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풍물삼천리.
(음악)
태평양화학 제공.
(광고)
(전통음악)
오직 재주 하나를 밑천 삼아 팔도강산을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던 광대.
뜬구름 같다고 할까, 아니면 부평초 같다고 할까. 비록 그들에겐 재물도, 정겨운
가정도 없었지만 숱한 애환과 사연으로 엮어졌던 생활 속에 끼여 있는 멋과 낭만을
어찌 다 말로 하랴. 또한 공수래공수거라든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던
그들이건만 한평생 서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그 재주야 우리가 어찌 그냥 버릴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 광대, 이동안. 그의 평생은 무릇 광대들의 평생이오. 그의 재주는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우리 민속의 유산이다.
(전통음악)
이 시간에는 마지막 광대, 이동안의 우편으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먼저 민속학자 심우성 씨의 설명입니다.
『광대라 하는 것은 넓을 광자, 큰 대자를 씁니다. 무슨 뜻인지 글자를 놓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무변광대한 광대라고 얘기도 합디다. 오히려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지 광대가 하고
있는 모든 놀이도. 소화할 수가 있다고 그럽니다. 먼저 소리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기악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줄을 타야하며 땅재주를 해야 합니다. 또한 발탈이라는 이동안 선생이
갖고 있는 특이한 종목도 있습니다. 이 광대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떠돌이 광대가 있고, 또 재인청에 소속된 광대가 있습니다. 떠돌이 광대가 대개 민중 취향의
노래를 했다면 에, 집을 지니고 있었던 광대들은 대개 도감 광대로서, 대개 관리 밑에서 월급을
받아가면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이동안 옹은 금년에 일흔네 살이십니다. 화성 재인청의
마지막 광대의 한 분입니다. 이분의 과거를 살펴보면은 처음에는 어려서 부친 되시는
이재학 선생께서 이동안 씨가 광대 되는 것을 반대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남몰래 집을
뛰쳐나가 처음에 남사당패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 황해도 어느 땅에선가 아버지에게
잡혀 돌아와 하는 수 없다 싶었던 부모들은 울안에 줄을 매놓고 줄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에 광무대라든가,. 광대로서의 기능은 끝장을 보고 신파극단을 오랜 동안 따라 다니셨습니다.
그동안에 줄타기와, 특히 이분은 전통무용 가운데 진쇠춤이라든가, 한량춤, 여러 가지 전통적인
춤사위와 장단을 익히고 계십니다. 현재 74세의 고로한 연령으로서 몇 사람, 관심 있는 젊은이들과
하루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하루속히 이동안 선생의 기예가 오늘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
(전통음악)
70이 넘어선 지금도 광대의 길군악을 들으면 온몸이 들썩거린다는 이동안 노인.
그는 그가 마지막으로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발탈보다 한량무, 태평무 등 춤에 더
유명하고, 춤보다 줄타기에 더 유명한 온갖 재주를 갖춘 광대다.
(음성 녹음)
근래에 와서 무릇 광대들의 출발이 그렇듯이 그도 불과 열두 살에 집을 뛰쳐나와
남사당패에 뛰어든다. 그로부터 3년 동안 남사당패를 따라다니며 줄타기, 땅재주 등을
어깨 너머로 익혔으나 황해도에서 아버지에게 붙들려 고향인 경기도 화성으로 끌려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당시 유명한 줄꾼 김관보로부터 뒤에 역시 유명한 줄광대가 된 임상문과
함께 본격적으로 줄타기를 배우게 되는데.
- 윽!
(회초리 맞는 소리0
- 앗!
- 읍!
- 으윽...
- 원, 못난 것들. 아, 겨우 3시간 동엔 두 번씩이나 줄에서 떨어지다니!
- 흐흐흐흑...
- 다시 줄 위에 올라서라!
- 선생님, 더 이상은 올라설 힘이 없습니다.
- 어허, 어서!!
- 으으으흑... 다, 다리가 저려서...
- 거 어서 올라서지 못하겠느냐?!!
- 으으흑... 선생님...
(사람들의 울음소리)
- 줄꾼은 한 번만 떨어져도 끝장이야. 거 웬 종일을 줄 위에 서있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을 때까지 연습을 한다! 동안아!
- 네, 선생님.
- 저 항아리를 줄 밑에 끌어다 놔라.
- 선생님, 항아리는 왜...?
- 아, 그 얘기하지 않았느냐? 이제부터 줄 위에 올라서서 밤을 새운다.
용변도 줄 위에서 아래에 있는 항아리에 보도록 하고!
- 선생님.
(음성 녹음 및 전통음악)
허나 이처럼 고되고 혹독했던 줄타기 수업이 이동안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할 일 없이 떠돌다가 당시 유명했던 광무대 공연을 구경했는데
그곳 줄광대 재주가 몹시 어설퍼 보이더라는 것이다.
(문 여닫는 소리)
- 단장님 계신지요?
- 누구냐?
- 예, 시골에서 올라온 소년인뎁쇼. 단장님을 만나고 싶어서 그럽니다.
- 음, 내가 단장인데 무슨 일로?
- 아이, 그러세요? 저... 줄 타는 할아버지 재주가 몹시 서툴러 보이는뎁쇼.
제가 한번 줄을 타보고 싶어요.
- 으음... 그래?
- 네, 할아버지보단 잘 탈 자신 있습니다.
- 음... 그럼 내일 낮에 한번 시험을 해보자.
(음성 녹음 및 전통음악)
이렇게 해서 광무대에 입단을 한 이동안은 그곳에서 박춘재로부터 발탈을,
그리고 무용가 김인호로부터 승전무, 승무, 한량무, 태평무, 진쇠무 등을 배우게 된다.
(음성 녹음 및 전통음악)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 선생님, 선생님이 나가셔서 발탈을 하실 순섭니다.
- 아이고, 배야. 아이고...
- 아니?!
- 아이고... 아이고...
- 선생님, 갑자기 왜?!
- 아, 아유, 이... 글쎄 말이야. 갑자기 배탈이 난 모양인데 설사가 나서
못 견디겠으니 자네가 대신 나가서 발탈을 좀 해주게.
- 아니?! 제가요?!
- 아, 아, 아이고...
(북소리)
이것은 이동안이 24세 때 함경도 고무산 그곳 극장의 개관 기념 공연에서였다.
말하자면 정식 발탈을 시작한 그때부터 어린 나이에 국부라는 단체를 만들어
만주, 일본 등지에까지 공연을 다녔다고 한다. 당시 공연 내용은 여자춤, 남자소리,
여자소리, 망건 뜨기, 줄타기, 발탈,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등의 창으로 엮어졌다고 한다.
(전통음악)
또 하나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화성 재인청 세습광대 후예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핏줄엔 그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광대 기질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
재인청에 대해서 심우성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재인청하면은 한마디로 오늘날의 국립극단이라든가 또는 예총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이건 비유를 하자면 그렇습니다. 옛날에 떠돌이 광대가 아닌 광대 가운데에서도 가장 출중한
분들이 모였던 광대청이 바로 재인청입니다. 각 도에 재인청이 전부 있었죠.
그런데 화성, 오늘날의 수원에 있었던 재인청이 가장 컸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재인청의
우두머리를 대방이라고 하는데 화성 재인청의 제일 높은 분은 도대방이라고 일렀습니다.
바로 이 도대방의 후예가 이동안 선생이십니다. 옛날 그 재인청에서 하던 일들을 보면
소리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또 그밖에 여러 가지 기예를 배웁니다. 줄타기도 배우고.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에, 무당들의 이 무가도 배우는 곳이 바로 재인청입니다.
그래서 옛날 제정일치였던 시절에 무속의 유래가 이 재인청으로 흘러와서 그러한
흔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동안 선생은 앞서 여러 차례 얘기도 했듯이
금년에 일흔네 살의 노인이십니다. 이분이 담고 있는 많은 기예가 하루속히 오늘 젊은 세대에게
전승이 돼야 하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한 화성 재인청이 있었던 수원의 화령전에서 이동안 옹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음성 녹음)
(전통음악)
불과 30미만의 젊은 나이에 수원과 인천에 있는 권번에서 춤을 가르켰고
최현, 김백봉, 문일지 등 수많은 무용가에게 자신만이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태평무, 한량무 등의 춤을 가르쳤다는 그는 30대 이후의 인생을
한마디로 바람이었다고 말한다.
(전통음악)
이제 그는 74세의 노인이다. 다행히 줄타기와 전통무 등은 전수자들이
있어서 뒤를 잇고 있지만 발탈만은 배우는 사람이 없어 대를 끊기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재주로 충분히 인간문화재 지정의 가치가 있음에도 아직까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가 아쉬워하는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너무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광대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전통음악)
다음 주 이 시간에는 고성농요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광고)
(전통음악)
풍물삼천리, 태평양화학 제공이었습니다.
(전통음악)
(입력일 : 201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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