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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이사람에게 듣는다
축구인 김성간 - 제1회 축구선수가 된 사연
축구인 김성간
제1회 축구선수가 된 사연
1972.10.23 방송
‘이 사람에게 듣는다’는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음악)

이 사람에게 듣는다.

오늘 부터 이시간에는 축구인 김성간씨를 모시고 그의 선수 생활을 중심으로 한국 축구사에 얽

힌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대담에는 이규영 아나운서 입니다.


- 축구인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만 자신이 생각할 땐 지금 축구인이라고 할 땐 어떻습니까?

- 글쎄요. 제가 서른.. 축구선수로 다닐 때가 벌써 엊그제 같은데요.

- 네.

- 벌써.. 나이도 이렇게 된지 좀 엊그제 같습니다.

- 은퇴하신지가 한 20여년..

- 네. 그렇죠. 제가 근 한 30년 되죠.

- 네.

- 선수 생활 굉장히 오래하신 셈이죠?

- 네. 근 20년 했습니다.

- 네.

- 또 심판도 한 10년 봤죠.

- 선수 생활 20여년, 심판 한 10여년 그 후에 축구협회일을 쭉 보시고, 거의 평생을 축구..

축구와 함께 지내오신 셈입니다.

- 그렇기 해봤기 때문에 잃은 것도 얻은 것도 많습니다.

- 네. 그게 김성간씨가 축구하신 것은 지금 부터 몇 년 전쯤 되겠습니까?

- 제가 국민학교.. 그땐 소학교라고 그랬죠.

- 네.

- 소학교 들어가면서 부터 2학년 때부터 공이라는 걸 처음 차보기 시작했습니다.

- 네. 연세가 좀 지긋하신 분들은 이 연전에 김성간씨 그리고 보성 전문이죠?

- 네.

- 김영식 선수 아마 쌍벽으로다가 생각을 하셨겠죠?

- 그건 그 시대에는 그랬지만 저희들은 선배가 또 있죠.

- 네.

- 아마 연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영씨, 김영길씨.

- 네.

- 또 그 시대였고요. 그 때에는 또 보성 전문에는 임광옥씨, 김원경씨 전성시기 였습니다.

- 네. 초창기죠.

- 네.

- 그 다음부터 아마 김영식씨와 저. 그 시대가 또 ..

- 네. 김성간, 김영식 그 얘기 하기 전에 좀 유명한 선수를 꼽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네. 그 전 말씀이시죠?

- 네.

- 마침, 김영길씨, 임광옥씨, 또 김원경씨, 뭐 여러사람 있어요. 그 시대 때, 잘 기억이 안납니

다만은 그 당시에 축구열기가 왕성했죠.

- 네. 김성간씨 이제 환갑이 가까우신 모양이죠?

- 글쎄요. 벌써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 내년이..

- 내년 입니다.

- 네. 그러니까 보통학교 때 부터 이제 축구에 취미를 가지신거죠?

- 네. 저는 저희 집이 교회 집안이기 때문에요. 장대현 교회를 다녔어요. 그래서.

- 고향은 평양..

- 네. 고향은 평양이고요. 제가 평양 태생이죠. 저희 아버지께서 고향은 우리 아버님 원 고향은

평원군 원유면 해서면이라는 곳인데요.

- 네.

- 우리 아버님 시대때에 평양으로 나와서 저의 형님이 두분 계시고, 누님은 한 분 계시는데, 제

가 제일 막내입니다.

- 네.

- 저 만은 평양와서 평양태생이죠. 저희가 평양 와서 살기를 석은동에 살았고, 또 수인동, 산등

이 교회가 가까워요.

- 네.

- 어렸을 적엔 거기 다녔죠. 거기 다니다가 그 때는 좀 배일 사상이었기 때문에 공립학교를 안보

내고 사립학교.. 교회측에서요.

- 네.

- 부모님들이 사립학교를 보내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순덕학교라고, 장대현 교회 옆에 장로교

계통의 학교죠. 한 3년 다니다가서 또 공립학교로 제가 갔습니다.

- 네.

- 그 순덕학교가서 축구를 셌죠.

- 네.

- 그 때 순덕학교는 축구로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 네. 학교를 몇 번 옮기셨군요?

- 네. 몇 번 옮겼습니다. 저 소학교 뿐만 아니라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 하하하. 그러면 제일 먼저 축구 배우신 것이 몇 년도가 되겠습니까? 1900...

- 제가 1920년도 경에 들어갔으니까요.

- 네.

- 제가 2학년 다닐 때, 그 땐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저희 집이 주단 파목상을 하기 때문에

- 네.

- 재봉침이 있고, 그 때는 핫팬츠를 하나 만들어 줘요.

- 네.

- 그걸 입고 학교 다니라고, 그 때는 바지 저고리 입고 다니는 사람도 많고, 교복이라는 것이

소청 교복이 처음 나오기 시작할 때인데, 그걸 입고 가니까 학교에 가니까, 축구 선수가 왔

다고..

- 네.

- 많은 학생들이 축구선수 대우를 해요.

- 네.

- 보통학교 2학년이지만, 그래서 그런 우스운 얘기도 있고, 우리 담임 선생이 김만영씨라고 옛날

숭실대학 축구선수였고요.

- 네.

- 조선일보사에 오래 계시던 분입니다. 작고 하셨습니다만 또 그분이 담임 선생이고, 그 분이

공을 차면 학교 넘어 가는 걸 주워다 주고, 또 차시오. 하고 따라다닌 기억이 있고요.

- 네.

- 또 그 분 동생 되시는 분은 예전에 경희대학에 음악대학 학장으로 계시다가서 지금 정년은퇴

하신 줄로 알고 있는데, 그 분도 숭실대학 축구선수였고, 유명한 축구선수였습니다. 그 때,

- 네.

- 또 교회에서도 찬양으로서 많이 활동도 하신 분이고, 퍽 동경하던 분이에요.

- 한 50년 전이 되겠군요.

- 그렇죠.

- 1920년 도에..

- 제가 아홉살에 들어갔으니까요.

- 네. 집에서 팬츠를 만들어 준 것이 아마 축구선수가 되기..

- 하하. 참 우스운 얘기지요.

- 네.

- 내가 주일학교 다닐 때요.

- 네.

- 우리 그 제가 장대현 교회 주일학교 잊어버리지도 않죠. 그 박애구 5반에 다녔는데, 그 우리

선생이 임현길씨라고 그 영피아이 영사단 영어단의 축구단이 유명한게 있었어요.

- 네.

- 그 분이 그 단에 감독이요. 감독이고, 그 젊어서는 쟁쟁하신 분이죠. 그 분이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이신데.

- 네.

- 늘 그 자기집에 불러서 저희 과자도 많이 주고, 퍽 그런 일도 많고 그랬는데, 우리 다니던 반

이 무엇에 운동을 해도 1등을 하고, 좌우간 교회행사에선 뭐 그런지 우월했어요. 그 때 담임 임현

길 선생께서 네가 공을 차고 싶으면 3원을 모아 오너라, 그럼 내가 3원을 보태서 공을 하나 사주마.

- 네.

- 그래서 그 때 우리가 품앗이 3원을 모아서 공을 처음 한번 사본 적이 있습니다.

- 5~6원 한 모양이죠?

- 5~6원 했어요.

- 네. 그 때 공이 지금 같이 좋지 않죠?

- 그 때 공은 요즘 공은 32쪽으로 만들죠?

- 네.

- 그 때는 12쪽 공도 아니에요. 그 전에 공의 양극에 동그란것을 붙여서 배꼽볼 이라고 불렀어요.

- 네.

- 그 공을 하나 사서 몇 달 찼죠.

- 네.

- 몇 달 찼는데, 그 뭐 이제 자동차포에 가서 바람을 팽팽이 넣을 수도 없고, 그저 입김 센 사람

이 바람을 넣어서 그저 급하니까.

- 하하.

- 그렇게 차던 기억이 있고요. 그 때 대개 가정에서는 운동선수 하는거 좋아 안했습니다.

- 네.

- 네. 스케이팅 하면 뭐 여름에는 수영한다. 뭐 그러면은 말해줍니다. 공부안하고 운동만 하면

망나니가 된다.

- 네.

- 부랑자가 된다 그래서 다 몰래 했죠.

- 지금도 그러는데..옛날엔 더 했겠죠.

- 지금은 뭐 극성스런 부모들도 많잖아요?

- 네. 그러시다가 중학은 일본으로 가셔서 다니셨다고..

- 네. 소학교에서 제가 3년을 다니고요.

- 네.

- 그리고 공립학교로 또 갔어요.

- 네.

- 그거는 제 친척 가운데 공립학교 근무하던 분이 있어서 공립학교 다녀 보겠다. 또 공립학교의

3학년에 또 갔습니다.

- 네.

- 그러니까 순덕학교에서는 배일 사상이 심해서 일본말을 다 국어라고 했어요. 공립학교에선 다

국어라고 했고요. 사립학교에선 일본어라고 했어요.

- 네.

- 네. 그러고 수업시간에도 전부 조선말로 했지 일본말 안썼습니다.

- 네.

- 그 3학년 때에 공립학교를 가니까 거긴 전부 일본말 쓰더만요.

- 네.

-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처음에 가니까 우리 그때는 근방이 심해서 타 학교에서는 우리

3학년이 세 반이었어요. 매일 야구 시합도 하고, 축구 시합도 하고 그랬어요. 연필 하나씩 대고.

- 네.

- 그저 매일 야구 시합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 네.

- 그리고 5학년 때에요. 처음 관서 체육회가 평양에서 처음 창립이 되서 그 해부터 그 전엔 기

독교 청년회에서 대회를 주최하고 했는데, 관서 체육회가 창립이 되면서 그 해 부터 관서 체육회

에서 주최로 축구대회를 열였죠.

- 네.

- 우리 공립학교에서는 그렇게 그런 대회를 출천하는 걸 금했어요. 나가지 않았는데, 그 때 있던

교장이 용단을 내려서 축구대회에 내 보내준다.

- 네.

- 그래서 5학년 때, 한 번 나갔고요. 5학년 때 두 번 나갔지요. 기독교 청년회 주최일 때, 한 번

나가고, 관서 체육회때 한 번 나가고.

- 네.

- 그 다음해 6학년 때에요. 그 때가서 운 좋게 우승을 했어요.

- 네.

- 네. 소학교 때 부터 그 운동을 그렇게 했으니까 또 그 때에는 소학교도 축구, 야구. 대개는

축구, 야구죠. 테니스도 있었지만, 야구대회도 제가 한 번 나가본 적이 있어요.

- 네.

- 진남포에서 선원 소학교 야구대회를 했는데, 그 때 나가서 결승에 나가서 우리가 졌습니다.

- 축구, 야구 아주 만능이셨네요.

- 그 때는 다 그래요. 어느 운동선수나 다 그렇지요. 하는 사람이 다 했어요.

- 네.

- 네. 또 육상경기라던지 뭐 다 축구선수 였어요.

- 네.

- 또 그저 축구, 야구 다른 경기는 거의 없고요.

- 네. 그리고 중학교는 우선 처음에는..

- 중학교는 제가 광성 중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 네.

- 광성 중학교 입학하고 첫 해에는 제가 그 때에는 정선수는 못되고.

- 네.

- 2학년 때, 2학년 때 서울에 처음 출전 해봤습니다.

- 네.

- 그 때에 서울 출전할 때도요. 그렇게 학교에서 돈이 없어요. 저희들이 다 돈을 모아서요.

- 네.

- 대개 3원, 5원 등을 내가지고

- 네.

- 차비를 내가지고 서울왔죠. 서울와서 우리가 처음에 대전한 게 배재중학하고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우리가 3대 0으로 이겼어요.

- 네.

- 그 때 저희 광성 중학교 선배 가운데 연희 전문학교 축구선수가 몇 분 계셔서 참석을 하셔서

잘한다고, 배재가 여기 상당히 센 팀인데.

- 네.

- 그 때 김화집씨가 거기 있었어요. 센 팀인데, 3대 0으로 이길 정도라면은 우리가 굉장히 잘

하는 팀이다.

- 네.

- 또 2회전에는 요. 그 때는 대회를 사흘 이내에 다 마쳤어요.

- 네.

-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두 게임 할 때도 있지요.

- 앞으로 그 당시에 축구대회 하던것은 다시 얘기가 되겠습니다만은

- 네.

- 광성 다니시다 숭실로 전학을 하셨어요?

- 네.

- 하하.

- 하하. 저 그 얘기 할까요? 지금.

- 하하. 아니, 숭실 전학 하셨다가 일본으로 중학을 다니셨고요.

- 네.

- 그 다음이 연전..

- 그 전에도 또 그렇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졸업은 연전에서 했습니다만은

- 네.

- 숭실 전문학교도 조금 다녔고요.

- 네. 그 얘기는 내일 계속 되겠습니다만 자제분이 지금.

- 네 지금 농구 선수지요. 지금 은퇴했습니다만은

- 김영일 선수요.

- 네.

- 네. 지금 앵커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 본래 운동하는 걸 그렇게 찬성을 안했습니다만은 그것도

차차 얘기를 하지요.

- 네.

- 유명한 축구선수 김성간씨의 그 또 아들 유명한 농구선수가 됐군요. 내일 계속 하겠습니다.

- 네.

(음악)

축구인 김성간씨로 부터 한국 축구사에 얽힌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보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대담에 이규영 아나운서 였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0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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