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7호, 여기로구나. 모험하는 기분인데?
‘열쇠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어요. 아무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어디... 어머나. 바다 같구나.
바다야. 바닷속이야. 바닷속 같애. 이 물빛 카페트. 발목이 빠지네. 부드럽고 푹신하구나.
저기 창엔 하늘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벽에 걸린 저 돛을 좀 봐. 어머, 갈매기도 있어. 바닥은 온통 물빛 카페트가 깔려있고
하얀 벽엔 커다란 돛이 걸려있고, 저 쪽 벽에 그려진 갈매기는 살아서 날아가는 것 같애.
아파트 안을 다 헐어서 하나로 터 버리고 꼭 바닷속 같이 만들어 놨구나.
‘거기 가시더라도 웃진 마세요.’
웃지 않아요. 왜 웃어요? 여기 앉으면 한 마리 싱싱한 바닷고기가 된 것 같은데 왜 웃어요.- 언제 오셨어요?
- 어머.
- 언제 오셨어요.
- 소리도 없이 어떻게...
- 문을 열어도 못 듣고 계셨어요.
- 그랬었군요. 나 지금 너무 놀랍고 신기해서... 근사해요 멋지구요. 정말 바다 같애요. 어쩌면 방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요?
- 웃진 않으셨어요? 아파트 한 채를 헐어버리고 이렇게 만들어 놨다고 웃진 않으셨어요?
- 웃지 않았어요. 그냥 놀라워요. 이런 방을 만들 수 있다니.
- 내 어머니가 보시면은 미친짓이라고 할 겁니다.
- 어머니?
- 아버지도 친구들도 경화도 다 웃을 거예요. 난 아홉평짜리 아파트에서 온갖 잡동사니에 묻혀 살거든요.
- 하지만 너무 멋져요. 난 이런 방을 처음 봐요. 여기 오면서도 전혀 상상도 못했어요.
- 전혀 힌트를 안드렸으니까요.
- 호기심만 가지게 하셨죠. 하긴 그 호기심 때문에 여기 오기는 했지만 오기를 잘 했어요. 안왔으면 이런 방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냈을 거예요.
- 앉으세요. 차를 끓이겠어요.
- 차를 끓일 수 있어요?
- 저 쪽 구석을 보세요. 차 도구가 있죠? 그 옆에 전축이 있고요. 저게 이 방의 유일한 가구이며 집기예요. 앉으세요. 의자가 없으니까 그냥 바닥에 앉으셔야 합니다.
- 의자 보다도 이 카페트가 더 푹신할 것 같애요. 이리로 가져오세요. 제가 끓이겠어요.
- 그러시겠어요? 좀 있으면은 물이 끓을 겁니다.
- 매일 여기 오나요? 이 시간에?
- 거진 매일 오긴하지만은 오는 시간은 일정치가 않아요. 일을 하다가 문득 오고 싶어서 막 달렸죠. 어쩌면 와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 내가 여기 올거라는 확신이 있었던가요?
- 제가 호기심을 갖게 해 드렸으니까요. 담배 피워도 되죠?
- 피세요. 이 아파트 안이 몇 평이나 되죠?
- 스무평 입니다.
- 더 되어 보여요. 굉장히 넓은거 같애요.
- 하나로 툭 터 놓은 데다가 가구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여기 들어와 살 생각이었는데 느닷없이 이런 발상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 이 방을 손수 꾸몄나요? 갈매기도 손수 그리구요.
- 네. 혼자서 다했어요.
- 혼자서...
- 실내장식을 좀 했었거든요.
- 지금은 안하나보죠? 과거형으로 얘기하시는거 보니까.
- 네. 싫어졌어요. 군더더기 같애요. 전 때때로 내 방에 있는 가구며 책이며 벽에 걸린 그림 같은걸 내다 버리고 싶어져요. 다 내다 버리고 빈 방에 앉아있고 싶어져요. 이리로 이사하면서 버릴 수 있는건 다 버려야 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버리자니 버릴게 없어요. 그래서 이사를 포기하고 대신 이 방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아, 물이 끓는군요. 드세요.
- 네. 미스터 한이라고 하셨죠. 미스터 한은 여기 앉아서 뭘 하세요?
-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 그럼 뭘 생각하세요? 여기서?
- 여기 앉아 있으면 뭐든 다 잊을 수가 있어요.
- 잊어야 할게 많은 가보죠?
- 잊어야 할 것도 없는데 뭐든 다 잊어버리고 싶어요. 사는게 지겨워요.
- 늘 그래요? 그럼 이 방까지 실증이나면 그 땐 어쩌죠?
- 그 땐...
- 그 땐...
- 죽을지도 모르죠. 아마.
- 죽을 지도...
-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립니다. 보세요. 이 방이 싫어질 수가 있는지. 여기는 환상의 바답니다. 파도소리도 없고 갯내음도 않나지만은 파도소리 갯내음 나는 바다보다 더 진한 바다냄새가 나요. 실체는 환상보다 더 단조로울 수도 있어요.
- 그건 그래요. 이 방은 바다보다 더 바다냄새가 많이나요. 하지만...
- 하지만 뭡니까?
- 아니예요. 어머, 차가 다 식어버렸네요.
- 다시 끓여야 겠군요.
- 그래요. 다시 끓여요. 뜨거운 차를 마시고 싶어요.
- 물을 200도로 끌이죠. 찻잔에 부어도 식지 않게요.
- 앞으로 또 거기에 가실 건가요?
- 혼자 그 방에 앉아있어 보고 싶어요.
- 맘에 드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 그런데 왜 내게 그 방을 보여주고 싶었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면서요?
- 화랑에서 뵜을 때 문득 그 방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그 땐 생각 뿐이었죠. 그런데 다시 뵙게 됬어요. 그래서 열쇠를 드린겁니다. 다시 뵙게 되지 않았으면은 내내 혼자서만 드나들었을 겁니다.
- 화랑에서 보고 다시 볼 수 없었다면 나 영영 그런 근사한 방을 구경 할 수 없었겠군요. 사실은 오늘 거기 간건 열쇠를 돌려드리려고 간거예요. 가보지 않고 돌려드리면 실망하실 것 같아서 말이죠. 물론 얼마간의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요.
- 그럼 열쇠는 언제쯤 돌려주실 건가요?
- 글쎄요. 지금은 그 때가 언제가 될지 잘 모르겠는데요.
- 화랑에서 되먹지 않은 전위미술 구경하시는 것보다 더 나았던가 보죠?
- 물론이죠. 그 방은 훌륭한 예술작품 이던데요 뭘. 타이틀은 환상의 바다.
- 아하하하.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 그렇게 멋진 방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왜 사는걸 지겨워 하시죠?
- 그걸 알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 내가 바보같은 질문을 했군요.
- 왼쪽으로 꺾을 까요?
- 아니예요. 저기 전봇대 있는데 쯤에서 세워 주세요.
- 그럼 걸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 좀 걷지요 뭐.
- 밖에 추운데요 걷기에는.
- 괜찮아요. 걷고 싶어요.
- 거기 언제 가실 것 같으세요?
- 궁금해요?
- 네.
- 지금은 모르겠어요. 가고 싶을 때 가게 되겠죠. 어쩌면, 내일 당장 가게 될 지도 모르죠.
제4화 “지금 난 심심한건가? 한번 가봐?” ◀ ▶ 제6화 “난 지금 누굴 기다려” (입력일 : 2007.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