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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이사람에게 듣는다
이영술 - 제3회 중학교 시절 이야기
이영술
제3회 중학교 시절 이야기
1973.03.17 방송
‘이 사람에게 듣는다’는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사람에게 듣는다. 우리나라 양의학 반세기에 몸담아 온 이영술 박사의 회고담을 들어보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대담에는 이규영 아나운서 입니다.


이제 숭실 중학에 다니실 무렵에는 평양시가가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되겠습니다만..

그렇죠. 그때 시절로 말하면 우리나라 고대시절에 있던 가옥제도가 있던 그대죠.

네.

말하면 양옥이라면 학교, 숭실학교 밖에 없었고, 그리고 서양사람들이 사는 집 까지도 조선

재래식으로 집을 짓고, 다만 내부를 자기네 생활에 편리하게 해 놓은것 뿐이죠.

침대를 놓는 다는 지 그 정도요.?

그렇죠.

그리고 그외에 일반 건축물 이라던지 도시의 생김생김이라던지는 순전히 재래식으로 돼있었어요.

네. 전기는..?

그때 내가 처음에 평양으로 갈때는 전기도 없었습니다.

네.

그것도 그 이후에 생긴 것이죠.

네.

그러기 때문에 집집마다 석유등불을 켜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저녁에 공부를 할때에도 요새

모양으로 전기불이 있는게 아니고, 석유불을 켜 놓고서 공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었죠.

시내 교통수단은 어떻습니까?

교통수단은 물론 걸어야 되는거고, 어딜 가던지 걸어야 되는거에요. 다만 내가 평양 들어가

살면서 몇해 지나가지고 비로소 정거장까지 가는데 평양시 한 복판에서 정거장까지 가는게

상당히 거리가 멀어요. 아마 요새 우리나라 거리로 하면 한 거의 5리까지 되지요.

네.

그러니까 기차를 타러 다니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뭘 했느냐 하면 소위 밀차라는게 있었어요.

네.

밀차라는게 뭔고 하니, 전차모양으로 네루부를 깔고, 그 위에다가 이제 사람이 탈만한 걸 만들어 올려 놓고

다만 차가 굴러가는 것은 전기로 해서 이전모양으로 전기로 가는게 아니고, 사람이 그걸 밀었어요.

네.

말하자면 두 사람이 차가 하나 있을 거 같으면 사람을 한 열사람쯤 태운다면은 양쪽에서 서가지고

서는 그 차를 밀다가..

사람의 힘으로 밀다가..

사람의 힘으로 밀다가 속력을 내서 잘 나갈거 같으면, 밀던 사람이 슥 올라 앉습니다.

하하하 네.

그러면 제 힘에 올라 간단말입니다. 그러다가 속력이 떨어지면 다시 또 밀고, 이렇게 해서 이제 평양

구시가지요. 일본 사람들 있는데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들 있는데, 구시가지서 부터 정거장까지

다니는.. 왕복하는 그런 밀차라는게 처음 있었습니다.

네. 경의선이 1906년에야 개통이 됐다고 그러니까요.

네네.

차츰 기차도 다니고 그럴 무렵이었죠?

그렇죠.

그리고 숭실 중학을 마치시고 어떻게..

네. 숭실 중학 다닐 적에 한번 그 때 사회상에 한가지 기억해야 할게 있어요.

네.

나는 숭실 중학교를 다녔지만 해도, 그때 우리나라 선각자 되시는 분들이 우리가 일본 사람앞에

장차 침략을 받을 것이 분명하니까 침략을 받지 않으려면 우리가 깨어야 되겠다.

네.

말하면 우리가 개화해야 되겠다는 것이죠. 개화하는 수단이 뭐냐, 교육시켜야 되겠다 이거지요.

교육 시켜야 되겠다 해서 평양 근처에 학교가 상당히 많이 일어났습니다. 요새 학교에 비교하면

강습소 비슷한 것이라고 밖에 할수 없지만서도 그래도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시골에도 각 처에

학교들이 많이 생겼어요.

네.

그래가지고서는 평양에 뭐가 있었는가 하니, 아마 서울에도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어

데, 평양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각 처에 있는 학생들을 모아가지고서 대운동회를 했어요.

네.

대운동회를.. 큰 운동장에 다가 모아 놓고서는 한 이틀동안 여러가지 운동을 했어요. 말하면

경주도 하고, 뜀뛰기 하는.. 그래가지고 학생들의 체력을 겨루는 그것도 되지만해도 그러나

주최하는 사람들의 속 뜻은 뭔가하니, 정신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나라 위하는

또 우리가 얼마나 다른 나라에 비해서 뒤떨어 졌다는거 이 뒤떨어 진 것을 면하고, 다른 나라와

같이 살려면 우리도 공부해서 아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그래서 그것을 고충하기 위해서 각처에

있는 학생들을 모아가지고서 대운동회를 했어요.

네.

근데 그 때 이색이라고 할 만한게 뭐냐면, 각 학교의 나팔. 나팔부는 나팔수가 있었습니다.

네.

학생으로.. 그리고 북치는 사람이 있었고, 그러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올 때는

맨 앞에서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그 뒤로는 학생들이 따라서 운동장에 운집이 돼가지고 그래

가지고 한 이틀동안 이제 운동을 하고 또 유지들을 청해가지고 연설을 하고, 그래가지고 말하면

국민가운데 민족혼을 고취하고, 또 일반으로 하여금 우리가 배워야 살겠다는 그런 정신을 고취

시키기 위해서 평양에서 아주 일년에 한번씩 대운동회를 여는게 유행이었습니다.

네.

그게 하필, 거기에 모인 학생들만 그럴 뿐만 아니라, 재무, 과거에 없던 많은 학생들이 와서 경연

대회를 하고 그러니까 구경꾼이 수만명이 모여든단 말이에요.

네.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역시 정신적 고취를 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 저쪽 일본사람이 와서 정식으로 합병을 시키고 그래가지고 그걸 못하게 했지요.

네. 그러니까 1910년에 한일합병 될 무렵에 아마 15살이 되시고, 그러면서 숭실중학에 들어가시는

해가 될꺼 같은데..

그렇죠.

한일합병에 대해서 그때는 ...

어려서 말하자면 합병 되었다는 것은 물론 알았죠.

네.

그래가지고 나이 많은 이들은 나라가 망한다는 데에 대해서 참 비참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누가 감히 나서서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고 그런 연설을 한다던지 그런것을 할수 없었던 것이 사실

입니다.

네.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애기 아버지들도 있고 그렇죠?

그 때 그랬죠. 중학교는 뭐 내가 더러요. 그 중에 제일 나이 어린 사람이에요. 나 보다 훨씬 한

스물 댓, 한 삼십 살 된 사람도 중학교 와서 공부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네. 여학생들은 어떻게..

여학생들은 여학생대로 따로 있었지요. 평양에도 숭의여학교가 있고, 지금에도 숭의여학교라는게 있지요?

네.

그게 바로 평양에서는 여자들을 위해서 처음 생긴 학교입니다.

네.

숭의 여학교.

네.

여자들은 거기로 가서 공부하고, 남자들은 숭실학교에서 대게 공부를 하고 그랬어요.

네.

그리고 사립학교로 말하면 그 시절에 대성학교라고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그 유명한 학교지요.

그 학교와 불과 첫 돌을 세우는 것을 일본사람이 피해주기도 했고, 참 평양에서는 유명한 학교

입니다.

네.

대성학교가 중학교인데, 학생들의 연령이 자세한 평균은 내가 잘 모르지만서도 거기는 대개 다

이십 사오세 난 사람들 정도에서 삼십세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를 했어요.

네. 숭실중학 다니실 적에 운동 같은 것도 있었습니까?

있었죠. 예 중학교 때도 있었고, 대학시절엔 물론 있었고..

축구가 그 후에 생기게 된건 가요?

중학교때 축구가 있었습니다.

네.

나도 중학교 다닐 적에 축구를 했어요. 그 때 야구도 시작이 됐기만 해도 그러나 흔하지는 않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테니스, 테니스는 굳은 볼이 아니고 소위 소프트 볼. 그 일본 사람이 시작한 것

이지요. 그러나 우리 학생들 간에 테니스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네.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은 평양에 많이 와있었습니까?

그 때는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내가 처음 평양에 들어갈 때에는, 그 때 평양에 우리나라 사람 사는

데 하고 일본 사람 사는데가 아주 구역이 갈려 있었어요.

네.

평양은 구 시가라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이 있었고, 일본 사람은 그냥 2~3인에 불과 했고, 거기와서

장사하는 사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신 시가라고 저 남쪽으로 거기에 일본 사람들이 와서 차차차차

장사하기를 시작했죠.

네.

또 그리고 관리들. 그런 사람들도 전부 신 시가에서 살았어요.

그 밖에 외국인들은..

외국인들은 선교사 뿐이지요.

네.

선교사 말하자면 그 때 학교를 시작한, 숭실학교를 시작한 마핏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유고한 선교

사입니다. 마핏. 그 자제들이 지금 우리나라 있지요.

네.

장로교 신학교 교수로 있는 아들이 하나 있고, 또 대구에 병원, 대구 동산병원이라고 아주 상당히

큰 병원입니다. 거기에 책임자로 있는 마핏 목사의 자제 한분이 있고요. 그러니까 평양에 외국 사람

이라는 건 미국 선교사들이 아마 내가 처음 갈때는 한 4~5명 정도가 있었고, 그리고 이제 외국사람

이라면 중국사람 이죠. 중국사람하고 일본 사람하고.

네.

근데 그 때에는 일본 사람보다는 중국 사람이 더 많았어요.

네. 가깝고 그러니까 그런가 보군요.

네. 그리고 장사 상권을 중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네. 교회는 많았습니까?

예, 내가 처음 평양에 갈때 평양의 큰 교회라는게 한 4~5곳 있었지요. 장백제교회라는 곳이 있었고,

남산재에 감리교회가 있었고, 저 남문 밖에 교회가 하나 있었고, 서문 밖에 또 하나 있었고, 그 다음에

차차 창동교회니 이런게 생겼지만은 내가 갈때는 한 너뎃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네. 다음주 부터는 이제 평양 숭실대학교 다니시는 얘기 부터 시작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음악)

우리나라 의학계의 원로 이영술 박사의 회고담을 들어보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대담에 이규영 아나운서 였습니다.

월요일 이시간에 계속 되겠습니다.

(입력일 : 200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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