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숙 극본 이규상 연출
- 여기에요.
- 응. 거기 있었군. 무슨 일이야?
- 아무 일도 없어요. 일은 무슨.
- 아무 일도 없다고? 그렇다니까요.
- 나 참. 아 놀랬잖아.
-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요?
- 느닷없이 회사까지 와가지고 빨리 나오라니 말이야.
- 아주 나온 거죠? 들어갈 거 아니죠?
- 퇴근한 거야. 근데, 시내는 뭣 하러 나온 거야?
- 당신 보러 나온 거에요.
- 날 보러?
- 그렇다니까요.
- 왜?
- 그러면 안 돼요?
-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러잖아. 정말 일부러 나온거야?
- 그래요. 갑자기 당신이 보고 싶어서 애들 엄마한테 데려다 놓고 나왔단 말이에요.
- 내가 보고 싶어서?
- 우습죠 당신?
- 웃음이 나와야 될 텐데 웃음이 안 나와.
- 왜요?
- 이상해.
- 뭐가요?
- 당신, 왜 그렇게 쓸쓸해 보여?
- 내가요?
- 응
- 내가 어떻다고 그래요?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 나 그런 얼굴 처음 봐. 당신, 무슨 일 있었지? 그렇지?
- 아무 일 없다고 했잖아요.
- 아니 그런데 왜 그래?
- 내가 어떻다고 자꾸 그러는 거에요?
- 갑자기 회사까지 온 것도 그렇고, 갑자기 왜 내가 보고 싶어져?
- 나두 잘 모르겠어요.
- 하하 참. 이건 감격을 해야 하는 건지 웃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구만... 하하하
웃지 말아요. 웃지 말고 날 좀 꽉 붙들어 줘요. 여보, 날 좀.(따르릉.따르릉.)
그 사람이야. 안 받아야지.- 엄마! 전화 안 받어?
- 영아야, 전화 좀 받아 보겠니?
- 전화 영아가 받어?
- 아니야. 엄마가 받을게.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 접니다. 할 얘기가 있어요. 듣고 계세요?
- 말하세요.
- 좀 나와 주세요.
- 전화로 하세요. 지금.
- 전화로는 못 합니다. 아파트로 잠시만 와 주세요.
- 안 가겠어요. 우린 아무 얘기도 할 게 없는 사람들이에요.
- 난 할 얘기가 있습니다. 아니 너무 할 얘기가 많아서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할 얘기가 없다구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기다리지 마세요.
- 기다립니다.
- 난 가지 않아요. 미스터 한을 위해서도 가지 않는 게 좋아요. 전화 끊겠어요.
- 엄마, 왜 화났어?
- 엄마 화난 거 아니야.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 왜 그래? 또 무슨 일 있었니? 얘길 해 봐.
-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자꾸 전화가 와 미치겠어. 왜 그렇게 봐?
- 넌 전화도 안 오고 만나지 않으면 그 사람 잊을 수 있니?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자신 없는 모양이구나. 보통 일이 아니야. 정말.
- 보고 싶은 마음하고 잊고 싶은 마음이 똑같이 치열해서 갈등을 느끼는 거야.
- 잊고 싶은 마음이 이기기를 바란다.
- 그렇게 될 거야. 걱정 마.
- 근데 뭘 괴로워해.
- 그 사람 때문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그래서 미치겠어
- 철부지도 아닌데 설마 무슨 일이야 저지르겠니.
-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
- 뭐라구?
- 가엾은 사람이야.
- 아유. 가슴 떨려...
- 경화가 그 사람을 좀 붙들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그러고 보면 이게 다 경화 때문이야. 경화를 보러 가지만 않았어도.
- 왜 경화 때문이니?
- 그래 경화 때문이 아니지.
- 나 간다. 애들이 기다릴 거야.
- 그래. 가 봐라.
- 아니. 간다더니 왜 그러고 섰어?
- 경숙아
- 왜?
- 내가 바람기가 있는 여잘까?
- 사랑과 바람기를 혼돈할 만큼 니가 아둔한 여자니?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가 봐.
- 간다.
- 응. 안 나갈게.
- 어유~ 우리 애기 깼구나. 잘 잤어?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돌아가세요.
- 못 돌아갑니다.
- 대체 어쩌겠다는 거에요. 돌아가세요. 부탁이에요.
- 차라리 날더러 죽으라고 하세요.
- 뭐라구요?
-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애요. 전화를 하면 끊어 버리고 기다리면은 오지를 않고. 기다리다 지쳐 찾아가면은 돌아가라고 하고. 숨이 막혀요.
- 그렇다고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요. 네?
- 꼭 내가 숨 막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사람처럼 그러시잖습니까 지금.
- 미스터 한.
- 어제 하루를 제가 어떻게 보냈는지 아세요? 집 없는 개처럼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 뭐라구요?
- 왜 그렇게 온통 허전하고 추운지. 그렇게 견디기 힘든 밤은 없었습니다. 당신이 왜 그렇게 아득히 먼 데 있는 것 같은지. 술에 젖어서 당신 아파트 앞까지 갔었어요.
- 밤에 말이에요?
- 네
- 밤에 거긴 왜?
-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그래서 갔었는데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니 그 불빛이 왜 그렇게 날 쓸쓸하게 만들던지. 왜 그렇게 서럽던지.
- 그만 하세요. 그만 해요. 거긴 뭣 하러 갔었어요. 뭣하러. 왜 이렇게 날 가슴 아프게 해요. 왜?
- 혜진씨....혜진씨....
- 다신 밤에 거기 오지 말아요. 그게 뭐에요. 그게.
- 한사코 그 쪽으로만 가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나도 날 어쩌지 못하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제12화 끝이라는 생각이 절 미치게 만들어요 ◀ ▶ 제14화 우린 서로에게 파멸일 뿐 (입력일 : 2007.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