젊으셨을 때 여러가지 추억담 해주십사 하니깐 웃으셨는데요. 무슨 재미난 얘기 있으십니까?

- 글쎄요, 무슨 재미난 얘기가 별로 없지만은. 처음 결혼할 때에 무슨 얘기를 해드릴게 하나 있기 때문에.

- 네.

- 그런 얘기 해드리지요.

- 네.

- 처음 어떤 여성하고 젊은 나보다 훨씬 적은 여성분께 약혼했지요.

- 네.

- 약혼할때 상당히 애뗘가지고 사랑한다 그러고 약혼했었는데, 어째 그런 얘기밖에 할 수 없고, 결혼 하는 수 없고.

- 결혼 못하시게 되셨군요?

- 못하게 되었지요. 지금 한동안 만나면 벅차 스럽게 가슴이 두근 거리더니 지금은 또 곧장 늙어서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 만나는것처럼 그냥 그렇게.

- 담담하시다가도?

- 네.

- 근데 결혼하게 되어서 결혼식을 올리는데요, 그 때가 기미년 만세 바로 그 주입니다.

- 네.

- 근데 결혼한 다음 날 결혼하고 그날 자고 바로 다음 날 순경이 와서 저 일본 순사가 와서 순사가 저 내 아내를 나오라고 했어요.

- 네.

- 나왔더니 돌아와서 반지를 뽑아내고 가야겠다고. 그 때 비로소.

- 반지를 뽑으시고요.

- 네. 그러니깐 감옥으로 들어간거지요.

- 아, 네.

- 신부가 감옥으로 그 이틑날.

- 네 그렇지요.

- 밥을 먹다말고 둘이 마당에서 밥을 먹다 말고 신부가 잡혀 가고, 할 수없이 뒤를 따라 갔다가 경찰서에 문 밖에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말았지요.

- 네.

- 그러고는 금방 그 사학관이 박연숙씨가 지도자가 되고, 만세운동을 사건인데요. 일단락 다 끝났기 때문에 얼릉 서로가 넘어가고 그래서 감옥으로 감옥에 넘어간 모양이에요.

- 네.

-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목사라던지 그 때 애국자들이 감옥에 들어가면은 부인들이 면회를 가고 그러는데, 난 거꾸로 되서 부인이 감옥에 들어가고 내가 면회를 가는데.

- 아하.

- 뭐 사람들 한테요. 그 얘기를 약혼을 했어요. 결혼한 다음날 집에 왔다는 얘기를 두고 아이고 마냥 신부를 어떻게 놔두고 어떡하나? 괜찮구나? 그리고 건강한 얘기를 들었어요.

- 네.

- 그 때 아주 아마 평양에선 아주 유명한 얘기이지만 화제거리였군요?

- 네, 화젯거리죠.

- 그러니까는 사모님께서 기미년 독립운동에.

- 그렇지요.

- 관련된?

- 같이 이제 평양서 만세를 부르려 가는 그걸 만들어서 한 아마 1년을 기약하고 나왔지요.

- 네.

(음악)

- 첫번째 곡명은 로버트 캔버터트 연주입니다. 장미빛 인생.

- 네, 전 선생님이 그 처음 문단에 데뷔하신던 때가 언제이셨어요?

- 내가 소위 문단에 데뷔했다는건 다른 사람들처럼 무슨 신문 현상소설에 당선이 되었는지 무슨 잡화잡지에 무슨 저 추천해서 그런게 아니라, 바로 오래전에 일본서 일본어 공부 할 적에.

- 동경에서?

- 동경에서 내 친구들하고 저 주요한 김동휘전들하고 순무의 잡지를 창설하고, 잡지를 창설해서 거기 집어넣어서 소설을 시작해서 그것이 아마 소위 문단에 데뷔한다는 시작이라고 하겠지요.

- 네.

- 그런데 그 때 경리를 서다가 삼일운동 때인데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삼일운동이 일어나서 본국으로 돌아가서지요. 전부 동맹교육을 하게 되는데.

- 네.

- 그래서 돌아와서 학교를 갔는데요, 처음에는 이제 저 평양에 있다가 나중에 서울서 학교를 갔지요. 학교를 졸업했던거는 여기에다가 아는것처럼 그 33인 중에 한사람인 남광 선생이 남광선생.

- 남광 선생님이요?

- 네, 저 이승훈씨.

- 네.

- 그가 학교에 찾아와서 일본에서 말이지요. 찾아와서, 이 무엇을 하게 되냐고요. 벌써 신학교에 가서 일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러냐? 그거 좋은데 할 수 있으면은 본국에 나와서 기독교 잡지로 우리가 할려고 하는데 좀 같이 좀 도와달라고. 그러니 이미 작정이 되어서 할 수 없다고 그러니깐요. 그럼 오후에 시간을 좀 내서 도와달라고, 그래서 그대로 나와서 신학교에 일을 보면서 오후에 신생명이라고 하는 기독교 잡지를 주관 하게 되었지요.

- 네.

- 그래서 한두 쪽으로 무슨 문제냐 하는 그 문학잡지를 하는데 협력을 하는건데요. 내부적으론 방인규라는 사람이.

- 네.

- 기자를 하면서, 카메라. 이광수의 이름을 빌려가지고, 그 주제로 하자고 그래서 그렇게 해서, 시작 했는데 처음에는 이광수 댁에서 아주 살면서, 내부가 살면서 하다가 불편하니까 지방에 있는, 자기 고향에 있는 전을 팔아가지고서는 명동에 집을 사고, 전화를 놓고 그러고 대대적으로 시작을 했더군요. 근데, 처음에는 그런대로 해지만 잡자, 일이 벌어지고, 문단 사람들 사귀고 그러고 원고를 집어 넣는 것 보다도 그 사람들 술을 대접을 하고 연회를 하고 그런 동안에 돈을 다 써 버리고.

- 네.

- 탕진을 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그 문단도 오래 못하게 됐죠.

- 네.

- 근데, 그 분들이 그리고 술을 배우고, 술로 교제를 하고 그러다가 아마 그 후에도 술들 너무 먹기 때문에 술도 마시기 때문에 아마 그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누구 라고 할거 같으면 대개 술에 그만 빠져서 그 후에도 술로 몸을 망치고 해서 일찍, 아까운 분들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 네.

- 수술이라던지, 병. 병치레라던지. 또 형보, 영상 형들이 술로 몸을 상해서 일찍 세상을 떠났죠. 그래서 박기준이라는 사람도.

- 박기준씨.

- 네. 그 북학까지 한 사람인데, 연탄에를 너무 가스 중독이 되면은 그 후에 말을 들으니까, 술을 너무 먹어서 처음에는 못 먹던 것을 자꾸 권해서 술을 배워가지고, 술을 좀 먹다가 알콜, 알콜이 뇌로 침범이 되서 죽었다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저는 유감이에요.

- 네.

- 문학을 공부하고, 수업해야 할 그런 사람들이 너무 술 마시고, 놀기에 그만 멀어서, 아까운 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난 걸 저는 우리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네. 그런 문인들의 참 피로를 잠시 풀기 위해서요.

- 그렇죠.

- 그렇게 술을 가까이 하다가 나중에는 알콜 중독이 되면은.

- 어쩔 수 없는 그런 경우가 생긴거죠.

(음악)

- 앤디 윌리엄스의 노래입니다. 투나잇.

(음악)

- 그러니까 전 선생님이 동경에서 공부하실 때, 그 신학교에 다니시면서 어문학에 취미를 갖게 되시고, 문인들과 접촉을 하시게 되신 셈이군요.

- 그렇죠.

- 네. 그런데 신학교에 졸업하시고, 그 다음에 교사직에 계셨습니까?

- 신학교에서 나와서.

- 네.

- 신학교라고 해서 신학교에서 교수를 했었죠.

- 네네. 미국을 가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후에요.

- 그 때, 일본 갔다 와가지고는 우리나라에 동네에 교회가 많이 있어요. 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느껴서 미국으로 갔지요. 미국으로 가는 것도 형편이 말할 것도 못하지만 꼭 가야되겠다고 생각해서, 애들이 딸이 셋이고 아들이 둘. 오남매가 있는 걸 두고 가지 않았겠어요.

- 아, 그러니까 그 때 가실 때에는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 마.. 마흔 다섯 쯤 아마 됐을꺼에요.

- 네.

- 마흔 댓 되었을 거에요. 그 때, 외국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내가 갈 때, 배로. 배로 갔는데.

- 네.

- 배탄 사람이 나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뜻밖에 어떤 상당히 교양있는 여성하고 둘이 같이 가게 되었어요. 이화대학 음악과 과장으로 있었는데.

- 네.

- 옛날 얘기죠. 같이 가게 되서 퍽 좋았어요. 사람이 있어서.

- 서로 객지로 떠나시니까. 의지를 하시고.

- 그 때, 한 두주일 동안 배로 떠나거든요.

- 네.

- 외국 사람들 많이 있는데, 혼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들어가는데, 미스 김이라고 하는, 우리나라는 김이 하도 많으니까. 미스 김이라고 해 두죠.

- 네.

- 그 둘이 가면서 두 주일동안 퍽 재밌게 지냈어요. 별 얘기도 하고, 달밤에 배에서 로맨스 같은 얘기도 하고, 가다가 미국 가서는 그녀하고 나하고는 갈라서 헤어지고 말았죠.

- 네.

- 처음에 떠나서 며칠 동안은 잘 지냈지만, 그게 참 잊혀지지 않는 얘기 입니다.

- 마지막 논쟁의 얘기 군요.

- 재밌는 노래를 그 때, 내가 노래할 줄 모르지만 그에게 노래를 배운 일도 있고.

- 네.

- 그리고 나서 내가 목적으로 한 일을 미시간이라고 하는 호수가 있고, 저 시카고 옆인데, 혼자 갔죠. 거기는. 물론 먼저 간 사람이 있지만, 별로 가까이 있지도 못하고 있어서. 그게 저 큰 호수가 바다같은 호수가 있고, 바닷가에 학교가 있는데요.혼자 그 호수 옆에 바닷가에서 산 모래사장을 산보하면서 집사람 하고 아이들 생각이 나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부르고, 그러고.

- 아하.

- 쑥스럽게 이런일이 있었지요.

- 네, ○○이 해줬군요?

- 네, 미국사람들은 뭐 여자들은 그렇지는 잘 모르지만. 그게 착하게 사귀어지지 않고, 그리고 말하면은 헬로우, 굿모닝하고 그만이지만 가까운데서 보여지지 않거든요.

- 네.

- 내 학교 사람들은 자기 학과 바쁘니깐은 별로 사귈시대가 가까이 이제 지낼시간이 없고 그랬어요. 퍽 섭섭하게 지내고, 우리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은 오남매 아이들을 두고 또, 목사가 되었다가 갔는데, 한 명이 피스보이라고 예라고.

- 피스보이 예야, 하는 시대죠?

- 내 한번 무슨 저 일을 하는데 요리집에서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데 그 접시를 많이 가져가다가 깨뜨렸거든요.

- 네.

- 피스보이가 깨뜨렸으니 얼른 치워주라고.

- 아하.

- 헤헤, 내 아주 땀이 나면서 그런 고혹한 일을 당하니.

- 네.

- 한번은 일본 사람을 만났는데요, 일본 학생을 만났는데 둔개해서 미국사람이 자기보고 칭그러맨이다고.

- 네.

- 왜 동양이란 말이지요, 그 때 영어로는 짱고로, 우리나라말로 동양이란 말이에요. 분개해서 그래요. 이보게, 나도 그 말 들으니 내 울린다. 일본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이렇게 같은 동양사람이라는거 인정해요. 뭐, 그런 백인놈 한테 그런말 듣겠냐? 뭐.

- 이서를 알아야한다?

- 이서를 알아야한다 그런 얘기를 하지요.

- 미국 가셔서 즐거운 추억담 많으셨지만 또 여러가지 안 좋은 추억을 갖고 계시는군요?

- 갈 때 그 두 주일동안 재미있게 지내면서 미국땅에 내릴적에는 아주 내리기가 싫고, 그냥 배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지요.

- 아하.

- 내리는 그 시간부터 아주 고생이니까요.

- 네.

(음악)

- 질리나 칭글리테의 음악입니다. 눈동자의 가득 고이는 눈물.

- 네, 질리나 칭글리테가 노래한 눈동자의 가득 고이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선생님께서는 고향이 평양이라고?

- 네, 평양입니다. 난 난데가 평양입니다.

- 네.

- 아이로 태어났지요.

- 네, 그러면은 이남으로 내려오셔서 여러가지 또 느끼신 점이 많으실텐데요?

- 네.

- 우리나라가 이 국토가 양단되고 나서는 여러가지 그 민족적 비극이 있잖아요?

- 그렇지요, 처음에 내가 미국갔다 나와서 저 시골에 조그마한 교회 목사로 갔는데, 그 때 가격을 왜 이렇게 높은가하니 미국서 저 안도선이 도산한 저 선생이 장사를 흥산산에 지었거든요.

- 네.

- 즉, 그래서 도산 안산 북쪽파라 그래가지고 교회에 버스로는 그런 남쪽 사람이나 북파다 남파다 그래가지고, 밀려서 안도선 선생이 그 흥산산에 지었다 해서 비교적 저 북쪽에 가서 어 한동안 한 이틀동안 농촌에 가서 고생을 고생을 했어요. 난 농촌에 가고 싶어 갔지만은 어떤 사람들은 어떤 부인들은 에이 촌에 가서 고생을 하겠구나 그러고서는 동정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 혁명예고에 내가 무역협회에 관계되었는데, 왜 무역협회에 나가서 그러느니 그 때 회사에다가 말하는 얘기이지만은.한국능률협회, 자유무역협회 이렇게 분단에서 갈려서 좀 불행하게 지냈기 때문에 혁명 후에 정부에서 합해서 하라고. 그래서 합해서 하는데 내가 아무데도 관계를 안했기 때문에 중단 사람을 내세우느라고 내가 나갔었지요.

- 중립자이네요?

- 중립자로서 그래서 나가서 한 이틀동안 그런 관계를 했다가 나왔는데. 그런 모습이라 그런지 특별히 무슨 교회라던지, 문인 그런 단체같은거를 좀 합해서 서로 협력을 하고서 서로 도와주고 살아야하는데, 우리는 이 갈리고 분열을 해서 결국 참 손해를 보는 이것저거로는 손해를 보고 그랬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바라기를 좀 더 우리들이 서로 합하고 협력하고, 그래서 민족 일이나 교회 일이나 기독교 일이나 뭐 우리 일이나 또 앞으로 발전이 있고 희망이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 아, 네. 좋은 말씀이신데요.

- 네. 같은 민족이고요, 이 조그마한 국토안에서 서로 나뉘어서 싸운다는건 참 비극이고요.

- 그렇지요.

- 가슴 아픈 일인데요, 지금도 그러면 교회에서 여러가지로 준비를 맡고 계십니까?

- 지금은 내가 은퇴를 해서 교회에 관계없지만은 그만 밖에서 보아도 지금 수없이 불행한 얘기이지만은, 서로 편이 갈리어가지고 그런 참 그런 대립을 하자 그런 얘기가 있어요.

- 네.

- 이 참 불길하다고 생각합니다.

- 네.

- 이 뭐 세상이 다 아는 얘기이니까 하나 일 말이지요.

- 네.

- 그런 일이 빨리 없어야 되겠지요?

- 네네. 이렇게 국가가 나 참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양반되서는 그 또 불행인데도 나는 우리끼리 갈리어서 서로 대립해서 그런건 참 유감입니다.

- 네.

(음악)

- 나탈린 슈타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전 선생님께 작별인사 올려야되겠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 네, 귀한시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 고맙습니다.

(음악)

지금까지 목사이면서 소설가이신 전영택씨를 모시고 보내드린 0시에 만난 사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입력일 : 200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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