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열 다섯번째.
- 영호야, 그 꽃 도로 갖다 쓰레기 주머니에 버려.
- 아이 아깝잖아요.
- 엄마, 이 꽃 집에 가져가서 꽂아노면 좋겠다. 얼마나 이뻐?
- 여러말 말고 갖다 버려. 누가 버렸는지 모르지만 쓰레기 주머니에 있는 꽃을 왜 줏어다 꽂니?
- 우리 쓰레기 주머니에 있었단 말이야.
- 우리 주머니에 있었어도 그렇지. 혹 옆 가게에서라도 자기네 주머니가 차서 우리한테 버렸을지 아니?
- 엄마가 사온거 아니란 말이죠?
- 엄마가 사왔으면 왜 버리겠니? 그 비싼 꽃을.
- 진짜 이 꽃 무지 비쌀텐데.
- 엄마, 왜 미국은 꽃이 그렇게 비싼거야? 거리에는 꽃이 많은데 파는 꽃은 비싸거든?
- 왔다갔다 하면서 공짜로 구경만 하고 사지는 말라고 비싼게지 뭐.
- 아하하하. 아이 그런게 어딨어.
- 꽃이 많으면 파는 꽃도 싸야 되는거 아니에요?
- 글쎄다. 낸들 아니?
- 정말 모를 노릇이었어요. 공원이나 길숲에 수목이 우거진 곳이면은 어디나 꽃은 피어 있었죠. 헌데두 가게에 있는 꽃은 비쌌습니다. 정갈하게 꾸며진 응접실에 생화를 끊이지 않고 꽂는다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엄청난 낭비니까요. 집안에 생화를 꼽아 놓는것 만으로도 그 집의 재정 형편을 짐작 할만큼 꽃꽂이는 고급 취미에 속하더군요. 그래도 어느 집이든 식탁이나 화장실에 장미나 카네이션 한 송이 쯤은 반드시 꽂혀 있어요. 이제 막 피어나서 이슬을 담뿍 머금은 듯 싱싱한 꽃송이가 말이에요. 다만 그 꽃은 향내를 풍길 줄 모르는 조화라는 점이죠. 입을 다물 수 없이 놀라운 플라스틱 조화의 솜씹니다. 믿기지 않아서 손으로 만져 보면요 금방 아스라질듯 감촉까지도 틀림없는 생화에요. 장미 가지에 까실까실한 어린 가시며 또 금방 손에 묻어날 듯 붙어있는 꽃술이 영락없는 생화라서 외려 향내가 없는게 좀 이상할 정도죠. 허나 수화네 가게에 쓰레기 주머니에 버려진 후리지아 묶음은 향내부터 풍겼으니 틀림없는 생화 였습니다.
- 엄마, 설마 아빠가 버리신건 아니겠죠?
- 아빠가 돌았나? 저 예쁜걸 버리게.
- 영아야,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돌은게 뭐냐?
- 말도 안되니까 그러지 뭐.
- 그래. 어쨌든 그 꽃은 우리가 모르는 꽃이니까 갖다 도로 버려. 우리, 이런 일 없었던걸로 하자.
- 없었던걸로 하자. 사실은 없었던게 아니죠? 쓰레기 주머니에 버려진 후리지아 한 묶음이 왠거냐고 수화는 흔연하게 남편한테 물어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걸 수화는 없었던걸로 해버린게 잘못 이었죠. 아이들은 무심히 흘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사실 곧 잊어 버렸구요.
- 어서 오세요. 어머나, 이렇게 늦게 왠일들이세요?
- 어. 있었군.
- 하하하하. 미세스 변, 수고 합니다.
- 집에 가는길에 아직 가게에 있을거다 하고 들렀지.
- 스톤이 어디 갔어요?
- 아이들이 너무 고단해 한다고 데려다 주러 갔어요. 곧 나올 거에요.
- 저녁밥은 먹기나 하고 있는거야?
- 이따 들어가서 먹어야지요 뭐.
- 하하... 미세스 변 가게하고 부터 얼굴 아주 나빠져 했어. 우리사람 가슴 아프다 이거.
- 아이 고모부도. 괜히 그렇게 보시니까 그렇죠.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따르릉~)
- 어머나, 이 시간에. 배달 주문이면 큰일인데. 여보세요? 네. 그렇습니다. 네? 어머나. 이렇게 늦게 왠일 이세요?
- 난 혹시 가게가 닫혔으면 어떡하나 했습니다.
- 왠걸. 벌써 닫나요. 왜그러세요?
- 아 저, 가게가 아주 아담 하더군요.
- 어머나, 저희 가게에 와 보셨어요?
- 아니, 미스터 변 얘기 안했습니까?
- 네?
- 아침에 갔었죠. 마침 안계시더군요. 모처럼 가게 전화번호 까지 알려 주셨는데 들르질 못해서 그동안 부담이 됐었습니다.
- 네. 오늘 무척 바빴어요. 미스터 변 하고 얘기 나눌 틈도 없었어요.
- 오, 그러셨습니까.
-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건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 아 뭐 그까짓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제 작은 성의 입니다.
- 네? 무슨...
- 아 뭐 그건 그렇고 몇 가지 배달 부탁하려고 전화 했습니다만 가능하신지 모르겠군요.
- 글쎄요. 지금은 차가 없어서...
- 아니, 배달해 달라는거야? 어딘데?
- 어. 우리가 가는길에 해주지 뭐.
- 아이 어떻게 그래요.
- 아이구 잔말 말고 빨리 주문이나 받어.
- 저 헤밀턴 씨, 말씀 하세요. 배달이 되겠습니다.
- 오, 그래요? 저 어니언 하고, 파 하고, 오이 하고, 호박, 바나나, 메론을 좀 보내 주십시오.
- 서양 남자가 별걸 다 먹네.
- 몇 킬로 들이로 보내 드릴까요?
- 제일 큰 포장으로 주십시오. 우리집에 식구 많아서 많이 먹습니다.
- 감사 합니다.
- 천만에요. 종종 신세 지겠습니다. 당분간은 출장이 없을 테니까요.
- 네. 그러세요?
- 미안 합니다. 밤 중에. 며칠만에 집에 와 보니 모든게 엉망 이군요.
- 그러시겠죠.
- 오자마자 아이들 이발 시키고, 청소 하고 그러느라고 텅 빈 냉장고를 이제야 확인 했습니다.
- 아이들이요?
- 네. 동양의 귀여운 고아들이죠.
- 네. 사랑 하시나 보죠?
- 네. 무척 사랑 합니다. 미세스 변도 아이들 사랑 하시죠?
- 네. 저도 사랑해요.
- 부럽습니다. 아이들 한테는 아빠보다 엄마가 더 필요한데 말입니다.
-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사랑 하신다니 충분 하겠죠.
- 하하하하. 이거 전화가 너무 길었군요. 미스터 변께 양해 구해 주십시오.
- 양해 하고 말구요.
- 부탁 합니다.
- 감사 합니다.
- 으으음. 음.
- 헤밀턴 그 사람 오션타워에 산다고 했지?
- 그렇다나 봐요. 밤 중에 무슨 주문이 그렇게 길어?
- 글쎄 말이에요.
- 그 사람이 저번에는 말이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아 했지?
- 네. 뭐 고아들을 데리고 사나 봐요. 동양 아이들 이라는 군요.
- 도 동양 아이들? 한국 아이래?
- 모르겠어요.
- 늦었는데 갑시다.
- 물건이 배달해 줘 해야지.
- 쳇, 그런가? 아니 순석이 얜 아 집에서 뭘 하길래 여직 안나오누?
- 글쎄요. 전화를 해봐야 겠네. 아, 지금 오는군요.
- 잘 돼간다.
- 응? 무슨 소리야?
- 아무것도 아니에요.
- 뮤지컬 좋았어요?
- 뮤지컬이야 좋았지.
- 그런데.
-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 나는 자 했어. 젊은 아이들 미쳐서 뛰고, 춤추고, 잡소리 하는거 재미없어 해서.
- 미쳐서 뛰고 춤추는게 젊은 아니들 뿐인가요? 이 땅에 살면 모두 원 전염병에 걸리는 건지 원.
- 무슨 말이에요?
- 무슨 말인지 모를거다. 모르는게 속 편하지.
- 여보, 배달 주문이 있는데 어떡하지요?
- 이 시간에?
- 조금 아까 전화가 왔는데요.
- 어디래?
- 오션타워요.
- 오션타워? 누군데?
- 헤밀턴 씨 래요.
- 뭐?
- 차가 없어서 안 받으려고 했는데 누님이 갖다 주시겠다고 해서.
- 아니, 우리 배달을 누님 한테 해달랠려고 주문을 받았단 말이야?
- 스톤이 대신 우리가 가 해주려고 했지.
- 아이들 데려다주러 갔다면서 왜이렇게 늦장을 부리니? 그새 날강도라도 와서 가게 떼메가면 어쩔려고.
- 들어간 김에 현관 열쇠 고장난걸 손보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저녁밥을 지어 놓겠다고 법석을 떨길래 좀 거들어 주고 왔지요.
- 아주 갸륵 하구나.
- 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
- 일은 무슨 일. 스톤이 왔으니 우린 바로 집에 가 해지. 오션타워로 돌아가 해려면 30분은 더 걸릴거 아니야?
- 아 그러세요. 아 시간이 안걸려도 그렇지요. 배달을 누이네 한테 해달라니 말이나 되는 얘기에요?
- 물건 팔 욕심에 그만 앞뒤 생각 없이.
- 앞뒤 생각 없는거 별로 좋은거 아니야. 알아? 리키, 가요. 어쩜 남편 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노? 천연스럽게.
- 네? 무슨 말씀이세요?
- 몰라서 묻나?
- 잘있어 해.
- 안녕히 가세요.
- 배달 갔다 오려면 많이 늦겠다 이거. 빨리 빨리 하고 들어가 해야지.
- 네. 알았어요.
- 안녕히 가세요.
- 장미자, 김수희, 김규식, 오세홍, 설영범, 안경진, 신성호, 나레이터 고은정,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섭.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 파크의 저녁놀 열 다섯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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