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물 네번째.
- 어허허. 너 괜찮구나. 든든한 스폰서가 있으니.
- 스폰서?
- 영아 대학가면 돈 대주겠다는 사람도 있구.
- 어. 난 또 무슨 소리라구. 다 까닭이 있단다.
- 까닭이 있어?
- 여기서야 이혼하면 남자가 보통 골탕이니? 여자가 재혼하지 않는 한 평생 대줘야 하는걸.
- 그거야 남편하고의 문제지 남편의 누이되는 사람이 무슨 상관이야?
- 글쎄 들어봐. 차차 얘기 할테니.
(똑똑똑)
- 영아야. 영아야?
- 왜요?
- 엄마 깨워. 나가야지.
- 엄마 아퍼요. 밤새 불덩어리 같았어.
- 뭐야? 문 열어봐 영아야.
- 싫어요 아빠. 엄마 또 때릴려고?
- 영아야, 그런소리 하는거 아니야. 문 열어드려.
- 참 엄만...
- 여보, 많이 아픈거야? 어디 봅시다.
- 아이 왜 이러세요.
- 아니 이거 열이? 가만, 체온을 재 봐야지 안되겠는걸. 영아야, 저 방에 가서 침대 서랍에 체온계 가지고 와.
- 아이...
- 여보, 언제부터 이런거야. 응?
- 몰라요.
- 여보, 어젠 내가 흥분 했었나봐. 미안해.
- 여깄어요 체온계.
- 어. 이리줘. 여보, 팔 이쪽으로 들어.
- 엄마, 내가 오트밀 만들까?
- 오트밀은 무슨. 커피보트나 올려놔. 아빠 드시고 나가게.
- 오늘 주말이잖아. 주말에 가겐 안 쉬어도 주말 기분은 내야 된다고 엄만 주말마다 특별 메뉴 했잖아?
- 정신이 나가서 주말인줄 몰랐구나.
- 아니, 이거 열이 40도 다 되는데 어떡하지?
- 괜찮아요. 아스피린 먹었으니 곧 나을 거에요. 어서 나가 보세요.
- 응? 나 혼자 나가라구?
- 그럼 어떻게 해요.
- 글쎄.
- 엄마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나가요.
- 아니 나가서 일 하자는게 아니구. 저 말이야 바람을 쐬면 좀 나을지도 모르니까 가게 가서 누워 있는게 어때?
- 뭐라구요?
(따르릉~)
- 으휴, 이런 내 미친다니까. 새벽부터 또 무슨 전화야. 여보세요?
- 어. 너냐? 들어와 있었구나.
- 아 누님 이세요? 들어와 있다니요?
- 아 어젯밤 다 늦도록까지 리키가 뭐라 그래서 어찌나 화가 나던지 원. 아 게다가 수화까지 전화를 걸어오고.
- 네. 알았어요. 끊어요.
- 얜, 아 뭘 알어?
- 글쎄 알았다구요. 끊어요.
- 너 괜히 조심해. 아차 잘못되는 날에 거덜나는 거야.
(따르릉~)
- 거 귀찮게 야단이야? 글쎄 알았다니까요!
- 뭘 알았어?
- 어? 어. 왠일이야 새벽부터.
- 자네나 나나 이 시간이 새벽인가?
- 그런가?
- 우린 오늘부터 주말에 쉬기로 했지.
- 놀라운 뉴스군.
- 모처럼 푹 쉬려니까 이놈의 버릇이 들어서 잠이 와야 말이지. 자네도 우리 본 받을 생각 없나?
- 자넬 본 받아서 몇 년 더 안놀아야 되겠네.
- 그러지 말고 우리 피크닉 삼아 산으로 고사리 뜯어러 안 가겠나?
- 고사릴 뜯으러 가?
- 산에 지천으로 깔린 고사리 쑤이기 전에 지금 뜯어다 말리면 일 년 반찬 된다구.
- 아 우린 지금 가게 나가는 길이니까 다음에 또 전화 함세.
- 이 봐, 그럼 내일 갈까?
- 어. 하여튼 내일 또 전화 하자구.
- 아빠, 토끼 아저씨네 전화야?
- 뭐야? 토끼 아저씨라니.
- 가족들이 모두 토끼 눈 같이 빨갛다고 했잖아. 돈 버느라고.
- 어. 그래.
- 인제 우리가 토끼넨가?
- 뭐야?
- 미세스 변? 수, 일어나서 주스 좀 드세요.
- 아, 케이 미안해요. 이렇게 케이 자릴 차지하고 누워서.
- 무슨 말씀을요.
- 그 이 드리버리 나갔어요?
- 네.
- 이건 말도 안돼요. 인간도 아니에요.
- 뭐가.
- 이게 사랑하는 거라고 본인은 생각 하겠죠? 이게 뭐에요? 열이 40도나 되는 환자를 가게까지 끌고 와야 되겠어요? 수는 바봅니까? 벙어리에요? 이러다가 정말 중병에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 케이는 아직 결혼을 안해봐서 모르는게 있어요.
- 그런 결혼 안합니다. 서로를 괴롭히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뭣땜에 결혼을 하는거죠?
- 케이 나가봐요. 문 소리가 난거 같은데.
- 수는 내가 이렇게 옆에 있는게 두려운 거죠? 미스터 변이 또 오해를 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고 있는 거죠?
- 아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 다 압니다. 미스터 변의 자존심 이해 합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열등의식 이에요.
- 케이, 자꾸 그러면 화 낼 테야.
- 화 내세요. 화라도 내 보세요. 그러면 어디에다 정말 화를 내야 할건지 알게 될 테니까요. 어서 오세요. 아, 헤밀턴 씨.
- 헤밀턴?
- 하하하하. 주말에도 열린 가게가 있다는건 사는 사람 입장에서 다행한 일 입니다.
- 그렇지요.
- 내외 분은 어디들 가셨습니까?
- 아니요. 네. 잠깐.
- 어 참, 영호 차도는 어떻습니까?
- 글쎄요. 괜찮겠죠. 자라는 나이니까요.
- 네. 하하하. 젊은 나이 라는건 참 좋습니다.
- 헤밀턴 씨는 젊지 않으신가요? 청년 같으신데요.
- 젊다는건 얼굴로 말하는게 아니라 무모한 모험도 할 수 있고, 무슨 일에 망설이지 않을 수 있고 그럴 때를 말하는 거죠.
- 아휴, 뭐 망설이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 오호호호. 뭐 이를테면 그렇다는 얘깁니다.
- 아, 미스터 변이 돌아오는 군요.
- 아 그래요?
- 아 아니...
- 안녕 하십니까. 날씨가 좋습니다.
- 문병 이라도 오셨나요?
- 문병 이라니요?
- 아퍼서 죽게 생겼으니 문병 와 달라고 전화라도 하던가요?
- 누가 한 말 입니까?
- 이런 엉큼한 자식 봤나. 저 뻔뻔한 상판데기에 침이나 뱉어 버릴까 보다.
- 영호 말고 누가 또 아픕니까?
- 야, 내숭 떨지 말고 이리 나와.
- 스톤, 수가 저 안에 있는건지 이 사람 몰라요.
- 뭐야? 아니 그럼.
- 아 뭐 기분 안좋은 일이 있는 겁니까?
- 아 아 네. 아닙니다. 미안 합니다. 주말인데 어떻게 쇼핑을 나오셨나요?
- 네. 방금도 저 청년하고 얘기 했습니다만 가게를 경영하는 입장에선 괴롭겠지만 물건을 사는 입장에선 이런 가게가 있다는게 여간 좋은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 그렇지요. 그 대신에 우린 남이 얻지 못하는 수입을 벌지 않습니까. 남들이 돈 쓰는 시간에 우리는 도리어 돈을 버는 거니까 일석이조 라고 할까요?
- 아니 스톤, 스톤 무슨 일을 그렇게 하지?
- 아이구 글쎄 말이다. 아휴 참.
- 어서 오세요. 아니 일이라니요?
- 어머나, 아이구 헤밀턴 씨도 문병 오셨군요?
- 오래간만 입니다 헬렌 왕. 리키 왕도 오랜만이군요.
- 어. 왔어요? 스톤, 환자가 어디있어? 영아한테 듣고 깜짝 놀랐다. 열이 40도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가게에 데리고 나와 하나? 스톤 정신 있는거야? 병원으로 가자고 왔다. 우리 가게 오늘 열었어도 말이야.
- 그래. 순석아. 아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니? 그만한 것 쯤 모를 니가 아닐텐데.
- 아 모두들 오셨어요?
- 어머!
- 너무 염려들 마세요. 몸살 기운이 좀 있는걸 가지고 괜히들 그러세요.
- 여보, 당신 정말 이렇게 하기야?
- 네. 그렇게 하기니까 아무 말씀 마세요. 제가 안 일어나면 필경 저 칸막이 뒤 지져분한 속을 모든 사람한테 구경 시켜야 했겠죠. 그래도 되는 거에요? 그나마 사람의 속은 눈에 안보이니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 열이 나서 가뜩이나 벌겋게 충혈된 수화의 두 눈 에서는 불꽃이 튀었던 겁니다.
- 장미자, 김수희, 김규식, 오세홍, 설영범, 안경진, 장광, 유해무, 나레이터 고은정,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섭.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파크의 저녁놀 스물 네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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