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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이사람에게 듣는다
이영술 - 제1회 어린시절 이야기
이영술
제1회 어린시절 이야기
1973.03.15 방송
‘이 사람에게 듣는다’는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사람에게 듣는다.

오늘 이시간 부터는 우리나라 양의학계의 원로 이영술 박사를 모시고 우리나라 양의학 반세기를

회고해보는 시간으로 마련하겠습니다.

대담에는 이규영 아나운서입니다.

이영술 박사님을 모시고 앞으로 그 동안 지나오신 얘기를 듣게 되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네.

그러니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예. 제가 저 생년월일이 1895년이에요.

네.

그러니까 아마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일흔 아홉이라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네.

저는 아직도 일흔 여덟이라고 하지요.

네.

나이 많은게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은거 같아서.

역시.. 우리나라 양의학계의 개척기에서 부터 시작하셔서 줄곧 활약하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어디 기록에서 보니까 이 박사 께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시고 일찍이 미국에 유학한 외과의

로서, 우리나라의 아메바성 간장농양을 수술을 하지 않고 비수술을 개척하신 분이다. 그렇게

되어 있던데요.

네. 그것이 뭐. 맞게 했다기 보다도 우리 세브란스 외과에서 그 일을 처음 아마 시작해서

세계적으로 발표가 되었어요. 우리나라에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의 아메바성 정리, 이질이죠.

네.

그게 상당히 흔했어요. 말하면 위생시설이 충분치 못하고, 그랬기 때문에 아메바성 이질을

앓는 사람이 그 우리 인구중에 상당한 수요가 있었습니다.

아메바성 간장 농양이라는 건 즉 아메바성 이질을 앓는 사람이 그 균이 장에만 있지않고, 이게

전신으로 퍼져가지고 간장에 가서 그 놈이 서식을 하면서 간을 못쓰게.. 그러면 간이 이제

곯게 되죠 말하자면. 그걸 소위 간장 농양이라고 했습니다.

네.

근데 과거의 치료법으로 말하면, 균이 간 속에 있으니까 수술을 하고서, 간에 구멍을 뚫어서

그걸로 바깥으로 고름이 나오도록, 그런 수술을 해서 치료를 했지요.

근데 거기에 무슨 폐단이 생기는가 하면 아메바성 간 농양은 아메바만 가지고 고름이 생긴건데,

네.

이걸 째가지고서 고름을 바깥으로 나오게 하고, 그러는 조작하는 가운데 다른 균이 전염이

되기 싶단 말이에요.

네.

그래가지고서 순전히 아메바성 간장 농양 뿐만 아니라 다른 세균이 복잡적이게 되기 때문에

이게 예후가 상당히 좋지 못했어요. 그러던 것을 세브란스 외과에서 처음에는 어떻게 했냐하면

환자 상태가 너무 위험해서 말이지요. 도저히 수술할 수 없단 말이지요. 그렇다고 수술할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단 말이에요. 그렇게 처음에 시작해 본 것이 고름을 가지고

주사기로 가지고 빼내는 걸 해 봤단 말이에요. 그게 처음에는 수술하지 않고, 주사기로 빼는 걸로

치료를 하려는게 아니라, 환자 상태가 나쁘니까 환자 상태가 좀 좋아지기까지. 수술 준비로

우선 뽑아 줘 보자. 그래서 뽑아 줘 보니 환자 상태가 의외로 좋아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수술하는 대신에 좀 계속해 뽑아보자. 그래 이제 두번 뽑고, 세번 뽑고, 네번 뽑는

동시에 그 아메바성 정리. 이게 특효약이 있거든요.

네.

에메칭이라는 약이 있어요. 동시에 그 약을 먹여 봤단 말이에요.

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나 보려고요. 해본 즉, 한 1개월간 계속해 뽑으면서 그 약을 먹이니까

환자 상태가 아주 좋아져요.

네.

그게 무슨 얘기인고 하니, 아무는 데는 그런 표시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간장농양 환자가 올거 같으면, 일단 수술하는 걸 중지하고, 수술하지 말고 그냥 주사기만 가지고 해보자.

그걸 어저께 천자라고 그래서 이제 수술하지 않고, 치료하는 방법.

그렇죠.

이런 걸 개척하신 셈이군요.

그래서 그걸 한 400명. 우리가 그 천자만을 가지고 치료를 한 400명 정도 했어요.

네.

그게 우리나라 의학 잡지 뿐만아니라, 외국 의학잡지에 까지 소개가 됐습니다.

그 밖에 우리나라의 미개척 분야 였던 정형을 아마 처음 시행하신 것으로 얘기가 되겠지요.

예. 정형외과라는 건 이제 뼈, 뼈의 질환, 또 관절, 말하면 무릎이라던지 그 외의 여러가지

관절이 있잖아요? 운동되는 관절의 병, 또는 힘줄, 그 세가지를 주로 치료하는 학과를 가르켜서 정형

외과하고 그럽니다.

네.

근데 우리나라가 아직까지도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정형외과라고 간판을 붙이는 그런걸

지금도 봐요. 어떻게 의사가 그런 말하면 무식하다고 그런건 그러면 그 분들에게 .. 하하하

그럴지 모르지만, 성형외과를 하는 사람들이 정형외과라는 간판을 붙이고 하는 것이 아직도

있습니다.

네.

그러나 정형외과라는 것은 내가 지금 얘기한 것과 같이 뼈, 관절, 힘줄 그 주가 되는 세군데 병이

있을 때, 치료하는 학과를 가르켜서 정형외과라고 그래요.

네.

근데 과거에 내가 의학을 공부할 그 시절을 말할 거 같으면 우리나라에 정형외과를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네.

그래서 내가 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가 있을 적에 우리나라 사실상 그 관절이라던지, 뼈, 힘줄

에 병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 치료라는게

퍽 소홀했어요. 그걸 느꼈기 때문에 내가 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가 있을 적에 정형외과를 가서 전

문을 하고 왔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정말 정형외과 수술이라는 건 아마 내가

처음으로 했다는게 아마 과언은 아닐겁니다.

네. 우리나라에 양의학이 들어온 지가 한 70여 년으로 본다고 하면은 지금이야 의학박사들도 많

으시고 말이죠. 뭐 정형이다 하면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만 한 40~50년 전에 벌써 우리나라에

도입했다는 것이 이 박사 께서 처음으로 소개 드릴 수 있을거 같습니다. 고향이 어디가 되시는

지요?

제 고향은 평양이에요. 보통 내가 그냥 이력서 같은데 쓰는 건 출생지를 평양라고 그럽니다.

네.

고향이 내 정말 고향이고, 또 어려서 살고 그랬기 때문에, 그러나 정말 출생지는 평양이 아니에요.

내 생일이 바로 그 을미사변이에요.

네.

을미사변이라고 하면 갑오 다음이에요. 갑오년이 일청 전쟁 나던 해란 말이에요. 근데 일청전쟁

그 전쟁터가 평양근처가 일청전쟁 전쟁터지요.

네.

그렇기 때문에 일청전쟁이 났을 적에 평양의 왠만한 사람들이 다 피난을 갔어요.

그러니까 우리 집안에서도 일청전쟁 나던 갑오년에 피난을 저 평안북도 후창이라는 곳을 갔어요.

그래서 거기 가서 내가 출생이 됐어요. 그러니까 정말 출생지도 말하면 평양이 아니고 후창이죠.

네. 하하하.

그 당시에 동학난이라던지 갑오경장 해가지고 청군하고 일본군이 같이 들어오면서 이제 일청전쟁이 일어나

지 않습니까?

그러믄요.

그 무렵이 되겠군요.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로 일청전쟁이라는 건 일본 사람이 벌서 그 때 말이지요.

네.

일본 자체만으로서는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을 이제 먼저 점령을 하고 그 다음에 만주까지

그 욕심이 대단했죠. 그러면 그때 우리나라 형편이 어땠냐 하니, 중국하고 우리나라가 말하면 동맹국

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일본서 한국을 점령하려면 먼저 중국을 떨어내야 한국을 자기네 마음

대로 하지, 중국을 그냥 놔가지고서 그 세력이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한국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단 말이에요.

네.

그러니까 소위 일청전쟁이 생긴게죠.

네.

근데 그 피해를 직접 피해를 누가 받겠는고 하니, 한국에서 전쟁의 피해를 받게 된거죠.

그러면 일청전쟁이 생겼으면, 전쟁터가 일본이 되던지 중국이 되야 할텐데, 이 중간에 껴있는

한국이 전쟁의 피해를 받게 된게죠.

네. 그러니까 78년전에 출생하시면서 피난을 다닐 정도로 ...

우리나라의 환경이 그 때 그렇게 됐죠.

그 당시에 아버님이라던지 가족소개를 좀 해주십시오.

예, 제 아버지께서는 젊어서 관리노릇을 몇 해동안 한 경력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출생 되고 그럴

때 에는 관계에서 떠나가지고 그냥 소지주라고 할까요. 말하면 토지 좀 가지고 거기서 추수해서

지내는 그런 분이 됐습니다.

네.

그리고 내가 집안에 독자에요.

네.

동생도 없고, 형도 없고. 누이도 없어요.

네.

말하면은 아주 외아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이 퍽 귀엽게 길렀다고도 할수 있고, 또는

늘 말하면 외아들이니까 대를 이어야 할텐데, 잘 못 되지 않을까 늘 걱정을 그런 태도로 지

냈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내가 장성해 가지고 차차 부모에게 참 걱정을 많이 끼쳤습니다.

네.

뭐 요새모양으로 불량해서 걱정을 끼친게 아니라, 우리나라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에 어려서

내 집이 평양에서 한 70리 서쪽에 있는 시골이에요.

네.

거기 잠시동안 나가 있었는데, 거기에 있으면서 평양에 돌아와서 소학교를 다니게 됐어요.

그러니까 외아들을 집에서 떠나서 물론 외조모댁에 와 있었지만, 아마 어머니 마음은 늘 불안했을

거에요. 하하.

그랬죠. 그 다음에는 또 서울로 또 유학하러 갔어요. 어쩌다 다음에, 그러니 이건 아들이라고 낳

았지만 같이 있지 못하고..

계속 부모걱정을.. 앞으로 그런 얘기가 자세히 나올거 같습니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네. 지금도 아버지도 그랬겠지만, 어머니에게 퍽 미안합니다.

네. 하하하.

(음악)

우리나라의 의학계의 원로 이영술 박사의 회고담을 들어보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대담에 이기영 아나운서 였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계속 되겠습니다.

(입력일 : 200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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