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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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일요방문
제9회 - 최은희 여사
제9회
최은희 여사
1964.03.01 방송
(두꺼비 울음소리)

두꺼비의 일요방문.

(음악)

휴일을 즐기시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매주 이 시간에는 만화가 안의섭 씨가

우리들이 알고 싶은 가정, 궁금한 여러분의 가정을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 오늘은 3.1절이자 일요일.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3.1절이고 해서 오늘은 이, 저, 최은희 여사 댁을 찾아볼까 이렇게 합니다.

과거 그 양반이 3.1절과 관계도 있으시고 해서, 네? 아, 네. 최은희 양, 그 최은희가 아니시고

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여기자 생활을 한 분이 있습니다. 네.

그러면 저 서대문 쪽. 기상대 뒤쪽으로 가십시다.

(차 경적 소리 및 차 달리는 소리)

- 오늘 저, 안의섭입니다.

- 최은희입니다. 선생님 오신 거 참 영광입니다.

- 아이구,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존함은 뭐, 너무나 잘,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 뵙긴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상상하던 것보다는 퍽 정정하십니다.

- 뭐, 제 나이가 그렇게 많은가요?

- 오늘...

- 머리가 하얗게 셌으니까도 늙은인 줄 알지마는 정말은 오래 회갑이에요.

예순하나예요.

- 선생님, 이 댁에 퍽 오래 살고 계십니까?

- 아마 서른 댓 해 됐나 봐요.

- 아, 네. 그럼 선생님이... 이, 저, 결혼생활 하실 적부터 그러니깐...

- 첫 애 낳아가지고 이 집에 왔어요. 그런데 걔는 죽었어요.

- 아, 네...

- 우리 셋이 다 여기서 낳습니다.

- 네네, 좀 더 가까이들 좀... 가까이들 오세요. 네.

- 차 좀 잡수시면서 하세요. 아하하하.

- 저기 장롱이... 자개장이...

(전화벨 소리)

- 선생님 저, 어떻게 출가하실 적에 가지고 오신...

- 네, 혼인 때 가지고 온 거예요. 근데 그때는요. 저렇게 만드는 거는 이왕진 기술공장밖에 없었어요.

- 네.

- 그래서 신문기자 한 덕택으로 신문사에서 교섭해서 특별히 만들은 거예요.

- 지금 봐도 모든 라인이라고 할까요. 거울이 양쪽으로 커다랗게, 이렇게 타원형으로 달리고

또 자개가 쪽 이렇게 박히고 돼있는데 이런 건 아마 그 당시에도 아마 최신의 유행 가구에 속했을 것 같은...

- 유행이 아니라 그런 게 없었어요.

- 없었죠? 아유, 실례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 그 당시 저기, 선생님 혹시 기억이 나시면 말씀해주십쇼. 얼마 가량...

- 그때 120원이에요.

- 그때 돈으로 120원이요? 아유...

- 그때는요. 계산기를 이따 만한 걸...

(사람들의 웃음소리)

- 20전... 20전이 아마 안 갈 것 같은데... 아, 20전! 네, 20전!! 아하... 그때 120원이요?

- 네.

- 그러면 아마 120원이면 집채가 한 채쯤 되지 않았을까...

- 그때는요. 집으로는 14원짜리 집도 있었어요.

- 14원이요?

- 네.

- 요새 14원이면 합승 한 번 타고 가면 그만치 되는데.

(사람들의 웃음소리)

- 하여간 저 선생님께서는 이, 일본 가서 학교 다니실 때, 그때도 그렇고 또 돌아오셔서 이제 기자 생활을...

1924년인가, 아마 그때 시작한 걸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에, 1924년 기자 생활을 하시면

제가 아마 난 해가 된 것 같습니다. 아하하하하.

- 그러고 보니 선생님, 마흔한 살...

- 네. 그런데 무척 저, 이, 퍽 이렇게 말씀 드리면, 뭐, 전 솔직히 말씀 드리는데

멋을 내시는 편이었었다, 전 이렇게 얘기를 듣고도 있었습니다만. 저, 이, 자개장을 하나

해놓으신 걸 말씀을 듣고도 그 당시의 선생님의 모든 거짓말을 입증하실... 부모님이 또 여기...

(사람들의 웃음소리)

- 어머니는요.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참 멋을 내세요.

- 네, 지금 입고 계시는 것도 아주 참... 멋쟁이세요. 네.

(사람들의 웃음소리)

- 아유, 우리가 딸이고 현대적이라고 그러구요. 현대여성이라고 해서 언니랑 나랑 이렇게 있지만요. 어머님은 저희들을 쫓아하고 있어요.

- 누가 언니 되시나요?

- 언니고 지가 동생이에요.

- 그래요? 근데 전...

(사람들의 웃음소리)

- 바꿔서 봤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 예, 지금 그러니깐 아드님이 뭘 좀...

- 중앙대학교 정치과 강사로 있습니다.

- 아, 중앙대학에... 네..

- 또 이, 저, 큰따님은?

- 아하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조교로 있습니다.

- 네, 그러니깐 바로 이 따님이 저... 무슨 농과

- 초대여자농학석사라고 신문에서 떠들어...

- 네, 바로 저분이세요? 네... 선생님도 초대여기자, 또 따님도 이제 초대농과...

- 농학석사.

- 초대농학석사.. 이렇게 첫째가 무척 많구만요.

- 또 이 차녀께선...

- 전요, 올해 서울대학 졸업하구요. 대학원 들어가고 또 서울예술고등학교

국어선생으로 취직했어요.

- 서울예술고등학교?

- 네.

- 아, 그러면 여기서... 이화여고 있는 거기네요.

- 네.

- 네... 오늘 정말 3.1절을, 또 해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3.1절을 맞이했습니다. 근데

선생님은 그 당시 3.1운동 난 해, 1919년이 되나요?

- 네.

- 그해에는 학생으로 계셨나요?

- 네, 그때 경성여자보통고등학교에, 그게 지금으로 치면 경기여고 전신이죠.

거기 본과 3학년이었어요.

- 네.

- 그때는 3학년이면은 그게 졸업반이거든요.

- 네.

- 그때 열여섯 살이었어요. 그러니깐 아주 평범한 처녀였죠.

- 네, 그때 그러니깐... 에... 만세가 탁 터질 적에 선생님은 그때 어디 계셨습니까?

- 음, 만세가 터질 때 있은 게 아니라요. 33인 중에 박희도 씨라고 있잖아요.

그분이 청년 지사로 굉장히 학생들한테 비밀적으로 애국사상을 고취해주고, 그러던 분이거든요.

- 네.

그분이 평소에 우리들을 말하자면 비밀리에 지도해주셨어요. 단합해서.

- 아.

- 그러니깐 그 마흔두 명이라는 이가 이제, 박희도 씨가 오라고 해서 하나둘, 하나둘 더

이제, 점점 더 증원이 돼가지고 모인 게 결국은 지금 생각하면 비밀로 이렇게 회합했던

동기심이 됐죠. 그랬는데 그해 2월 28일 저녁, 오라고 해서 갔더니 아무 얘기도 안 하시고는

종이 한 장을 주시는데 그리고는 내일 오전 탑골공원으로 가라고 학생들이, 전체 학생이 한 300명밖에 안 돼요. 우리는.

근데 다 데리고 나가라고, 그 얘기밖에, 만세 부른다는 얘기도 없어요.

- 네...

- 그리고선 기도하자고 그러시고 그 당시, 그때 나중에 역사를 보니까는 그 저 손병희 씨 댁에서

모이는 시간이었더군 그래요. 그러니깐 밖에 가셨나 봐요. 기도하자고 그러시고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하시면서

태극기 아래서 다시 만나자고 그러세요.

- 네...

- 그래서 그걸 가지고 거기서 그 박 선생님 나가신 다음에 저녁을 먹고서는 기숙사로 와서 보니까는

독립선언선데 새삼 한문이 많아서 읽을 수가 있어야죠.

- 어려워서...

- 그리고 또 어떻게 읽는데도 뜻도 잘 알 수가 없고 그래요. 그래도 인제 독립선언서

그랬으니깐 평소 밤낮 우리들을 모아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길 해주셨으니까는-.

- 짐작이 갑니다. 네네.

- 그래가지고 코스가 제동2거리에서, 우리가 가던 그 코스가요.

- 네.

- 저기 육조 앞으로, 조선 보경대 그리고 나와서 계속 나와 서대문 거리를 지나서 또 저기 덕국공간으로 해서

거기서 또 의주통을 돌아서 합동 프랑스 영사관을 해서, 거기서 다시 돌아서 서소문통으로 해서

대한문 앞에서 가서 만세를 부르고 그리고는 숭례문으로 내려갔다가 되돌아서는 이제 본정 타는 데 이정목쯤 해서 나한테 들렸어요.

- 네네네, 그때 일이 눈에 선하시겠습니다.

(입력일 : 201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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