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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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이사람에게 듣는다
박영준 - 제2회 감옥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박영준
제2회 감옥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1973.01.03 방송
‘이 사람에게 듣는다’는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사람에게 듣는다.

작가 박영준씨의 회고담을 엮어 나가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이 시간 대담에는 이규영 아나운서입니다.

박영준씨께선 1911년에 평안남도 강서에서 목사이셨던 박석훈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셨고, 아버지께서

3.1운동 당시에 옥사하신 다음에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가산이 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될거같이 생각이 드는데요?

아버지께서 8살때 돌아가셨단 말씀하셨죠?

네.

네.

3.1운동 그 다음해이니까요.

네.

제가 8살때, 돌아가셨는데 저희는 고향이 평양에서 거의 한 100리 떨어진데 입니다.

네.

발산리라는 데인데, 함성면 발산리라고 시골에 속하는데, 거기서 살면서 아버지가 목사라고 해서

저희 가정이 전부다 교회를 나가죠.

네.

우리마을에서 함성교회 있는데까지가 한 5리가 되요.

네.

그 일요일에 교회를 나갔는데, 교회 예배를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고 하는 통지가 있었어요.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할아버지가 가셨는데, 저희들도 막 걱정이 되서 따라갔죠.

네.

우체국으로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가 감옥에서 복막염으로 고생하시다가 평양 고모댁이 있어요.

거기 나가서 조금 요양하시가다 돌아가셨다고 그런 전화가 왔어요.

네.

그 소식을 듣고 제가 8살때 그 철이 없는 때인데, 죽음에 대해서 처음으로 슬픔을 느꼈던거 같아요.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지금 나는데, 아마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울었던거 같아요.

네. 그리고는 장례라던지 그런것은 어디서.

그래서 장례식을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병원, 남산교회에서 장례식을 했습니다.

네.

집에서는 어른들 다 가시고, 할아버지도 참석하시고 어머니도 가셨는데, 제가 이제 8살 밖에 안되니까

거기까지 갈 수가 없고 그래서 저는 시골에 그냥 남아 있었죠.

네.

나중에 사진들 찍은 것을 봤는데, 아마 평양에서 보기드물게 아버지가 유명했다기 보다도

3.1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감옥에 들어가셨다가 돌아가신 분이니까 교회계통의 학교가 있어요.

숭실학교라던가 광산학교라던가 그 학생 전체가 상복을 입고, 상여를 따라서 장지까지 가고 그래서

성대한 장례식을 했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네. 그 후엔 재산이 어떻게 됐습니까? 재산이 좀 있었습니까?

본시 아까 잠깐 말씀 드렸지만, 전에는 아마 좀 재산이 있었던 모양인데,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백백교 때문에, 전부 재산을 탕진하셨거든요?

네.

그 때문에 원체 가난하게 지내고 그랬는데, 아버지가 목사를 지내시면서도 가정에 대해서 크게 도와주시거나

그런거 같지가 않아요.

네.

교회사업만 하시느라고 가족들을 돌보지 않은거 같아서 저희들은 시골서 그냥 농사를 짓고 살았거든요.

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이제 정말 등 비빌데도 없게 되었죠.

그래서 그 때부터 자작농, 지금 소작농, 이런 식으로 농사를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형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형이 나보다 5살 위인데요.

네.

형이 그런 장자의 책임을 느끼고서 돌봐줬으면 집안 어머니라던가 할아버지가 고생을 덜 하셨을텐데.

형님은 책임감을 잘 느끼지 않았어요.

네.

그래서 제가 어머니 밑에서 어머니를 걱정 안시켜야겠다고 이런 강박관념, 이런것 때문에 기를펴지 못하고 제가 살았죠.

네.

집에서 농사지을 노동력이라면 어머니 혼자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밑으로 동생이 둘 있는데, 하나는 젖먹이거든요. 저보다 8년 아래니까 유복자 비슷하게 낳은 아인데.

걔를 엎어서 기르면서 집안 살림을 도와주면서 어머니가 밭에 나가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네.

그렇게 한 것이 제가 어렸을 적 부터 한 일이죠.

어머니를 도와주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데 제가 9살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네.

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집안이 종교가족이니까 조금 다른집안보다는 개화를 해서 머리같은 것도

일찍 깎고, 신교육을 받으려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래서 한해 쉬다가 그 다음해에

학교엘 들어갔습니다.

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것 처럼 학교도 교회가 있는 한민읍에 있었어요. 5리를 통학을 하면서 다니는데.

학교에 갔다 와서는 동생을 엎고서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이제 그런것이 보통학교때의 제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네. 그 당시엔 머리를 땋은아이들도 많이 있었겠습니다.

네. 뭐 동네는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네.

머리를 총각얘들은 다 머리를 땋고 다니고 그러다가 학교에 가려면 머리를 잘라야 하거든요.

보통학교 들어가면, 그러니까 그것이 싫어서 보통학교 안다니는 얘들도 많이 있었죠.

그때는 서당도 있고요.

서당은 있었죠. 물론.

네.

서당은 머리를 땋고 다닐 수 있고, 보통학교는 땋고는 못 다니니까.

네. 바지 저고리이죠? 전부다.

순전히 바지 저고리죠.

신은 그 당시에 어떤 신들이 많이..

호신 삼아 신고 다녔죠.

짚신이죠.

네.

그때는 상투들도 많이 있었겠죠.

뭐 대부분 상투구요.

네. 1919년대 얘기니까. 서당은 안다니셨어요?

서당도 조금 다녔어요. 보통학교 다니기 전에 조금 다녔는데, 많이 다니진 않았습니다.

네. 서당에서 처음에 천자문부터 시작을..

천자문이죠. 천자문에서 천자문배우고 동문선습이라는거 조금 배우다가 보통학교로 들어갔습니다.

네. 보통학교때 나이차들이 많지 않습니까?

많죠. 저희들 반에도 어린 얘 아버지가 1학년으로 다닌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하하..네

그당시 한반이 몇 명 정도씩?

한 40~50명 됐어요.

네.

그리고 남녀공학이었죠.

네. 그당시 선생님들도 바지 저고리였습니까?

아닙니다. 선생님은 훈도 인데요. 훈도는 양복을 입고요.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네.

때문에 무서웠죠. 훈도가..

네. 그러면 전부가 일본인 교사들..

일본인이 많았고, 한국사람도 있었습니다.

네.

역시 마찬가지로 칼을. 짤막한 칼이지만요. 칼을 차고 다녔죠.

주재소 순사들 칼하곤 좀 다르죠?.

다르죠. 그건 긴데. 이건 새까만것 조금짤막한 칼을 차고 다녔죠.

칼은 뭐에 쓰는 칼을..

역시 위엄 이런 것이겠죠.

네. 그 당시에도 교장선생님이 계시고, 교감도 있었습니까?

교감. 그것 잘 못 기억하겠어요.

하하.

제가 4학년까지만 다녔거든요. 4년제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4년이라봐야 열 서넛,너덧 될 때까지 다녔기 때문에..

그때 과목은 어떻게 됩니까? 조선어가 있었죠?

조선어 있었구요.

네.

일본말, 이과 라는게 있었구요. 역사. 그런것들이 있었다고 생각드는데요?

네. 하하하.

보통학교 시절이 지금 회상하시면 어떤..

그때 제가 나이가 참 어렸지만요. 가정형편이 어떻게 됐냐하면 저희집안에 여성이라곤 어머니 한분

밖에는 없고요. 저희 4형제인데, 4형제가 전부 남자들 뿐이었거든요.

네.

여자식구가 어머니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네.

그리고 어머니가 아까 말씀 드린것 처럼 밭에 나가셔서 늘 고생하시면서 일하시고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그 감정

자식으로서 어머니에 대해 무언가지를 한다던가 그 감정을 전혀 가지지 못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다고 그러는데요.

네.

난 보지도 못했지만은 일찍 죽었대요.

네.

죽었다는 누이동생에 대한 그리움이랄까요? 이런것이 꿈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지. 그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그리움같은거 어렸을적 부터 아마 느낀거 같아요.

네.

보통학교 4학년때 같은반에 다니던 여학생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속으로 그리워하고.. 하하

네. 그때 한반에 여학생이 많지 않았죠?

많진 않았는데요. 그것도 하나의 운명처럼 생각했는데, 남자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 가서 고등학교, 지금 중학교죠.

네.

진학한 학생이 여자로선 그 여학생. 남자로선 저 이렇게 둘이었어요.

하하.

이것도 하나의 숙명같고 그래서 더 다니자고 생각을 해서 몇해동안 짝사랑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정 공립 보통학교 4학년에 졸업을 하시게 되었군요.

네.

(음악)

작가 박영준씨의 회고담을 이규영 아나운서와의 대담으로 엮어 나가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내일 이시간에 계속 되겠습니다.

(입력일 : 200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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