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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이사람에게 듣는다
박영준 - 제1회 등단 시절 이야기
박영준
제1회 등단 시절 이야기
1973.01.02 방송
‘이 사람에게 듣는다’는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사람에게 듣는다.

오늘부터 이 시간에는 우리 문단의 원로 작가이며, 연세대학교 교수인 박영준씨를 모셨습니다.

대담에는 이규영 아나운서 입니다.

새해 좋은 꿈 꾸셨습니까? 벌써 1973년도를 맞이 했습니다. 재작년에 회갑 보내셨죠?

네.

네. 회갑을 보내시면서 연세대학에선 세 교수가 함께 기념 특집호를 발행 한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만,

네. 문과대학에서 발행하는 인문과학이라는 연구지가 있죠.

네.

거기서 회갑 기념 특집호를 냈습니다.

어떻게 회갑을 맞으시면서 감회가 어떠셨는지요?

그게. 벌써.

한 2년전의 이야기니까.

2년전 이야기니까. 그게 좀 다 잊어 버린거 같은데요. 막상 한 날 당하니까. 어쩐지 다 산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하하하.

문단에 나오신것은 언제적 이었습니까?

1934년이죠.

네.

그러니까. 한 40년 거의 다 되네요.

그렇군요. 당시 몇 살 때십니까?

그때 24살 때 입니다.

네.

학교 졸업하던 때니까요.

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글을 쓰신 셈이군요.

네. 그래서 학생때 응모를 해서

네.

졸업하면서 당선이 됐습니다.

네. 당선된 곳이 그 당시에 신동압니까?

네. 지금도 신동아 나오고 있는데요.

네.

그당시에 나오던 신동아에 장편소설 `일일일가` 하고, 꽁트 `새우젓` 이란게 있었어요.

네.

짧막한 가장 짧막한 그게 둘다 당선작으로 뽑혔었습니다.

네. 그것이 문단에 계기가 된 셈이로군요.

그거하고, 조선일보의 단편소설 하나가 당선이 되었죠.

네. 그 해는 아주 화려했겠습니다.

네.

당시 그 현상일 텐데요. 상금이 기억이 되십니까? 얼마..?

에. 단편소설이 50원이라고 말했는데요, 50원 다 못 받았습니다.

네. 세금이 있었습니까?

지금은 이케 30원 밖에 받지 못한거 같구요.

네.

장편소설이 100원이랬습니다.

네.

100원인데, 그건 그대로 받았고요.

네.

콩트가. 10원이었는데, 그대로 받았고.

그땐 꽤 목돈이 되었지요?

그랬죠.

네..

내가 졸업하던 때이기 때문에 뭐 하숙비라던가 이런 그런 빚들이 많았어요.

제가 집에서 돈을 갖다가 쓰면서 공부를 하지 않고 고학을 했기 때문에.

네.

좀 고생을 해서 졸업할 때쯤 빚이 있었는데, 상금을 받아서 하숙비라던가 빚을 갚고,

네. 장가가기 전까지도 아주.

양복 한 벌 해 입고,

하하.

기념으로 이제 `세경 약정지` 라던게 있었어요.

네.

그게 한 질이 스물 여덟권이 되었는데, 28원. 1원씩 해서.

네.

그걸 샀던 아직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게 지금 아마 한 천원씩 하니까. 그당시 1원 하고 천원하고는 잘 비교는 안되겠지만요.

거의 비슷했겠죠.

네.

그때, 문단에 데뷔하셔서 그 후에는 신문사에도 근무를 하셨고요.

신문사에 근무한 것은 해방된 뒵니다.

네.

해방되기 전까지는 학교를 졸업하고 이게 당선도 되고, 그래서 전 그래도 누구보다도 신문사 같은데,

취직이 되려니 남보다는 쉽게 되려니 하고 생각을 했는데, 끝내 취직이 되지를 않고,

네.

뭐 북간도 이런데로 갔다가 해방이 된 뒤고 나서야 신문기자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네.신문사에 좀 계시다가 잡지사의 일도 좀 보셨고.

네.잡지사 편집도 좀 하다가 6.25 전까지 지금 집터도 없어졌습니다만, 시청앞에 고려문화사가 있었어요.

꽤 큰 인쇄소였고, 또 출판도 하고, 그리고 우리 소재가 일반 대중의 교양잡지를 하고, 어린이 신문이 있었어요.

네.

그런것을 책임 맡아가지고 편집했죠.

네. 6.25후에는 전문 작가로 활약을 하셨고요. 그때 고생도 많이 하셨겠습니다.

네. 그렇죠. 일선에 간다는 것이 여는한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네. 전화가 가시면서 교육계쪽 계시면서 창작활동 계속 하시는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네.

그동안에 예술혼 회원이시고요.

네.

상을 받으신건 굉장히 많겠죠? 서울시 문화상이라던지.

한 세개 있습니다.

네.

54년도 아시아.

네. 자유 아시아 문학상이라는 게 생긴게 제 1회로 제가 받았죠. 그걸

네.

그때의 상금이 젤 큰거 였습니다. 우리나라...

네.

문학상이라는게 별로 없었고, 근데 그걸 받았고, 그 다음에 예술혼 상.

네.

서울시 문화상, 이렇게 세 개를 받았습니다.

네. 근데 이때 때 옥고도 치루신걸로 제가 듣고 있습니다만.

예. 졸업을 하고 북간도 가서 교편생활을 하고, 한 1년쯤 하고 나온 뒤에 경찰에 잡혀서, 고양이죠. 고양 경찰에 가서

그때, 명목은 지방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삼아가지고서 독서회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네.

거기에 주동이라고 해서, 한 반년.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네. 회고하면 참 지금 끔찍한 일 같이 생각이 들죠?

그렇죠. 제 역사라는게 1911년 생이거든요? 제가?

네.

1910년이 한일 합방을 하던 해가 아닙니까?

네.

역사적으로 봐서 우리 민족의 가장 굴욕적이고 비참한 역사가 시작하던 다음해 제가 태어났거든요.

네.

민족의 역사와 같이 지금까지 걸어온 거죠.

수난사가.

하하.

그럼 1911년 고향이 어디십니까? 태어나신 곳이.

평안남도 강서인데요.

네.

강서라고 하면 뭐 잘 모를거에요. 그러나 안창호 선생의 고향이 강서라고 하면 대략 짐작하실거에요.

네.

강서구요. 또 요즘 고구려 문화가 많이 나타나는 고분의 벽화로 요즘 일본 고증관계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에 고구려 고층의 벽화가 나타난데가 바로 강서 세무덤이라는 뎁니다.

네.

바로 그것이 강서에 소재하고 있죠.

네.

그런 곳으로써 유명하다면 유명한 고장이라고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네. 고구려의 발상지였다고 생각이 드는 군요?

글쎄. 그런거 같아요.

네. 아버지께선 목사님 이셨다고요?

네. 집에 할아버지는 옛날에 백백교인가? 뭐 그런 민속종교가 있지 않겠어요?

네.

그걸 하시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가난하게 됐어요.

네.

그럴때, 아버지가 늦게 만학을 하셨죠.

네.

그래서 신학을 하셨습니다. 그래가지고서 목사가 되셔서 평양서 감리교, 그런데선 그중 큰 교회죠.

거기서 시문을 하셨는데, 교회일을 보시기 때문에 가족은 잘 돌보시지 않고요.

네.

저희들은 촌에서 농사를 지면서 지내고 그러다가 3.1운동때, 독립만세를 부를때, 아버지가 평양서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주동적인 역활을 하셨어요.

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셔서 그래서 목사를 하셨죠. 아버지가. 다음해에. 3.1운동 다음해에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네. 그 당시는 몇 살 때십니까?

1919년 이니까요.

네.

8살때.

네.

지금 어렴풋이 기억이 나십니까?

네. 기억있죠. 조금 기억이 있습니다.

네.

저희는 그때. 시골에 있었는데, 할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랑 가족들이 시골서 농사짓고 있었는데,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어요. 저는 어렸으니까, 뭣 때문에 만들었는지는 모르고 그냥 옆에서 보기만 하다가.

밤중에 들고 나가서 그걸 동네에 돌면서 동네 사람들이 매 가지고서 같이 합해가지고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그런 기억이 있고요.

네.

할아버지가 붙잡혀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으셨는데, 그래서 고생을 하시다가 얼마 안되서 나오셨죠.

네.

나오셨지만, 전 제가 어렸을적에 태극기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있습니다.

네. 목사이셨던 아버지께선 3.1 운동에 옥사 하셨단 얘기, 그럼 내일부터 어린시절 얘기가 계속 되겠습니다.


작가 박영준씨의 회고담을 이규영 아나운서와의 대담으로 엮어 나가는 이 사람에게 듣는다. 내일 이시간에 계속 되겠습니다.

(입력일 : 200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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