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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베리파크의 저녁놀
제11화 - “집 앞에 흑인들이 잔뜩 앉아있어”
제11화
“집 앞에 흑인들이 잔뜩 앉아있어”
1979.03.11 방송
인생극장 ‘에즈베리파크의 저녁놀’은 1979년 03월 01일부터 1979년 03월 31일까지 31회에 거쳐 방송되었다.
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열 한번째.

- 공장 소음처럼 소란한 수화네 집의 일요일 입니다. 일주일 동안 모아 둔 빨래가 세탁기에서 돌아가고, 일주일 동안 쌓인 먼지를 소제기가 빨아내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에 세탁하고 먼지털고 이런 가장이 있다는건 한국에서 상상이 안되죠? 하지만 그 쪽에선 대부분이 그렇게 돼있더군요. 가정부야 물론 없지만 그냥 살림만 하기에도 바쁜 주부 역시 뭔가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먹고 빨래하고 점심 먹고 청소하고 매일같이 이런 일만 반복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근데 참 희안한건 그렇게 살아두요 사람들 옷이 뭐 그 때국이 흐른다거나 또 먼저 더미에서 살고있진 않아요. 자세히 모르겠지만 제가 느낀바로는요 도시나 마을 자체가 먼지가 없는게 아닌가 싶어요.


- 여보, 이 빨래 좀 테라스에 널어 주세요.

- 빨랠 왜 널어 말려? 세탁기에서 그냥 건조 시키지.

- 세탁기에 그냥 말리면 다림질을 해야잖아요.

- 아니면.

- 옷걸이에 걸어서 말리면 말장하게 주름이 펴지니 다림질 손을 버는 거지요.

- 궁리는 좋은데, 빨래 테라스에 말리는 집 여기서 봤어? 빨래가 펄럭 거리는 아파트 테라스는 한국에나 있어요.

- 어머나, 저쪽 흑인들 집에는 저거 빨래 널린거 아니에요?

- 우리가 흑인을 상대로 할 순 없잖아. 빨래 내다 말리는 집은 이태리 이민 집이나 흑인들 집 뿐이야.


-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빨래도 안 말려 입나 의심이 갈 만큼 밖에 널린 빨래 구경 못햇어요. 특히, 도시의 아파트에선 전혀 볼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넓은 야외에 정원을 가진 집들은 혹 가다가 뒷마당에 빨랫줄이 늘어져 있고, 담요나 이불이 널려 있는걸 봤습니다. 허나 좁은 테라스에 애기 기저귀가 촘촘이 널려 펄럭 거리는 빈민 아파트도 있긴 있어요. 기차 철로 연변에서 이런 진풍경을 보고 이태리 영화를 보는거 같다 생각을 했더니 그게 글쎄 정말 이태리에서 이민 온 사람들의 동네라고 그러더군요. 상상이 맞아 들어간 것에 어떻게나 신기해 하던지. 어떤 나라든 그 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거죠.


- 엄마! 엄마!

- 왜 그러니?

- 엄마, 무서워.

- 아니, 별안간 뭐가 무서워?

- 집 앞에 흑인들이 잔뜩 앉아있어.

- 아니, 뭐?

- 있잖아, 막 떠드는 소리가 나길래 창문 열어 봤더니 흑인들이 우리집 앞에 잔뜩 앉아 있잖아. 트렌지스터 라디오를 막 크게 틀어놓고.

- 이 동네가 흑인 동넨데 어떡하니 그럼. 할 수 없지.

- 우리집에 들어오면 어떡하지?

- 그럴리가 있니? 아빠 가게에 가셔서 안 오셨지?

- 응. 오빠도 없고. 아이 오빠만 있으면 태권도로 한방 먹일텐데.

- 얘, 그런소리 말아요. 저 사람들은 칼 들고 덤벼요.

- 엄마.

- 문 잘 잠겼지, 영아야?

- 응.

- 왜들 저래.

- 글쎄다. 장난하는 거겠지. 설마 어쩔려고 뭐. 안되겠다. 고모네 전화라도 해야지.
여보세요? 아, 누님 이세요?

- 어. 수화? 어쩐 일이야.

- 저 집 앞에 흑인들이 잔뜩 몰려 있는데 어쩌지요?

- 흑인들이 왜.

- 모르겠어요. 벨을 누르고 그래요.

- 아니, 순석이 어디 갔나?

- 가게 마지막 손 본다고 영호랑 나갔어요.

- 가만있자. 어떡하나. 우리는 스키를 가기로 했는데. 저어 그냥 장난하는 눈치면 못 들은 척 하고 있어봐.

- 괜찮을까요?

- 글쎄. 어. 하여튼 알았어. 우리가 그리로 가던지 할게.


- 내 뭐라 해 했어. 스톤이 여기 아파트 얻는다 했을 때 말려 했지?

- 이런데가 아니곤 싸게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는걸 어떡해요.

- 고모부, 흑인들이 아까 왜 그랬데요?

-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 해나. 그냥 저희들끼리 노는 거지.

- 그런데 왜 벨까지 누르고 그래요? 사람 놀라게.

- 그래도 그런건 얌전 한거야. 문이 열려 있어 하면 들어와서 냉장고에 마실거 꺼내 가 해고, 집안에 들어와서 놀아 핸다.

- 그런 걸 놔둬요? 경찰에 신고해 버리죠.

- 경찰에 신고하면 그 동네 못 살아 해지.


- 미국에 흑인 백인이 사이좋게 어울려 사는 곳이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흑인들이 상육하는 동네에서 백인들이 밀려나는 까닭이 있습니다. 청소는 물론이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그냥 둔 채 낮이나 밤이나 귀청이 떨어지게 음악을 틀고, 그런가 하면은 여닫기 싫은 창문에는 못질을 한 채로 살아 갑니다. 한 끼 떼우고 하룻밤 자면 그 뿐인 그들은 고급 승용차에만 열중을 하지요. 또 그 사람들은 동네를 안 떠나고 살려고 하는 백인 집에를 수시로 들어가서 꺼내 먹고 마시고 그래서 제 아무리 비싼 집도 헐값이 되고 마침내 그 마을은 황폐한 거리로 변하는 거죠.

- 에즈베리파크 비치타운 이곳은 동부 미국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 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휴지 조각이며 깡통들이 뒹구는 지져분한 시가집니다만 널디넓은 정원의 수목과 퇴락한 별장들, 녹이 슬어 서 있는 메리고 라운드의 흔적은 화려했던 추억을 능히 상상 할 수가 있었죠. 이런 곳에 수화네 부부가 채소 가게를 벌였다는건 좋은 암시가 아니였습니다.


- 어, 어. 영호야, 뭐라든. 내일부터 와서 일 하겠데?

- 오늘 가서 생각해 본데요. 밤 2시 까지는 너무 고단할 것 같다나?

- 배부른 수작 하는구나. 영주권도 없는 주제에.

- 여보, 같은 동양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흑인이나 폴트리칸 보다 낫지 않어?

- 나을거 뭐 있어? 영어라도 능숙 하다면 모를까.

- 영어 잘 하고 영주권 있고 떳떳하게 일자리 얻을 수 있는 사람이면 왜 우리 가게 같은데를 오겠어요.

- 아빠, 정가대로 계산만 해주면 되는 거니까 말 못해도 되잖아요? 그 애 때문에 여기 사는 일본 사람들도 우리 가게 오면 좋구요.

- 영호야, 너 보다 얼마나 윈데 그 애가 뭐니?

- 어른도 아닌데 그 애지 뭐. 영어 식으로 그 애 잖아요.

- 우리말 하면서 영어식이 어딨어.

- 엄마, 그럼 인제 금방 인사 한 사람보고 형이라 그래?

- 형은 무슨 형이야? 여기 와서 살면 여기 식으로 하는거지. 당신, 아직도 덜 붙였어? 왜 그렇게 느려?

- 이거 참 큰일 이군요. 정가표를 일일이 이렇게 봉투에 붙여야 하니.

- 그것 뿐인가. 내일 새벽부터 채소 씻어 다듬어서 포장 할 일은 어떻구.

- 어머나, 벌써 12시가 다 됐네. 여보, 당신 주무셔야 내일 새벽에 나가실거 아니에요?

- 포장지 하고 가격표 붙이는 일이 안 끝나면 물건 가져와 봐야 팔 수 없다는거 생각 못하나?

- 그러니까 이건 영호 하고 제가 마저 하고 들어 갈 테니까 당신 먼저 들어가 주무시라구요.

- 그러세요 아빠.

- 아니 그럴거 없어. 하루이틀 하고 말 일 아닌데 시작부터 그러면 되나? 우리 아주 같이 나와서 같이 들어가는 걸로 정하자구.

- 매일이요?

-그럼, 매일이지. 아무리 가깝지만 여기서 밤 거리 다니다가 무슨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구.

- 아이 아빠, 그딴게 겁나면 어떻게 장사를 해요?

- 넌 아직 몰라 그래. 뉴욕에서 얼마전에 야근하고 집에 가던 한국 부인 하나가 살해 됐단 말이야.

- 어머나. 아니 무슨 일을 했는데요?

- 응. 병원에 보조 간호원으로 근무를 했는데 병원에서 집에 한 블럭 밖에 안돼서 걸어다녔다는군.

- 그런데요?

- 한 2년 그렇게 다녔는데 어느 날 새벽까지 안 들어와서 남편이 신고 했데요. 신고한지 열흘 만에 길 옆 수풀에서 칼에 맞은 시체로 발견이 됐다는군.

- 어머나, 무서워라. 누가 그랬는지 잡지도 못햇어요?

- 잡긴, 그 넓은 바닥에서 무슨 수로 잡겠어.

- 아니 그럼 그 남편은 가만 있었어요?

- 그러게 한 블럭 밖에 안되는 거리라도 자동차로 다니라는거 아니야? 자동차 도어도 꼭 잠그고. 그 여자도 자동차를 안 사고 돈 모으느라고 안달 부리다가 그렇게 된거라구.

- 네. 이민 한 가족중엔 알게 모르게 이런 우여곡절을 겪는 일이 적지 않다죠. 수화는 개업 전날 밤을 남편과 이렇게 보내면서 자기들만은 그래도 무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내일 뵙죠.


- 장미자, 김수희, 오세홍, 설영범, 안경진, 신성호, 나레이터 고은정,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섭.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파크의 저녁놀 열 한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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