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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이사람에게 듣는다
축구인 김성간 - 제2회 학창시절이야기
축구인 김성간
제2회 학창시절이야기
1972.10.24 방송
‘이 사람에게 듣는다’는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음악)

이 사람에게 듣는다.

축구인 김성간씨로 부터 한국축구사에 얽힌 여러가지를 들어보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이시간 대담에 이규영 아나운서입니다.


- 김성간씨께서 이제 선수 은퇴하신지도 거의 30년이고, 제가 운동장에서 뛰는 것을 못 본게 유감스럽습니

다만 센터 포워드를 보셨다죠?

- 네. 주로 센터 포워드를 많이 보고요.

- 네.

- 제가 윙을 봤는데요. 그건 제가 일본대표로 다닐때에 일본 사람들이 내가 좀 다른 일본 사람보다 체력

이.. 스피드가 나은것 같은데요.

- 네.

- 같이 해봐서 잘 뛰거든, 맨 뒤에서 뛰어도 맨 앞으로 나오곤 했어요. 윙을 시키는게 좋겠다.

- 네.

- 또 센터 포워드 할 사람은 하나 또 있어요. 그때 제가 윙을 보기 시작해서 또 센터 포워드라는 것은 또

중요하죠.

- 네.

- 중요한데, 또 새로 나오는 사람. 키우는 사람. 이런 분한테 넘기고, 소임을 좀 은퇴기가 가까워서는 윙

을 봤어요.

- 네. 좀 축구를 아는 사람들 얘긴 김성간 선수하면은 그 악착같이 뛰는 아마 그런 선수란 얘기를 하더군요.

- 글쎄요. 하하하하. 아마 그런편에.. 아마 여러가지 스타일이 있지요.

- 네.

- 근데, 좀 속력이 있고.

- 네.

- 좀 주력이 있는 플레이를 좀 했다고 과언이 아닐 거 같아요.

- 네. 어제는 그 중학교. 숭실중학으로 옮기는 얘기를 해서 시간이 다되었습니다만 광성중학에서 어떻게

숭실중학으로 어떻게 옮기게 됐습니까.

- 제가 거기에 대한 이유는 숭실중학이 그 전해에 일본 전 선수권대회에 가서 여지없이 이겼어요. 숭실중

학이.

- 네.

- 뭐 굉장한 차이로 이겼습니다. 숭실중학이 그 해 일본의 참 유명한 중학을 많이 일방적으로 이겼고, 과

연 숭실축구를 하려면은 숭실에 가야 하지 않느냐 이럴정도로 저보고 코치선생이나 뭐 여러가지 좀 맹렬히

뒷받침이 됐고.

- 네.

- 동경을 했죠. 그러나 또 저희가 평양에 살았지만은 저희집에서 다소 사업적으로랄지 실패를 하고 낙향

했어요.

- 네.

- 그래서 한 반년동안 제가 하숙을 했습니다.

- 네.

- 또 그렇고, 숭실학교 그 사대윤 선생은 또 친척이에요. 사돈이죠. 뭐 그런 관계도 있고, 자꾸 유인을

하더만요.

- 네.

- 우리 학교에 오면은 여러가지 기숙사도 있고, 또 그 학교같은 것은 문제 없지 않느냐.

- 네.

- 그래서 어떻게 해서 숭실학교로 갔습니다.

- 네.

- 그리고 그 숭실학교는요. 다른.. 고학제도가 있어요.

- 네.

- 미국식이 되나서요. 학비가 없는 사람에게는 일을 줍니다.

- 네.

- 무조건 학비를 면제해주고, 축구선수라고 해서 이렇지 하지 않고, 방법을 그렇게 하지요.

- 네.

- 이 학부에 방과후에 일을 시켜요.

- 네.

- 일을 시키면 거기 기숙사비가 그 때 7~8원 밖에 안했어요.

- 네.

- 또 하루에 한 10전 주지요. 한 시간에. 세 시간을 계산해서 주면은 8~9원 10원 안팎으로 기숙사비,

학비도 나올수 있는 거죠.

- 벌어서 공부할수 있게 했군요.

- 네네.

- 숭실로 옮기면서도 선수가

- 했죠. 제가 광성에서 한 것은 기초라고 할 수있고, 숭실에 와서 한 것은 완전한 축구선수가 숭실에서

되었다고 할 수있죠.

- 그 당시 신장 같은 것은.

- 신장은 제가 크지 않았어요.

- 네.

- 제가 키가 좀 적고, 좀 최소하고.

- 네.

- 뭐 왜 그렇게 느리냐.

- 네.

- 왜 그렇게 볼을 빨리 뜨냐, 공은 잘 찼습니다. 그 때도 제가 사이즈를 좀 짧게 잡아도요, 근데 그 킥

하는거.

- 네.

- 공을 참 잘 맞추고 차는 데에는 남보다 기술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체격이 적고, 그렇게 파이팅이 없냐.

- 네.

- 왜 뜨냐. 그 숭실 거기서 맹렬히 거기에 대해서 코치를 받았어요.

- 네.

- 한 일년동안에요. 그것만 했습니다.

- 하면 되는거죠.

- 물론이죠. 하하하.

- 한 일년동안에 말썽에 가까웠던 선수가 중진이 될만큼 그 기술적인 향상이 1~2년에 됩니다.

- 그만큼 노력을 많이 하셨으니까.

- 노력을 했죠.

- 네.

- 그 아침 연습을 하고, 또 그렇게 하려면요. 수업시간에 들어가선 졸려서 못 견뎌요.

- 그렇죠.

- 그래도 수업시간은 꼭꼭 들어갑니다.

- 네. 그러면 숭실중학으로 옮기시면서 이제 대회. 대전도 많이 하셨겠습니다.

- 숭실중학에 옮겨서 처음 그 봄에 관서체육회에서 했는데, 그 때 김영식씨를 처음 만났죠.

- 네.

- 김영식씨는 경신 중학교. 경신이 굉장히 셌습니다.

- 네.

- 경신이 보성전문을 4대0으로 이길 정도로.

- 네.

- 선수권 대회. 경신이 최고로 센 팀이 됐어요.

- 네.

- 평양에는 숭실. 숭실. 그 전년도만 해도 일본가서 패권을 하고 이러는 팀이니까. 숭실과 경신을 이건

언제나 숙적이에요.

- 네.

- 또 학교 분위기도 어떻는가 하니, 숭실에는 선교사 매킨리씨가 교장이시고, 또 경신학교 교장선생은

쿤스라고 서양사람이지요.

- 네.

- 근데 같은 선교사이면서도 자기네가 운영하는 학교가 잘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서 또 그 경쟁이

심해요.

- 네.

- 또 우리 숭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경신을 이겨야되겠다 하고, 경신에서는 또 숭실을 이겨야 하고, 그

평양에서 했는데, 참 접전을 했죠.

- 그 경신은 황해도 신천에 있는거죠?

- 아니죠. 서울 이죠.

- 네. 서울 경신. 네네.

- 이화동인가.

- 경신하고 하면 어떻습니까.

- 그 때에는 으레이 경신이 이길줄 알았는데.

- 네.

- 경신이 2대 0으로 숭실한테 패했어요.

- 네.

- 그 때 저는 처음 서울에 대회를 첫 출전해보고.

- 네.

- 그 때 평양서는 처음이죠. 중학생으로서 큰게임에 나간건 처음인데, 참 게임을 앞두고요 잠이 안와요.

- 네.

- 통 잠을 못 잤습니다.

- 네.

- 그리고 처음에 들어가서 볼 가는데 다 따라 다녔지요.

- 네. 하하.

- 그러니 뭐 그렇게 하겠어요.

- 피곤하고.

- 네. 그 땐 그만큼 처음에는 좀 서툴게 했어요.

- 그 때부터 포워드였습니까.

- 네. 포워드했지요. 그 때도 센터포워드를 했지요. 숭실서 센터 포워드를 시작했지요.

- 네.

- 그런데 2대 0으로 저희 숭실이 이겼습니다.

- 네. 그 당시 김영식 선수는 활약상이 어땠습니까.

- 아. 뭐 대단하죠.

- 네.

- 김영식 선수는 그 때부터 시작이니까.

- 네.

- 거기에 제일 스타 플레이어가 경신에서 김영식, 채금성, 채성산, 그 때 그 음악가 이신 누군가. 김성

태씨.

- 네.

- 김성태씨가 라이트를 보긴했지요.

- 네.

- 아주 유명한 선수 입니다.

- 네. 그리고 그러고 보니까 김영식 선수의 고향이 황해도 신천이군요.

- 신천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 네. 그러면 숭실중학에서 서울 원정도 오셨나요?

- 그럼요. 그 대회 가을에 왔어요.

- 네.

- 우리가 가을에 와서 그 때는 경신이 약화가 됐습니다.

- 네.

- 숭실은 그 봄과 가을 사이에 굉장히 또 성장을 했고.

- 네.

- 경신은 그 팀은 셌는데, 평양가서 실패를 봤지요. 가을 때에는 팀이 약화가 됐어요.

- 네.

- 약화됐는데, 숭실이 1대 0으로 졌어요.

- 네.

- 어떻게 심판을 서병일 심판이 봤는데, 그 분은 유명한 분입니다. 런던 캠브리지 대학 나오고, 참 그의

심판은 그 사람이 법이에요. 그 사람이 호각 불면 그대로 해야지, 뭐 조금이라도 반항이라던지 심판의

그 사람의 개인의 인격에 눌리어서 감히 말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가 억울한 패널티를 당했어요.

- 네.

- 그 패널티로 졌지요.

- 네. 그 후에 어떻게 일본으로 중학을 옮기신 것은.

- 네. 그 후에 2년 있었지요. 2년 있고. 졸업을 한 1년 반 정도 대학도, 어떻게 그 일본서 참으로 축구

선수를 스카우팅 하는데가 있었어요.

- 네.

- 그리고 좀 더 무대가 큰 여러 사람하고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 네.

- 그래서 거기 간 적이 있죠. 거기 몇 사람 갔습니다.

- 네. 그 당시 몇 살때 이십니까.

- 그게 스무살 전이죠.

- 네. 그 때는 체격도.

- 아, 그 때도 체격은 적을 때에요. 적지만은 그러나 보통 체격은 되지요.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전

크다고 생각안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크다고 그러죠.

- 지금 신장이 어떻게 되십니까?

- 제가 5척8촌쯤 되니까요.

- 네.

- 그 당시로 봐서는 그냥 사람들이 보면은 체중있고.

- 큰 편이죠.

- 예. 날 보고 다들 거인이다 그러죠. 체중이 지금 2~3배니까.

- 네.

- 중량이 있고, 속력이 있고 하니까 조금 중량이 가벼운 사람보다는 다르죠.

- 네.

- 중량이 무거우니까 속력이 있다.

- 일본은 어느 중학으로.

- 네. 보문중학에서요. 그 때의 그 흠문중학에 조선인 축구팀이 있고, 그 조그만 도시안에 또 다른학교의

축구팀이 또 있었어요.

- 네.

- 네. 그 팀에서 서로 라이벌이 돼서, 대회가서 조선사람끼리 팀이 서로 대등하고 그랬는데, 흠문중학팀이

조금 약세였었어요.

- 네.

- 그래서 좀 원점. 도와달라. 그래서 우리 몇 사람이 거기가서, 그 때 생각은 그렇죠. 우리 조선사람들이

가서 있는데, 그 팀이 세고 그래야 대우를 받고, 또 앞으로도 후배가 할 수있지, 게임을 지면 박대를 받지

않느냐.

- 네.

- 그래서 우리 몇 사람이 가서, 하여간 그 때에 그 명치신궁대에 예선을 했는데요.

- 네.

- 일반팀이죠. 이성구락부라고 셉니다.

- 네.

- 관동에 있는 팀인데, 그 팀을 이겼어요. 중학생이.

- 네.

- 우리가 가서 그 팀을 이겼어요. 놀랠만한 일이죠. 그리고 동경가서 명치신궁대에 1931년도에요. 송화

7년이니까.

- 네.

- 그 때는 저희들은 다 스무살이 안되죠. 가서, 동덕 동대 체육대학이죠.

- 네.

- 그 팀이 제일 셌어요. 그건 동경 그 근방 대표고.

- 네.

- 우리는 관서지방 대표고, 그래서 결승에 올라가서 비록 지긴했지만은 지금 한 스무살 전후의 학생들

하고, 일반 대학 선수권을 가진 팀하고 상대가 잘 안되는거죠.

- 네. 하하.

- 게임에 있어서는 그렇게 우리가 대등한 게임을 하고 지긴 졌습니다. 좀 굉장한 게임을 했지요.

- 네. 일본에 몇 년 계시다가.

- 아니요. 그 후 졸업하고요.

- 네.

- 그 다음은 한국 나와서

- 네.

- 제가 숭실 전문학교에 들어갔어요.

- 네.

- 숭실 전문학교에서 한 1년 채 못다녔죠.

- 네.

- 그래서 일본갔어요.

- 네.

- 동경가서 중앙대학에 좀 적을 두었다가서 평양축구단에서 경통전을 한다고 자꾸 오라고 전보를 치더군요.

- 네.

- 그래서 서울로 왔죠.

- 네. 하하하.

- 서울로 와서..

- 그 뒷 얘기는 내일 듣겠습니다.

(음악)

축구인 김성간씨와 이규영 아나운서의 대담으로 한국축구사를 정리해 보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내일 이시간에 계속 되겠습니다.

(입력일 : 200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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