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왕조 최후의 어진화가로 유일한 생존자인 이당 김운호 화백의 지난날의 얘기를
이규영 아나운서와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 우리나라의 동양화 60년사의 아마 동양사의 아마 죽도라고도 할 산 역사라고도 할 수 있
겠습니다만은, 이당 김운호 선생을 이 시간에 모시면서 앞으로 그동안의 활약하시던 얘기를
여러분과 함께 듣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천만이 옳시다.
- 올해 연세가?
- 여든입니다.
- 여든이시구나, 그러니까 어릴 적에 처음에 상감에 어진부터 시작을 해가지고요, 우리들이
지금 아는 것만 하더라도 그 역사적인 인물들의 그림을 참 많이 그리셨습니다. 낳으신 곳은
인천에서 낳으셨더라고요?
- 네, 인천 주입이라고 하는데서 낳았습니다. 저 인천 주입이라는 곳이 인천 항구에서 동쪽
으로 한 십리나가면은 주안역이라고 하는 곳 정거장이 있지요?
- 네.
- 그 주안역에서 원당쪽으로 가는 데인데, 거기서 내가 산 것입니다.
- 네
- 80년전에 1892년에 낳으셨군요?
- 그렇습니다.
- 인천에서 그 당산 김씨 2대 독자로 태어나셔가지고 처음에 이제 부유한가정에 태어나셔서
서당에 아마 다니셨겠네요?
- 네, 한문을 그저 읽고 있었는데요.
- 네.
- 내가 15세 적에 인천항구에 있는 일어학교라고 하는 데에 박해가지고 다녔는데 거기서 인
천 상업학교가 되었습니다.
- 네.
- 상업학교에 전신이 일어학교이지요.
- 네.
- 거의 한일 합방전에 전에 있던 학교 입니다.
- 그, 일어학교라고 그래서 일본말?
- 네, 일본말도 다 가르치고 그랬지요. 다른거 학과 다 마찬가지로 했는데, 학교 이름을 일
어학교라고 지은 것 같았어요.
- 네.
- 가정에서의 갑작스런 일이 나서.
- 네, 가정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그래서 이제 일한 합방을 하려고, 한일 합방을 하려고
일본놈들이 한국에 대해서 그 때 갖고 있는 군인을 다 해산시켰습니다.
- 네.
- 강화, 군인도 많이 있었죠? 강화도에.
- 네.
- 그 군인을 해산을 시켰는데, 강화도에 권양의라는분이 있었는데, 우리하고 아마 척분 간
이 되는 모양이에요. 그랬는데, 내 형님한테 와서 군인으로 있다가 해산통이 나오니까 먹고
살 수도 없고 그러니까 돈 얼마면 좀 빌려줄거 같으면은 가서 항구에서 장사라도 하겠다고.
- 그래서 청하니까, 그 때 집안이 그저 넉넉하니까 그 때 돈 700원이면 아마 많은 돈이라
하겠습니다.
- 네.
- 꽤 많은 돈. 700원을 줬어요. 그 700원을 가져가서 뭐 하는지 알 수 없었지요? 우리집에
선.
- 네.
- 한 두어달 되었거나 말았거나 됐는데, 저녁 어스레 어스레 하는데, 순사가 일곱이 인천
항구에서 오더니, 우리 촌집을 모여 싸고, 들어와서 내 조부가 여든 넷이세요. 연세가.
- 네.
- 그렇게 결박해 놓고,
- 네.
- 그리고 내 형은 물론 그렇게, 나는 그 때 십 육세 니까, 그렇게 나는 그냥 두고.
- 네.
- 그래가지고 집안을 뒤져가지고 전체 물건을 다 적어요.
- 네.
- 그저 그 돼지를 기르거나 이런 육축까지도 다 적어요.
- 네.
- 그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별안간에 변을 당하니까, 우리 집안에서는 어쩔 줄을 모르
고 있는데, 그렇게 있는 우리 조부는 그 운신을 나를 풀어놓고, 내 형과 같이 항구를 같이
나가니까, 즉 잡혀 가는거죠.
- 네.
- 그렇게 나가신 뒤에는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다가 어린 사람 몸으로 뭐 어딜 그런데,
다니면서 운동할 수도 없고,
그러나 내가 직접 그 이튿날 항구에 나가서 내가 알아본 일은 군인 퇴임하고서 나온 사람들
이.
- 네.
- 여럿이 합해서 돈을 모두 수합해서 합자로 인천항구 팔미도에다가 민선을 띄우고 민선에
가서 태통변 부두높은자리가 있었습니다.
- 네.
- 사기전을 했어요.
- 네.
- 다 뒤집힌 것처럼.
- 위조지폐처럼.
- 그 때 사기전 죄는 사형이에요.
- 그렇겠죠.
- 네. 그걸 했다가 붙잡히니까 너는 어디서 돈을 갔다가 했느냐니까, 나는 김 아무개한테서
돈을 빌려왔는데, 그 사람이 이거 하라고 빌려간게 아니고, 장사해 먹겠다고 해서 그 사람
이 준거니까 그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다고 해도, 그 때 세월에 지금은 정치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말이 많지만요.
- 네.
- 이조 말엽같이 나쁠 때가 어딨겠습니까?
- 그렇죠.
- 그 때, 그 김윤복이라고 하는 인천, 총수라고 하는 사람인데.
- 네.
- 그 사람이 해방하는 해 까지 영등포 서장으로 와 있었습니다.
- 네.
- 그 사람이 우리 돈을 다 먹은 사람입니다.
- 아, 네.
- 그 사람은 우리가 형세가 없었으면 오히려 가만히 있었겠지만, 형세가 있고, 괜찮으니까
와서 그 물건을 그 날와서 다 실어 갔습니다. 적어간 것은.
- 네.
- 그게 정무라고 하는데, 지금은 역산이라고 하는 것이죠?
- 네.
- 그걸 다 적어가지고 가서 그만 집안 식구 입은 옷, 또 먹는 그릇 수요대로, 숟가락 수요
대로 그것만 빼고는 전부 가져갔으니까, 졸지에 그렇게 집안이 패가 할 수가 없죠.
- 그렇죠.
-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해보고, 우리들은 사숙이 있어서 같이 자랐고, 그러니까, 집안이 말
이 아니죠. 별안간에 일을 당해가지고 그러니까, 부자, 부노 빈자 지본이라고 옛날 부터 한
말과 같이, 부자가 어려워 지는것은 돈 구경 하는 사람보다 그것은 오히려 괜히 창피한 일
로 생각하는 일이 많이 있었죠.
- 네.
- 세월이 다 그래요. 그래서.
- 친척을 도와줬다가 화를 당하셨군요.
- 네. 그래서 그 이후부턴 집안이 이렇게 되니까 학교 다니던 것은 중도이태하고 다시 사숙
에 와서 글을 읽고 그런 중에 이 측량이라는 것을 왜 배웠는가 하니.
- 네. 그 인천 어디인지.
- 네. 인천 측량학교라고 있는데,
- 네.
- 내 집 토지를 내가 측량해주는게 좋다고 그래서 나하고 사숙에서 한학 공부하던 사람들이
제 학급은 다 배웠어요.
- 네.
- 그래서 그걸 배우게 된 거죠. 그래서 그.. 그랬으나, 집안이 그렇게 되니, 내가 나무를
할 수도 없고,
- 네.
- 논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뭐 도저히 할 일이 있습니까. 그럭저럭 지내는 중에 우리 형님
께서 졸지에 우리 집이 패가 하고 나서 본 즉은 어찌 화가 없겠어요? 마음속에?
- 네.
- 화병으로 약도 몹시 먹었어요.
- 네.
- 자꾸 그러더니 나중에, 그 사혈을 자꾸 하시고, 그러시더군요.
- 네.
- 그러더니, 3년. 여섯살, 일곱살, 여덟살. 먹던 해 3월에. 그만 하세 하셨어요.
- 그러면 가산을 탕진하고 이렇게 점점 어려워 지시고 그러니까, 그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하
시게 되는거 같습니다. 이제 가산을 처분해가지고 서울로 옮기셨습니까?
- 그래가지고는 시골서 그런 생활은 도저히 살 수도 없고, 공부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서
울이나 올라가서 어떻게 무슨 도리가 있을까 하고, 나 혼자 걸어올라 왔습니다.
- 네.
- 열 다섯살 먹던 해. 8월에.
- 네.
- 서울로 걸어 올라왔어요. 올라와서 친구 이상현이라는 사람이 한학반에서 글 읽던 사람인
데, 그 사람이 천도교 학교 다녀요. 손병희씨가 하는.
- 네.
- 그런 학교가 뭐 있었어요.
- 네.
- 근데, 거길 다니는데, 서울에 와보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그 사람 밖에 아는 사람
이 없어요.
- 네.
- 그래서 그 사람 찾아가서 제가 가회동 천학운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데, 거기 가서 있었어요.
- 네.
- 거기 있는데, 그 끼니 때에 들어가면은 뭐 좀 얻어 먹고.
- 네.
- 끼니 때가 지나가서 들어가면은 굶어 자고.
- 네.
- 나중엔 으레 굶음 하고, 또 어떤 때는 일정할 때가 많이 있었어요.
- 네.
- 순전히. 그렇게 한 달을 서울에서 지내보니까, 아주 피골이 상접하고, 말이 아니에요. 몸
이.
- 네.
- 그래서, 이거 안되겠다 하고 저, 시골 내려가서 그 가옥이라도 팔고.
- 네.
- 돼지 같은 것 암돼지 하고, 등 부스러기를 팔고 이래가지고, 서울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
각은 있었으나, 그거 역시 얼마 안되거든요.
- 네.
- 근데, 그러는 도중에 나 가서 신세를 지고 있던 친구가 임상훈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발
소를 하는데.
- 네.
- 손병희씨 머리깎으러 다니고, 신청일씨, 김영국씨 머리 깎으러 다니던 사람이에요.
- 네.
- 천도교인으로서.
- 네.
- 근데, 그 사람네 집 아래채에 방이 둘이 있어요.
- 네.
- 학생이 한 방에 둘 씩, 치거든요. 근데 그리 그 사람이 옮긴다 말이에요. 같은 교인의 집
이고 하니, 거기가 좋다고.
- 네.
- 그래서 저는 거기에 따라 갈 수 밖에 없죠. 그 사람 쫒아.
- 네.
- 갔는데, 그 주인되는 사람은 자기 밥을 얻어 먹는게 아니고, 나는 이상현의 밥을 얻어 먹
지만, 나를 업신여겨본단 말이에요.
- 네.
- 나와서 심부름도 하라고 그러고, 이발소 소지도 보라고 그러고. 이런 짓을 자꾸 하거든
요?
- 네.
- 그러니까 그렇게 거기 있기가 한 달 이상을 있었을 거에요.
- 네.
- 도저히 거기있서는 안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 때, 그런 결심이 없었으면은 아마 이발쟁
이로 그냥 되었을 겁니다.
- 하하.
- 그래도 제가 손재주가 있어서요.
- 네.
- 뭐 그렇게 하려면 다른 사람 10년 씩 하던 것을 난 능력에 한 달이라도 다 해요. 한 몇
일이라도.
- 네.
- 근데, 절대 내가 그런 것을 안하고 있으나, 자연히 거기서 그 짓을 하고 먹고 살 수는 없
고 하니까 뭐 다른걸 할 게 없으니 그걸 될 수 밖에 없죠.
- 네.
- 그래서 거기서 뛰어 나왔어요.
- 네.
- 나와서는 어디 뭐 갈 데가 있어요? 저기 지금 화신상회 밑에 내려가면 무슨 빌딩인가 있
죠. 그 전에 경찰서가 거기 있었습니다.
- 네.
- 청년회관 위에.
- 네.
- 경찰서 자리 그 옆인데, 윤임당이라고 하는 가게가 있었어요. 그 도장포.
- 네.
- 그 도장포에 가서 내 도장을 새길 줄 아니, 도장을 좀 새기겠다고.
- 해보셨나요? 전에?
- 못해봤죠. 언제 해봐요.
- 하하하.
- 그래서 할 수 없이 거짓말 하게 되는 거죠.
- 네.
- 거 좀 하겠다 하니까, 그 날 좀 해보라는데, 그 날 못하겠어요. 그래서 와서 주머니칼 가
지고, 목도장 같은걸 새겨보니까, 새기겠어요.
- 네.
- 그래서 그 이튿날 부터 가서 새기겠다고 하니까, 목도장을 내 놓고, 너가 하던 것을 새기
라고 그래요. 그래서 새겼죠. 그러니까 곧잘 새긴다고 그래요.
- 네.
- 괜찮다고. 그래서 여기서 새기고 있으라고, 그래서 있어 보니까 원재료가 마진이 있으니
까 한 달이 시간있냐 그래요. 시간이 살아야 사람을 살아가죠.
- 네.
- 여드레를 꼭 새겼어요. 가만히 새기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시골에서 서울와서 이걸 하러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이거 안하겠다. 그래서 또 뛰어나왔죠.
- 하하.
- 나와서 그만 뒀는데, 보증제가 지금까지 있습니다.
- 네.
- 보증제. 인쇄소가. 김석환씨 이라고 하는 이가 군수 지내고 온 분인데, 10년하고 아주 막
역친구에요.
- 네.
- 김석환의 아우 되는게, 지금 보증제 하는 사람의 아버지 될 겁니다.
- 네.
- 거기가서 인쇄소를 하려면 제판을 하려면 이걸 좀 하라고 그래요. 가서 그걸 해보려는데,
몸에 기름 투성이고 이거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또 거기서 그만 두고 나왔죠.
- 인당포에서 도장을 새기다가 인쇄소에 이제.
- 네.
- 하하.
- 그렇게 돼요. 그래가지고 할 수 없죠. 36무식도 본지가 없으면 도리가 없는데, 측량을 전
에 공부한 게 사실이거든.
- 네.
- 그래서 가목고, 이휘재, 이봉집이 측량을 하는데, 김상돈이라고 하는 이가 거기가서 그럼
측량을 해보자.
- 네.
- 그 토지조사하고 기사하던 사람이에요.
- 네.
- 그래서 내가 측량을 좀 배운게 있으니, 날 좀 같이 가서 하게 해달라고.
- 네.
- 그래서 같이 갔어요. 억지로. 근데 가서 측량을 하는데, 내가 제도를 잘하니까.
- 네.
- 나가서 칠판 들고, 보호대 들고 측량하는 걸 안시키고, 집에서 앉아서 날 더라 제도만 하
라고 그래요.
- 네.
- 그 때에도 사람이 이렇게 보니까, 백작도라고 매화를 그리고, 까치를 백발로 그렸는지 백
작도를 그렸는데, 그림이 좋아진 말이에요.
- 네.
- 저녁에는 진종일 그걸 그려보죠.
- 네.
- 아, 대단히 잘 그린다고 주인이 이휘재인데, 그 일본집 주인이. 그 이휘재 아버지가 나보
다 일곱살이 더 위인데, 아, 이걸 잘 그린다고, 언제 그림을 배웠느냐고 아주 잘 그린다고
그래요. 그 이상스런 풍화도 같은 것도 그려달라고 그러고, 그려주면 좋다고 나 그 때 아주
좋았어요.
- 네.
- 그 때는 반찬도 다른 사람보다 낫게 해주고, 그래서 그 집에서 한 겨울은 지냈죠.
- 네.
- 지낸 뒤에 나중에 그 사람들이 거의 사람이 강원도로 내려가요.
- 네.
- 측량을 하러.
- 네.
- 강원도로 쫒아 내려간 일이 있어요.
- 네.
- 철원으로. 근데, 그 철원 가 있는 동안에 정미소를 하는 한영관이라는 사람과 여러사람과
교우를 하는데, 색주가를 가게 됐는데, 내가 소리를 잘 합니다.
- 네.
- 네.
- 소리를 잘하세요?
- 네. 이적소리 같은거 이런 소리, 제가 목소리가 좋아서
- 네.
- 그걸 잘한다고 그래요.
- 네.
- 잘해요. 그래서 색주가 집에가서 노는데, 뭔 아이가 뭐 열 아홉살 아닙니까.
- 그렇죠.
- 거 어리고 하니까. 소리 잘하니까, 여자들이 좋아한단 말이에요.
- 네.
- 거기서는 깜박 잘 못하다가는 헌병 보조원 계집인데, 잘 못하다가는 거기서 큰일 날거 같
지요.
- 네.
- 그래서 거기서는 이상스런 일을 계속 당하게 되겠고, 그래서 도망해서 왔어요. 서울로.
- 네.
- 도망해 올라와 가지고는 그 때, 비로소 시골을 내려가서 뭐든지 팔고, 집을 팔고 그러니,
그 때 70원이죠?
- 네.
- 70원을 만들어 가지고 올라왔는데, 조부모 모시고.
- 네.
- 내가 내 내자 되는 사람은 친정에 가서 있고.
- 네. 이미 결혼을 하셨군요.
- 열 다섯살에.
- 아, 열 다섯살에. 그 어릴적에 겪었던 일을 오늘 해주셨습니다만 지금 여든이시면서 요즘
에도 작품 활동을 많이 하시죠?
- 네. 요즘 합니다. 매일.
- 네. 최근에 일반 독자들이 안 것은 동아일보, 그 신동아에 표지.
- 네.
- 미인도를 해주셔서 아마 그 그림을 여럿이 보셨기 때문에, 이당 선생에 대해서 앞으로 여
러가지 얘기 관심을 많이 가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은 어린시절 얘기를 해주셨는데요.
- 네.
- 내일 부터 그 다음 얘기를 쭈욱 계속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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