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에즈베리 파크의 저녁놀
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물 여섯번째.
- 산나물이며 쑥을 뜯으면서 한참동안 미국땅을 잊어버리고 있었어. 어린시절 동네 언니들 따라 다니면서 냉이며 달래를 캐던 일이 떠오른거지. 실개울엔 아직 살얼음이 조금씩 남아 있는데도 햇볕은 어쩜 그리도 따뜻 했던지. 다른 언니들은 바구니가 그득 하도록 캤는데 나는 왜 그렇게 못 캤나 몰라. 큰 아이들 구박을 받으면서도 한사코 따라 다니느라고 해 기우는 줄을 몰랐으니까. 그 이후 들에 나가 나물을 캐 본 일이라곤 없지 않니? 그런데 몇 십년이 지나서 아득한 땅에 앉아 나물을 캐 보다니 뿌리가 거센 냉이를 온 땅에서 캐 내느라고 있는 힘을 다해 용을 쓰다가 끝내 안 캐지면 엄마 하고 울어버릴수가 있었는데 이젠 엄말 찾아봐야 소용 있니? 행주치맛자락으로 눈물이며 콧물을 닦아주던 엄마는 없어.
- 아이구 얘, 눈물 난다. 우리가 지금 엄마 찾을 나이냐? 그래, 나물은 갖다가 묻혀 먹었니?
- 어, 당신은 아이들 하고 내려. 나 혼자 가게 좀 들러보고 올테니까.
- 그러세요. 쑥국 끓여 놓을게 금방 들어 오세요.
- 또 된장 냄새 풍길거야?
- 녀석들, 너 된장찌개 아니면 밥 안 먹던 때 엊그저께야.
- 엄마, 2년이 엊그저께 라고?
- 영아야, 너 나물 보따리 들고 들어와. 영호는 아직 조심하고.
- 네.
- 네. 아빠.
- 다녀 오세요. 아빠.
- 다녀 오세요.
- 아휴, 내가 집에 왔구나.
- 오빤 그럼 집에 못 오고 내내 병원에 있을 줄 알았어?
- 야, 나 얼마나 심각 했는데 그래. 내가 이대로 죽으면 내 청춘 너무 억울하다. 나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그랬단 말이야.
- 아이구 저 넉살 떨지 말고 어서 올라가서 누워요. 내 얼른 저녁 지어 줄 테니까.
- 엄마, 우리도 인제 미국 시민 됐으면 미국식으로 먹는게 어때요? 맨날 밥 하고, 김치 먹고, 된장 먹고.
- 밥을 먹어야 먹은 것 같으니까 그렇지. 몸에 벤 냄새야 어쩌겠니. 여기 사람들 노랑내가 우리한테 역 한거나 마찬가지겠지 뭐. 어, 아빠가 벌써 오시나?
(딩동~)
- 나가요. 어머나, 어머나 누님 왠일이세요?
- 아, 영호를 퇴원 시켰으면 전화 한마디 쯤 있어야지. 응?
- 아휴, 우리 병원 갔다가 깜짝 놀랐잖아. 누가 영호 납치해 갔나 하고.
- 어서 오세요. 고모부.
- 어서 오세요. 고모.
- 응. 그래.
- 전화 드릴 새가 없었지요. 바로 필라델피아로 갔었거든요.
- 필라델피아는 왜?
- 고모부, 우리 산나물이랑 많이 뜯어 왔어요. 고사리랑 취나물이랑 쑥이랑 이것 좀 보세요.
- 어, 그게 모두 무슨 풀이야?
- 피크닉 갔었구나? 아휴, 많이들 뜯었네.
- 이거 모두 약초 하는 거야? - 네. 모두 약초 하는 거에요. 밥 하고 같이 먹어 하는 약초요.
- 당신도 이런거 먹을 줄 알아?
- 아이 그러믄요. 배추나 파 보다 고급 풀 이에요. 맛도 더 있구요.
- 그럼, 우리도 이런거 뜯어와 해지 그래지?
- 아이 그럽시다. 아이 참, 니네 그거 몇 마리 주고 가져.
- 뭔데요?
- 응. 우린 오늘 바다 낚시 갔었단다.
- 이야, 신났겠다. 많이 잡으셨어요?
- 많이 잡았지만 다 안 가지고 왔어.
- 왜요?
- 잡은거 다 가져 오는거 아니야. 도로 물에 놔 줘야지. 그거 다 가져오면 벌금 문다. 새끼 생선 너무 어린거 가져와도 안돼고, 엄마 생선 임신 한거 가져오면 더 비싼 벌금 낸다.
- 아 참, 영호 너도 알아 둬라. 낚시를 하는데도 지켜야 할 법이 많아요.
- 누가 그런거 일일이 조사 해요?
- 일일이 조사를 하는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워낙 잘 지키지 뭐. 더러 헬리콥터로 지키기도 하고.
- 어머, 아빤가 보다.
(딩동~ 딩동~)
- 어, 당신 왜 그렇게 저녁을 조금 드셨어요? 쑥국이 입에 안 맞았어요?
- 당신, 차에 가서 뭣 좀 가져 오겠어?
- 뭔데요?
- 글쎄 차 속에 있는거 가지고 오라구.
- 어디, 트렁크에 있어요? 아니면...
- 가 보면 알테니 가져와.
- 그러지요.
- 후...
- 문병 왔다면서 가지고 왔어요. 마침 외출 하려다 가게 앞에서 만났죠.
- 어젯밤 걱정이 돼서 한 잠 못 잤습니다. 미세스 변 아픈거 가슴 아픕니다. 이 꽃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입니다. 하얀 후리지아, 은은하게 풍기는 향내가 꼭 미세스 변 닮았습니다.
- 미친놈.
- 여보, 이게 왠 꽃 이에요?
- 당신을 애타게 사모하는 사람이 갖다 놓은 꽃이야.
- 네?
- 꽃만 보고도 알았을 텐데 왜 딴청을 부리지?
- 제가 무슨 딴청을 부려요?
- 누가 가져 왔겠어?
-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 정말 몰라?
- 글쎄 짐작은 가지만...
- 짐작 가는게 누구야?
- 헤밀턴 씨 아니에요?
- 왜 그 사람이라고 짐작을 하는거지?
- 그냥...
- 그냥이 뭐야. 내가 사왔다곤 짐작 못 하나?
- 당신이요?
- 그래.
- 아무리...
- 하하하... 하하... 난 자기 여편네 한테 꽃 하나 사 줄 위인도 못 된다 그거지?
- 그런게 아니라 저번에...
- 저번에도 뭐?
- 여보, 그냥 잡시다. 모처럼 기분 좋게 바람 쐬고 와서 이게 뭐에요?
- 저번에도 뭐냐고?
- 아이 또 아이들 깨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 저번에도 뭐냐고 묻잖아!
- 글쎄 여기 사람들 예의로 꽃 사들고 다니는거 뭘 그렇게 걸려 해요? 모르긴 몰라도 돈 좀 있는 사람 같은데 그까짓 꽃 몇 송이 좀 받으면 어때요? 우리 정말 괜한 일로 의 상하지 말아요. 네?
- 뭐야? 돈 좀 있는 사람 같아? 인제 보니까 점수 하날 더 먹이고 있었군?
- 여보! 정말 왜 이래요. 내가 헤밀턴 그 사람 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상하게 보는 거에요? 그까짓 노랑내 나는 코쟁이 다발로 갖다줘도 나 일 없어요. 남들이 부러워서 배를 앓을 만큼 특별한 우리 였잖어. 내가 당신한테 반하고 당신이 나한테 반하고 그런 우리예요. 제가 당신이 반했던 여자가 그 정도 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렇게 헐값으로 쳐도 좋은 거냐구요. 여보, 저 안아 주세요. 그리고 천천히 보세요. 우리 피곤해서 서로 얼굴 쳐다 볼 새도 없었지요? 자요 안아줘요. 우리 서로 꼭 붙들고 놓치지 말아요. 아무리 바람이 세도 아무리 번개가 쳐도 우리 놓치지 말고 꼭 붙들고 살아요. 네?
- 여보, 미안해. 나도 모르겠어. 나도 날 모르겠다고.
- 당신, 옛날에 저더러 울보라고 밤낮 놀렸죠. 당신 이러시면 나도 놀려 줄거에요.
- 그래. 그려. 놀려줘. 놀려줘.
- 여보. 여보...
- 손수건 여깄다.
- 난 결사적 이었어. 어떻게 하든 서로 당하는 고통을 면해보고 싶었어. 그인들 편했겠니.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돌아가는 자기 마음을 어떻게 하겠어.
- 순석 씨 원래 소심한 사람 아니었니.
- 소심하지 않아도 이 미국이라는데가 터가 세서 왠만한 심장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곳이야. 더구나 제3국에서 여길 낙원으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 땅이야 낙원이지. 무진장한 자원에 무진장 넓은 땅에 산천이며 기후 나무랄데가 하나나 있니? 하지만 우린 나무나 짐승처럼 자연 속에서만 사는 식물이나 동물이 아니고 인간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것도 형형색색의 인간들 하고 말이야.
- 사슴처러 기다란 목을 가진 수화는 아무렇게나 틀어올려 핀으로 잠근 머리를 풀어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빗질을 하듯 다섯 손가락을 벌려 구불구불한 머리채를 훑어 내리고 있었어요. 오랜 피로에 지쳐 얇은 눈꺼풀이 홀싹 패어 있었지만 가뭄에 비 내리듯 오랜만에 흘린 눈물 때문인지 눈동자는 한결 초롱거렸습니다.
-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 파크의 저녁놀 스물 여섯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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