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스타앨범 / 나의 데뷰
유쾌한 응접실 / 정계야화
노변야화 / 주간 종합뉴스
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이사람에게 듣는다
박영준 - 제3회 “제가 김치도 담궜어요”
박영준
제3회 “제가 김치도 담궜어요”
1973.01.04 방송
‘이 사람에게 듣는다’는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사람에게 듣는다.

작가 박영준씨의 회고담을 엮어 나가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이 시간 대담에는 이규영 아나운서 입니다.



고향이신 함정 공립 보통 학교에 그 당시엔 4년제 였죠?

네.

그 후에 5년 됐다가 6년이 되나요? 소학교가.

그렇죠.

네. 그런데 4년제 졸업으로 졸업을 하시면서 진학을 어떻게 하시게 됐나요?

제가 보통학교 다닐때에도 학교갔다 돌아오는 즉시 어머니를 도와서 농사도 하고요.

네.

제가 그 당시 정말 해보지 않은게 별로 없습니다. 김도 매보고요. 또 나이가 어리지만,

어머니가 하루종일 밭에 나가 계시니까. 김치를 담글수가 없어서 제가 김치도 담그고요.

네. 십 여셋 나이밖에 안된 나이에 말이죠?

네. 빨래도 거의 제가 하고, 어머니가 하셔야 될 일을 거의 제가 했죠.

네.

그러다가 졸업을 했으니까. 어머니를 도와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제 아버지가 목사, 선교

목사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선교회에서 사회를 위해서 돌아가신 교육자의 자식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교육에 대한 보조가 있었어요.

네.

그래서 4형제 가운데 한 사람쯤. 학교에 올라가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등록금이죠.

네.

그걸 면제해주는 이런 혜택이 있었습니다.

네.

그래서 형이 만약 진학하고 싶은 진학심이 강했다고 했다면, 형이 공부를 했겠죠.

그런데 형이 그런 마음이 별로 없었어요.

네.

그러면 제가 공부를 안한다면 그 혜택을 또 포기하는게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공부를 해야 되겠다

싶어서는 할아버지, 어머니 승낙을 받아가지고서 진학하기로 결심을 하고 평양으로 갔습니다.

네.

평양에는 다행히 제 고모님이 살고 계셨어요.

네.

생활도 여유가 있었고, 그래서 학교에서 등록금만 면제해준다면 식사같은 것은 고모댁에서

도움을 받아가지고서 공부할수 있으려니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 무턱대고 올라갔습니다.

네. 백리길이라고 하죠? 평양까지요. 네.

가서, 시험을 치르는데, 그때 학교 제도가 보통학교 4학년까지 밖에 졸업을 못했으니까.

6학년을 졸업해야 시험칠 자격이 있습니다.

네.

그런데 4학년 밖에 졸업을 못했으니까 그 검정시험을 치르고서 치뤄야 하거든요.

네.

남보단 몇 과목을 더 치뤄야 하죠. 전 시험을 치르기로 하고서, 어디를 지망했냐하면,

숭실학교라고.

네.

거기를 시험을 응시했습니다. 그런데 시험은 될 거 같아요. 마음에.

네.

그래서 그 학교에는 교모이 있습니다.

네.

신학교 교모 비슷하게 생긴 모자인데, 곧 시험보러 갈 길이었기 때문에,

전 모자도 못 쓰고 다녔거든요.

네.

모자를 하나 사긴 사야 겠는데, 사야되면 입학한 학교 모자를 사야 되겠고, 입학한 학교 모자를

사려면 당장에 쓸 모자가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숭실학교 모자를 먼저 샀죠.

네.

사야지고서는 쓰고서 교문까지 가서 그 것을 두루마기 속에 넣고 숨겨가지고 들어가서 시험을

치르고선 나와서 또 모자를 쓰고, 그 자신도 아니고 패기도 아닌, 뭔지 모르겠어요. 전.

네.

그래가지고 시험을 치뤘는데, 다행히 합격해서 그 모자 그대로 썼죠.

하하. 네.

그래서 숭실학교에서 2년 다녔습니다.

네.

다녔는데, 학제가 그때 조선총독부 인정을 받은 학교, 인정을 받지 못한 학교가 있어서

숭실학교는 인정을 받지 못한 학교죠.

네.

그래서 그냥 숭실학교라 부르고, 그 인정을 받은 학교가 광성고등 보통학교가 있습니다.

네.

그렇지만 감리교, 저희가 감리교 거든요. 감리교 계통의 학교의 광성고등 보통학교가 인가를 받은

학교기 때문에, 제가 그리로 가야 또 혜택을 받게 되요.

네.

그래서 그리로 편입시험을 쳐서 3학년에 입학이 됐습니다.

네.

그래가지고서 거기서 공부를 해가지고서 졸업을. 광성 고등 보통학교에서 졸업했죠.

네. 평양에서 공부하시면서도 집걱정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그렇죠. 집에 방학때만 되면 곧 내려가서 농사짓고, 늘 일을 하고 그랬죠.

네. 광성고등 보통학교라든지 숭실학교 다닐 적에 운동같은 것은 안하셨습니까?

제가 그런 걸 할 정신적인 여유가 전혀 없죠.

네.
겨우 공부 같은것을 하고, 이제 용돈같은 것도 쓸 수가 없었거든요.

네.

집에 돈을 한 푼도 갖다 쓰지 않기 때문에, 운동같은 걸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네. 그당시에 무슨 그 학비를 벌어서 보탠다는지 이런 방법은 없었을까요? 고학형식의 말이죠.

저는 선교회에서 등록금을 대 줬기 때문에 아마 그 걸로 공부를 할 수가 있어서 괜찮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신문배달이라던가, 그야말로 요즘 만두, 옛날에 호야호야 만두.

그런걸 팔아서 고학을 하면서 공부하던 사람이 있었죠.

네. 평양에서 숭실학교, 광성고등 보통학교 다닐 무렵에 평양시내에는 양복쟁이들이 많이 등장을

하게 되나요?

그럼요. 그때야 뭐 평양은 아주 개화된 도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죠.

전차도..

전차 있었습니다.

네. 그 땐 전차도 타고 다니고, 그렇게 되겠군요.

그럼요.

고향다닐 적에 교통망은 어떻게 되나요?

제가 집에 방학때 되서 내려가면요. 원래 코스가 어떻게 되냐면, 평양서 기향. 기향이라는 데가

안창호 선생 나신뎁니다.

네.

거기 까지가 50리 거든요.

네.

거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부터 강서읍으로 해서 함성으로 해가지고 걸어 50리를 가는거죠.

이게 정 코스입니다.

네.

돈 있는 사람들은 기향에서 부터 함성까지 말을 타고 다녔죠.

네.

말타고 다니던 학생들도 있습니다.

네.

저는 그럴 여유가 없으니까 잘해야 기향까지 기차를 타고 그 때부터 50리를 걷거나.

그 것도 없어서 평양서부터 집에까지 백리를 쭉 걸어서 가는 경우가 많았죠.

네. 그럼 하루종일 걸리죠.

하루종일 걸리는거죠.

아침새벽 일찍 떠나 가지고요.

네.

그 당시 신은 좀 달라지나요?

그 때 신은 운동화 신고 다녔던거 같아요.

네.

운동화가 있었고,

양복교복 입고, 이제 운동화 신고요.

양복도 집에 어머니가 집에서 무명을 짜시잖아요?

네..

그걸 새까만 물을.. 염색을 해가지고 그걸 가지고서 양복. 학생복을 해 입고 다녔죠.

네. 그당시에 마을에 가면은 중학생들이 좀 많이 있었습니까?

별로 없었습니다.

네.

별로 없었기 때문에, 혹 주목해 보는데, 저는 아까도 말씀드린거 처럼. 방학 때 되면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되고, 밭에 나가서 일을 해야 되고 그렇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이

저 평양까지 공부가는 녀석이 방학때 와서는 밭에서 일한다고 어떻게 보면 좀 우러러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떨때는 바보로 취급하는 것 같은. 그런 것들이 있었죠.

네. 그 보통학교 다닐적에 여학생을 짝사랑했다는 그 뒷소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저한테 퍽 큰 영향을 줬습니다.그 여자가.

네.

제가 평양서 학교를 다니고, 그 여자애도 평양으로 와서 학교다녔거든요?

네.

근데, 그 여자는 기숙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했어요.

네.

그래서 자유스럽게 만날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하면 한번 얼굴이나 보는가 뭐 이런걸 굉장히

부심했죠.

네.

그래서 그 여자가 기숙사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 있잖아요?

네.

그 앞으로 일부러 지나다니면서 혹시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5년동안에

그리워 한거죠.

하하.

그런데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어요.

네.

간혹 방학때 되서 같이 시골에 내려간 경우가 한번 있었습니다.

그럴땐 부끄러워서 얘기를 못했고요.

네.

그래서 결국은 한번도 얘기도 못했지만, 속으론 굉장히 생각을 했는데, 그 기간동안이

한 5년 거의 됐습니다.

네.

그리고 5년동안 생각만 하고 조금도 이루어 지는 것이 없으니까 늘 제 이때까지 과정얘기를

들으셨으면 짐작하시겠지만, 경제적으로도 불우하잖아요?

네.

그리고, 정신적인 분위기 같은 것도 따뜻한게 별로 없었어요.

네.

그런데다가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여자하고는 뭔 거리에 자꾸 되게 되죠.

네.

그런데 정신적으로 고독한 것을 느끼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정신적으로 고독감을 느끼게 되니까 자연히 좋아하게 되는게 시라던가 문학적인

소재를 좋아하게 되는거죠.

이제 글로 옮겨지게 되는거죠?

네네.

하하. 큰 전환기가 되는 걸로 생각이 되는군요.

네. 오늘 거기까지 얘기 듣겠습니다.

(음악)

작가 박영준씨의 회고담을 이규영 아나운서와의 대담으로 엮어나가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내일 이시간에 계속 되겠습니다.

(입력일 : 2008.12.03)
프로그램 리스트보기

(주)동아닷컴의 모든 콘텐츠를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서 무단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by donga.com. email : newsro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