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 사람에게 듣는다. 축구인 김성간씨로 부터 한국 축구사에 얽힌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보는 이 사람
에게 듣는다. 이 시간 대담에 이규영 아나운서 입니다.
- 일본에 저, 스카우팅식으로 해서 한 댓 사람이 일본에 간 얘기를 어제 해주셨죠?
- 네.
- 일본에서는 한 1년 쯤? 계신 셈인가요?
- 그 때가..제가.
- 저 대학.
- 대학에 갔을 때지요.
- 네.
- 일본에 가선 여러사람이 간게 아니고, 저 혼자 갔습니다. 하여간 전문학교는 졸업을 해야겠다.
- 네.
- 그동안에 기회를 놓쳤고. 일본가서 중앙대학에 들어갔는데, 중앙대학이 입학하기는 쉽지만은.
- 네.
- 다니기 참 어려운 데에요. 파리 솔로몬 대학 같아서 입학하기는 쉽지만은 좀 시험이고.
- 네.
- 또 강의하는 것도 출석하는 것이 없어요. 출석도 없고, 마이크 놓고 강의하고, 그런데 도저히
그 우리 역량으로서는 따라가기가 좀 어렵겠고.
- 네.
- 또 학비 문제도 있고. 그래서 그 때 마침 평양축구단에서 경평전을 할 때, 평양축구단은 그 전
해에 평양축구단을 창립했어요.
- 네.
- 종래에는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해서 실업팀으로 해서 경평제를 해오던 것을 이렇게 할 것이 아
니고, 양 축구단이 창립을 해서 정기적 대항전으로 쌍방해서 소통해가지고 하자.
- 네.
- 그래가지고 32년도에 평양축구단이 창립이 됐어요.
- 네.
- 평양축구단 창립에 제가 창단멤버 입니다.
- 네.
- 그리고 서울에서 경평전을 했기 때문에, 절 오라고 전보를 치더만요.
- 네.
- 그래서 또 그 제가 평양축구단에 창단 멤버요. 또 단원의 일원으로서 또 위에서 오라는데 안 갈
수 없고 해서 서울에 왔죠.
- 네.
- 그런데, 가는 날이 마침 경평전 하는 날이에요.
- 네.
- 네. 그래서 서울역에 내려서 가니까. 배재고등학교에서 했는데, 가니까 전반전이 시작하고 있어요.
- 네.
- 후반에 들어가서 했습니다.
- 네. 하하 아주 벼락치기 군요.
- 네. 별반 연습도 없는데, 내가 연습도 없는데 제대로 나가 하겠느냐고, 또 오래간만에 만나기도
했으니까.
- 네.
- 김성간이가 해야 다른 사람도 사기가 오른다고.
- 네.
- 그래서 그 게임을 했지요.
- 다행히 이겼습니다만 끝. 게임이 끝난 다음에 천진원정을 조선축구단에서 처음 가기로 했어요,
그 때.
- 네.
- 경평전 선수를 선발해서 뽑아서, 천진원정을 하기로 했는데, 거기에 대상으로 제가 한 사람이
됐어요.
- 네. 천진 원정은 한 서너차례 계속 된 모양이죠?
- 네. 그 후에 평양 축구단에서 세차례 갔지요.
- 네.
- 그건 그 후고, 그 전해에 조선축구단에서 그 가는데, 그 때에는 해외원정이라는 것은 극히 가기
어려울 때에요.
- 네.
- 우리가 상산 원정이나, 동경원정이나 그 것 밖에 없었지. 원정이 없었습니다.
- 네.
- 외국에 간다는 것은 극히 어려울 때지요.
- 네.
- 그래서 왠만한 사람같으면은 거기 다 움직여서 갈수 있죠. 그렇지만 저는 그동안에 축구인 생활
도 오래 했고, 이 기회는 앞으로 다시없는 기회인줄 알고, 그러면 다시 매니저님께 다시 안가기로
결심을 하고 그 천진원정을 그 자리서..
- 네.
- 그래서 그게 제 일생에 좌우되는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 네. 그 천진원정을 포기하시고 연전에 들어가시게 됐고.
- 네. 연전으로서는 그렇지요. 그 때 이영민씨 시대의 전성시대가 지나간 다음에.
- 네.
- 보성전문에는 김영경씨, 강교식, 김영식 이렇게 쟁쟁한 멤버들이 있었고.
- 네.
- 연희 전문학교에는 그 때는 신촌에 있을 때에요.
- 네.
- 어떻게 되는지, 연전 축구를 재건해야 되겠다. 저기 중앙일보에 이영선씨.
- 네.
- 현정수씨. 이런 분들이 우리 팀을 잘하기 위해서 연전에 스카우팅해야 되겠다.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거 같아요.
- 네.
- 또 저로서는 좋은 기회이고.
- 네.
- 그래서 제가 들어가서 재건한 셈이지요.
- 네.
- 한 3년동안 열심히 했고. 전성기를 이룬 셈이었고요.
- 네.
- 또 제가 나온 다음엔 역시 굴곡이 있기 마련인데요.
- 네.
- 좀 쇠퇴하고, 또 그렇게 굴곡이 있어요.
- 네. 하하. 그러니까 연전에 들어가시면서 또 연보전이 굉장히 성행했지요.
- 그렇죠. 네. 그건 축구로 하는 얘기로 하겠습니다.
- 네. 하하. 그러니까 연전을 마치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 연전을 마친 다음에 그 때엔 축구선수가 전문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 네.
- 취직하기가 가장 어려울 때입니다.
- 지금하곤 좀 다르죠?
- 아, 사정이 다르죠. 최근에는.
- 네.
- 문과 출신은 사립학교 선생. 극히 전문학교 출신가운데, 뭐 취직이 아주 어려울 때에요.
- 네.
- 그 때, 하루는 유학겸 학감이죠. 선생님이 절 불러요. 취직을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뭐 할 수
없이 평양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러면, 성덕고등보통학교에 거기가서 축구좀 지도하라고.
- 네. 개성입니까?
- 네. 개성이죠.
- 네.
- 그래서 제가 성덕고등보통학교에 가서 한 1년동안 축구. 말하자면 체육선생이죠.
- 네.
- 그만한 취직이면, 그 당시에는 참 어려울 때죠.
- 네.
- 또, 다른데 비해서 봉급도 많았고요. 한 1년 했습니다.
- 네.
- 그리고 서울로 와서, 차차 얘기 하겠습니다만 제가 운동선을 좀 경영을 했어요.
- 네. 운동선.
- 지금까지 내내 그걸 경영했죠.
- 운동고 생활이죠?
- 축구선수 생활 하면서
- 네.
- 네. 그 다음으로서는 일반인이죠. 일반팀에 연전이나 보전이나 그 때에는 김영식씨도 졸업했고,
저도 졸업하고, 같이 졸업했으니까요.
- 네.
- 그 후에는 팀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 다음부터는 전 일반 선수권 대회, 전전 일반 선수권대회,
또는 일본가서 일본 사람들과 결전을 하는 대회가 일년에 두 번 있습니다.
- 네.
- 팀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재학생만 가지고는 힘이 좀 약하니까. 일반팀으로 출전하기 위해서 졸
업생을 포함해서.
- 네.
- 전연전, 연보전, 이렇게 팀을 해가지고 그 대항을 했지요.
- 네.
- 그래서 보성도 여러번 갔고, 일본도 여러번 갔고, 그랬습니다.
- 지금도 OB팀이 출전하는 게 있습니다만 아마 그 당시도..
- 그 당시도 하던 사람들이죠.
- 네. 그러면서도 3개도시 대항전이라던지, 이런것이 이제.
- 그것은 또. 뒤가.
- 그런것은 뒤가 되나요?
- 3개 대항전이라는 것은요.
- 네.
- 일본서 관동, 관서.
- 네.
- 조선을 합해서 3지역으로 해가지고, 시즌 오프가 된 다음에 빅 게임으로 총 결산하는 게임인데.
- 네.
- 관동에서는 동경을 중심으로 해서 선발해서 최고팀을 만들고.
- 네.
- 관서에선 광성을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최강팀을 만들고. 또 조선은 한개팀을 만들어서 흔히 말하
자면은 조선대표라는게 그 때부터 생긴것이죠.
- 그리고 국내에서도.
- 국내에서 3지역은 예선을 하기 위해서
- 네.
- 평양, 서울. 또..
- 함흥이 들어갑니까? 하하.
- 네. 함흥이 들어가죠. 그 때는 함흥서 축구단이 신설됐어요.
- 네.
- 함흥 축구단이. 한 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셌지요.
- 네.
- 그 후에는 이제 무슨 도시대항전의 참가팀이 느는 것 같은데요.
- 도시대항전이라는 건요.
- 네.
- 그 당시에는 조금 A 클래스에 조금 못된다고 볼 수 있죠.
- 네.
- 그 때는 왜 도시대항전이 어느때 시작이 되었는고 하니, 봄에요.
- 네.
- 그 4월달, 5월 달인데, 그 때 그 평양축구단은 천진원정 갈 때.
- 네.
- 이렇기 때문에 평양같은 경우는 2진이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 네.
- 네. 또 도시 대항전이라고 하는 것은 각 지방에서 오는거니까. 팀의 수준이 조금 보편적으로
조금 낮다고 볼 수있죠. 그렇게 해야 흥미가 있고, 그렇지. 한 팀만 강하고 세다면은 그만큼 서
울에 사는 사람도, 자기 고향 팀으로 출전하고 그러니까. 분산이 되니까 조금 약하다고 볼 수있죠.
- 네. 그 일본. 그 일본전을 합쳐서 일본에서 3개도시 대항을 하는 걸로는 우리 한국팀이 강한 셈
이 었었죠?
- 아, 그때는 일본 사람도 좀 과연 그 때에 한국팀이. 조선팀이죠.
- 네.
- 젤 셌다고 그러죠. 제 1회 3지역 대항전 할 때에는 우리 조선으로서는 제일 강한 팀이에요. 그
때가.
- 네.
- 누구나 생각하지만, 관동을 3대 0, 3대 1. 다 이겼고, 두 번 다 이겼죠.
- 네.
- 근데 그게 다 없어졌습니다.
- 그럼 김성간씨 께서 이제 1927년경 부터 이제 축구를 시작하셔서 은퇴하실 적에가 서른 세살.
- 네. 그게 43년경 까지. 선수생활 했고요.
- 네.
- 그 다음에 전쟁말로 해서 전부 구기는 전부 중지되지 않았어요?
- 네.
- 못하고, 해방이 되면서.
- 네.
- 한 1년동안 했죠. 그리고 은퇴했습니다.
- 1946년 경에 은퇴를 하시면서 선수생활 하시면서 가장 그래도 활약을 많이 했다는 시기라면 언제
를 잡으실 수 있나요.
- 그것은 연희전문학교. 학원 스포츠로는 연희전문학교 재학시 하고요.
- 네.
- 그 다음은 나와서. 제가 전일본 대표로서 선발을 한 서너차례 했죠.
- 네.
- 또 한번은 만주국 뭐. 말하자면 일본이 괴뢰지요.
- 네.
-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대회를 심중에서 했습니다.
- 네.
- 그 때에 일본 대표로 나간 적이 있고. 그 다음해에 또 동아대회라고 해서 또 그 때에 일본이
전쟁중이었죠. 그 때.
- 네.
- 권한이 있는 팀, 나라. 이런 팀을 모아서 대회를 동아대회라는 것을 한 적이 있어요.
- 네.
- 그 때 한번 했죠.
- 네.
- 그리고 1940년도. 베를린 올림픽 이후에 일본에서, 동경에서 개최하기를 그걸 계승을 맡아가지고
준비하다가 전쟁 때문에 못했습니다.
- 네.
- 연습 도중에 해산했죠.
- 네. 그러면은 그 당시에 일본이 우리나라까지 합쳐서 일본이라고 그랬으니까요.
- 네.
- 뭐 그렇기 하지만은 일본 본토까지 원정간다던지, 해외원정은 통틀어서 몇 번.
- 그 때는 이제 봄과 가을에.
- 네.
- 봄에는 전 일본 선수권 대회라는게 베를린 올림픽 대회를 선발하기 위해서 제 1회 일본 선수권
대회를 만들었죠.
- 네.
- 그 때부터, 그게 한번 있고요. 봄에요.
- 네.
- 가을에는 그 명치신궁대가 있었어요.
- 네.
- 말하자면 일본의 국치죠. 지금 우리나라 국치와 같이.
- 네.
- 그게 제일 빅 게임입니다. 그 두 가지가 있었고. 또 저와 같은 경우에는 전 일본팀을 말하자면
일본 대표팀을 편성하기 위해서.
- 네.
- 여름과 겨울에 합숙훈련이 있어요.
- 네.
- 그러니까 일 년에 한 두번 정도는 몇 일동안은 합숙훈련에 늘 참가를 했으니까. 일본에 왕래하는
도수는 한 세번 네번.
- 아주 잦았군요.
- 네. 잦았습니다.
- 네. 그동안에 국민학교 시절부터 대충 얘기를 해주셨습니다만은 내일 부터는 어린시절 축구 배울
때 얘기 부터 좀 자세하게 얘기를 끌고 가기로 하겠습니다.
- 네.
(음악)
축구인 김성간씨와 이규영 아나운서와의 대담으로 한국축구사를 정리해보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내일 이시간에 계속 되겠습니다.
(입력일 : 200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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