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풍물삼천리.
(음악)
특집, 우리 민속을 지키는 사람들. 첫 번째로 신재효 기념 사업회를 소개합니다.
(전통음악-판소리)
광대는 서고 고수는 앉는다. 광대는 창을 하고 고수는 북을 두드리며 반주한다.
광대는 수련과정에서 목이 쉬고 피를 토한 후에 다시 터져 나온, 듣기에는 탁한 것
같으면서도 성량이 크고 변화가 많은 소리로 이루어진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엇모리의 변화 많은 장단과 극과 극을 오가는 소리의 높낮이. 거기다가 유연한
너름새와 구수한 아니리. 예사사람으로는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1인극. 대표적인 남도소리.
이것이 이름 하여 판소리다.
(전통음악-판소리)
따라서 판소리는 곧 우리의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음악으로서는 민속학의 하나이고 문학으로서는
구비문학의 하나이다. 음악과 문학이 공연을 통해 하나에 결합돼있는 것이다. 또한 분량이
대단해서 서너 시간씩을 쉬지 않고 창을 해야 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광대만의 전문적인 창학이며
기교가 세련돼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기도 한 이 판소리.
(전통음악-판소리)
그 엄청난 분량의 사설은 명창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것이기 때문에 가령, 동리 신재효가
없었다면은 이 독보적인 우리 남도소리는 오늘날 어떻게 변질됐을지 아무도 모른다. 동리 신재효는 간단히 말해서
판소리의 사설과 재담을 정립시키고 무질서하게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사설을 하나의 문학으로서
정리한 분이다. 판소리의 이론적 연구가요 연출가요. 또한 판소리 사설의 작가로서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과
수십 편의 담가, 한시문을 썼다고 해서 그 분야의 그런 신재효를 가르켜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지칭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년에 가깝고 그가 남긴 예술은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건만
유감스럽게도 우린 그에 대해서 별반 아는 것이 없고 그의 뛰어난 공적은 오히려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형편이다.
(전통음악-판소리)
다행히 요즘 와서 그에 태어난 전북 고창과 김소희를 비롯한 후학들. 그리고 그의 업적을 연구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신재효 기념관 설립이 추진되고 있는 것은 뒤늦게나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판소리의 인간문화재요
신재효와 같은 고창 출신의 김소희는 이렇게 얘기한다.
(음성 녹음)
(전통음악-판소리)
민속학자 심우성 씨는 판소리와 신재효의 업적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에, 판소리란 소리. 즉, 노래와 재담과 발림으로 짜여 지는 긴 이야기 소리를 말합니다.
민속음악의 모든 노른자위가 모여서 판소리의 긴 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신오위장, 즉
신재효 선생은 조선왕조 순조 12년, 전라도 고창 땅에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분으로서 당시 구전되고 있던 판소리의 가사들을 정리하고 편작한 당시의 문호 중에
한 분이시죠. 그가 없었던들 오늘날의 판소리 가사가 전승되고 있었을지 걱정이 될 만큼 큰
공적을 남기신 분이시죠. 판소리의 체통을 지키는 데 있어서 길이 기록돼야 할 분이십니다.』
(전통음악-판소리)
- 이판, 어찌 되었소?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신이 은밀하게 전라도에 사람을 보내 신재효란 자의 주변을 면밀히
관찰토록 했사온 바-
- 그래서 어찌 됐단 말이오? 신재효란 자가 혹세무민하고 국정에 반감을 품고 작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재효란 자는 현감이 보낸 장계와 동일하게 소리하는 자들과 광대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수십 칸에 이르는 그의 사저에 수백 명의 남녀를 방방곡곡에서 끌어 모아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는 등 선심을 베풀어 그의 추종자들을 나날이 늘려가고 있사온 바-.
- 저저, 저런 고얀 자가 있나...?!
- 하루속히 어사를 현지에 보내시어 그의 심중을 알아내고 엄중히 문책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전통음악-판소리)
이처럼 조정의 오해를 받을 지경으로 당시 널리 소문이 나 있는 신재효건만, 그는 지방고을의
하찮은 벼슬아치에 불과했다. 나이 40이 되도록 벼슬에 있으면서 남도지방의 판소리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당시 소리꾼들을 가까이 해오다가 40에 이르러서는 아예 벼슬을 버리고 자기집에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숙식을 시키며 판소리의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신재효는 그가 직접 지은 광대가라는 판소리 사설에서
이렇게 판소리를 하는 명창의 조건을 규정했다.
- 『우리 행락, 광대 행세 좋을시고. 그러하나 광대 행세 어렵고 어려워라.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셋째는 득음이요. 넷째가 너름새라.』
말하자면 판소리를 하려면은 첫째, 인물이 출중해야 하고 둘째는 사설에 대한 이해와
감정처리가 뛰어나야 하며 셋째는 소리가 좋아야 하고, 넷째는 판소리는 혼자서 일인다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판소리 명창의 귀감이기도 하다.
(전통음악-판소리)
- 전하, 김민수는 비록 상민이나 용모가 수려하고 소리가 뛰어나서 듣는 이로 하여금
큰 감흥을 갖게 한다 하며 그 명성이 전라도 일대에 자자하온바 국창으로 제수하심이
타당하실 줄 아뢰옵니다.
- 오호, 그래? 김민수란 자의 소리가 그렇게 좋단 말이오?
- 그러한 줄 아옵니다. 그의 소리를 한번 들은 자는 오래도록 그 감흥을 잊지 못한다 하옵니다.
- 음... 그는 누구한테 소리를 배웠다 하오?
- 스승이 없이 혼자서 소리를 익힌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 뭣이오? 아니, 그럼 신재효한테 소리를 배우지 않았단 말이오?!
-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전하.
- 그렇다면 국창을 제수할 수 없소! 신재효의 문하가 아니면 결코 국창을 제수할 수 없는 것이 아니오?!
(전통음악-판소리)
신재효는 순조 12년, 1812년에 태어나서 73세를 일기로 1884년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그를 의심하던 조정에서도 나중에는 어떤 창악가라 할지라도 그의 치침과 척도를 거치지
않고는 도저히 명창의 반열에 끼지를 못했으니 국창으로 일생을 떨쳤던 이날치, 박말순, 김세종, 정창업,
김창록. 여류 명창의 비조인 진채선, 허금파 등은 다 그 문색을 거쳐서 친자한 사람들이다.
그의 업적은 대원군 시대에 널리 인정받아 고종은 그에게 오위장을 제수했는데 이것은 그가 문화예술에
크게 공헌함을 포상한 것이었다.
(전통음악-판소리)
한 사람이 수십 명의 역할을 도맡은 극창. 자문자답하고 자창자화하면서 노래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진퇴, 기복, 초심뿐만 아니라 장면의 동작표시와 희로애락의 감정표현까지 절도 있게 진행시키는 판소리.
따라서 한 사람에 의해서 사체 ,구성, 멋이 조화돼 하나의 예술을 낳고 우리 인간으로 지켜야 할 삼강오륜에
바탕을 두어 춘향의 정절, 심청의 효도, 흥부의 우애, 자라의 충성 등을 소재로 하면서 인간의 비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장하는 판소리. 그의 비조라고 할 수 있는 신재효를 우린 너무 오랫동안
소홀히 해왔다. 고창 출신으로 기념사업관 설립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백남주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또한 심우성 씨는 명인들의 말년을 이렇게 얘기한다.
『많은 명인들은 세상을 떠나도 그의 유물과 유적은 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형문화재에 속하는 판소리는 사람이 가고 오면
그림자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신재효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중요무형문화재 5호로서
판소리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판소리의 인간문화재 가운데 벌써 여러분이 세상을 떠나고 계십니다.
김연주 선생, 박녹주 선생의 경우입니다. 지금 생존하신 김여란 선생도 아주 고로하십니다. 이밖에 박초월,
김소희, 박동진, 정광수, 정권진, 박봉술, 한승호. 이분들이 모두 판소리의 인간문화재들이십니다.
건강은 나쁘시고 연로하십니다. 기력으로서 소리를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루속히 그 후계자를
기르는 것이 명인들의 길을 우리가 이어가는 아주 긴요한 일이라 생각이 됩니다. 』
(전통음악-판소리)
이제 뜻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신재효가 재평가되고 그의 업적이 보존된다는 건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비단 신재효뿐만 아니라 많은 명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는 것은 바로 우리 민속을
지키고 오래오래 간직하는 길이다.
(전통음악-판소리)
다음 주 이 시간엔 악기장의 인간문화재 김광주 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풍물삼천리를 마칩니다.
(전통음악-판소리)
(입력일 : 201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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