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여덟번째
- 엄마, 이 김치 엄마가 담근거지?
- 그래. 생강도 없고 마늘도 인스턴트 마늘 가루로 넣고 엉터리 김치다.
- 오랜만에 당신 솜씨 맛보는군.
- 영호야, 천천히 먹어. 왜 그렇게 입이 메지게 먹니? 누가 뺏어가니?
- 이렇게 안 먹으면 먹는거 같지가 않아요.
- 하하하하. 밥 먹을 생각 없다고 그럴때 하곤 딴판 이구나.
- 아우 오랜만에 김치를 보니까 뱃 속에서 언제 병아리 두 마리가 들어 왔었니 하잖아요?
- 엄마, 아까 밥 먹기 한 시간 전에 오빠 캔터키 후라이드 치킨 2인분이나 먹었거든.
- 뭐야? 그런데 밥을 또 세 공기 씩이나 먹어?
- 엄마, 이 뱃속에 그지가 있나봐요.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햄버거 대자랑, 아이스크림 큰거 하나, 콜라 한컵 먹었거든요. 그런데 영아랑 롤러 스케이트 타고 나니까 금방 또 배가 고프잖아.
- 그래 집에오는 사이에 또 사먹었구나.
- 괜찮아. 괜찮아. 얼마든지 먹어라. 여보, 나도 한 공기 더 줘.
- 오늘 왠일이세요? 아이구 밥이 없는데 어떡하지요? 금방 또 할까?
- 뭐 그럴거까진 없고. 됐어, 그만 먹지.
- 엄마가 김치를 맛있게 해서 그래. 고기도 서울 불고기 처럼 구워서 맛있구.
- 그래? 엄마가 인제 매일 맛있게 해줄게.
- 새 집에 이사와서 네 식구가 오랜만에 오붓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미국 땅이니 흑인 동네니 하는것도 이 순간만은 까막히 잊어버리고 있는거죠. 불고기에서 약간 누린네가 나고 생강 마늘 양념이 부실한 김치가 다소 짐짐 하기로 뭐 상관 있어요? 네 식구가 익숙하게 입맛 들였던 아내의 엄마의 솜씬걸요.
- 엄마, 설거지는 영아랑 제가 할테니까요. 아빠랑 텔레비전 보세요. 조금 있으면 케롤번의 쇼 할거에요.
- 관둬. 가게 가서 일한는 것도 못한데 집에서까지 널 시켜서야 되겠니?
- 다들 가만히 있어. 오늘은 미국식으로 내가 하지.
- 아이 아빠는 일년이나 계셨으면서 그것도 모르세요? 설거지 하는 아빠는요 미국도 영화에나 나오는 거래요.
- 어이 참. 하하하.
- 엄마, 제가 왜 텔레비전 보시라는 줄 아세요?
- 왜 보라는 거니?
- 빨리 빨리 얘네들 말좀 듣고 익히시라구요. 대학 나온 엄마가 말 한마디 할려면 왜 그렇게 쩔쩔 겨요?
- 뭐야? 아 내가 뭘 어때서?
- 아이 저 녀석이 저.
- 아빠는 말 할것도 없고.
- 뭐야 임마?
- 아 참, 고모가 그러더라. 아빠보다 엄마가 잘 한다고.
- 쟤좀 봐. 고모가 언제 그러시든?
- 우리 이사오기 전날 엄마가 가게에 앉았을 때 왠 할머니 하고 얘기하고 있었잖아?
- 여보, 정말 저 땀 뺐어요. 노인이 그냥 음식이나 먹고 갈 일이지 자꾸 말을 붙이는데 글쎄 대충 알아는 듣겠는데 대답이 머리에서만 뱅뱅 돌지 나와줘야 말이죠.
- 하하하. 그래도 당신은 오자마자 누이한테 인정을 받았으니 됐군 그래. 난 처음 왔을 때 밤낮 5초 지각생 이었다구.
- 5초 지각생이요?
- 말 알아듣는데 남보다 2초 늦구, 말 하는데 3초 늦구 그래서 5초 지각생 이었다구.
- 하하하하.
- 어, 영아 잡디까?
- 막 잠들었어요.
- 자꾸 그래버릇 하지 말아요. 다 큰 아이들 어련히 잘까봐.
- 이제 장사 시작하면 할래도 못 할거 아니에요? 아직 친구도 없고 어린게 얼마나 외롭겠어요. 낮이나 밤이나.
- 그동안 난 안 외롭나?
- 뭐라구요?
- 당신 두 아이 방에 다녀온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 줄 알아? 35분 이야.
- 그동안 시간을 재고 계셨어요?
- 얼마나 외로웠으면 시간을 쟀겠어?
- 당신 꼭 애기 같아요.
- 애기지. 애기가 일년이나 엄마를 못 봤으니 얼마나 불쌍해. 이리 와 빨리. 애기 봐줘야 할거 아니야.
- 아이 참.
- 그래. 당신은 엄마야 엄마. 당신 입술은 할머니가 돼도 이렇게 부드러울 거야.
- 아이 몰라요.
- 여보.
- 파도가 거세게 일렁이는 에즈베리 파크의 해변가 마을 그 밤은 깊어 갔습니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잔잔한 대서양의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져 가는 해변가 마을에서 수화네 식구의 생활이 어떻게 뿌리를 내릴 것인지 이 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죠.
- 아니.
- 아, 이거 무슨 소리야.
- 아이구 주방에서 또 접시 잡아먹나 부다. 아이고 큰일 났네. 저 아이 접시 닦는거 서툴러서.
- 아하. 내 뭐라 했어. 차이나 타운에서 사람 데려올 때 까지 스톤이 봐 달라고 했지않아.
- 아 어차피 독립 할거면 하루라도 빨리 나가서 해야죠. 우리 생각만 할 수 있어요?
- 하하. 아 누구야.
- 주한인데요.
- 어. 들어와. 거 저 또 접시 깨 했나?
- 네.
- 며 몇개나 깼어.
- 대자 스무개요.
- 뭐 뭐야?
- 아니, 스무개나?
-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 저 접시 깨진게 문제가 아니야?
- 네. 저 죽은거 같아요.
- 아니 무슨 소리니? 아니 누가 죽어.
- 접시 깨 놓고 그냥 도망 가려고 하는걸 영호가 태권도로.
- 여 영호가?
- 한 방 먹고 쓰러지잖아요.
- 이거 큰일 나 했구나. 같이 나가봐 해지 헬렌.
- 아유 내가 그 놈의 태권돈지 뭔지 조심하라고 했는데.
- 어떻게 됐어?
- 아니 얘, 영호야, 어떻게 된거니. 응?
- 발길로 한 번 찼는데 그냥.
- 아이구 그러길래 내 그 태권도 하지 말랬지.
- 태권도가 아니에요. 내가 하는건 뭐 뭐든지 다 태권돈가?
- 이히히히. 이거. 어? 누가 엠블란스 불러 했어?
- 저희 집에 연락해 줬거든요?
- 야, 폴! 폴!
- 깨어나 해는 구나.
- 문 여시오. 경찰관이오.
- 어? 아 누가 신고 했어?
- 아무도 안 했는데.
- 폴네 집에서 했나보다.
- 아니 병원에 먼저 연락을 할게지 경찰서엔 왜 했다지?
- 문 여시오.
- 폴, 괜찮니? 일어나.
- 그래, 폴. 일어나라. 괜히 시끄럽게 되면 너도 손해니까.
- 아, 네. 네. 나가 햅니다.
- 실례 합니다. 연방 경찰 입니다.
- 네. 왜 그러 햅니까?
- 사고 안 났습니까?
- 사 사고? 아 무슨 사고?
- 폴 수리칸 소년 폭행사건 이라던데.
- 폭행사건? 하하하하. 노노노노. 그런거 없어 햅니다.
- 그럴리가 없는데.
- 우리 폴 어딨어요. 폴! 폴!
- 아, 신고하신 분이죠.
- 맞아요. 우리 폴 이 집에서 때려서 숨 넘어 갔데요.
- 하하. 이거 무슨 말씀을. 폴, 폴! 나와 해라. 니 엄마 와 했다.
- 아휴.
- 마미 왜 왔어?
- 오! 폴, 살아 있었구나.
- 왜그래?
- 폴, 너 아무일 없었니?
- 무 무슨 일이요?
- 하하하. 봐 해시라. 무슨일 있다고 그럽니까. 아이들끼리 장난 하는거 모두 신고 합니까?
- 이게 어떻게 된거야. 부인은 왜 밤중에 경찰을 놀립니까.
- 아이 저 그런게 아니라 나는 전화를 받고.
- 폴 어머니께선 그런 전화를 받았으면 먼저 병원에 알릴 생각을 하셔야지 경찰엔 왜 신고를 해요?
- 아 만일 정말이었다면 죽은 아들 경찰이 살려 줍니까? 범인부터 잡아야 나중에라도 배상 청구를 할 수 있잖아요.
- 이만 실례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신고하면 부인께 벌금 물립니다.
- 아 저 아니에요. 그런 신고 안해요. 저 폴? 일 끝났지. 집에 가자.
- 아. 음음.
- 야, 난 영호 너 꼭 잡혀가는 줄 알고 조마조마 했다.
- 자자, 모두 들어가 자 해지. 3시 다 됐다 이거.
- 영호야, 천만 다행이다. 제발 앞으로 조심해. 알았지?
- 네. 주무세요. 죄송 합니다.
- 사소한 일 일수도 있죠. 하지만 우스운 일로 경찰에 이름이 한번 오락거리는 날엔 그게 아무리 사소한 거라고 해도 컴퓨터에 의해서 귀신처럼 평생을 붙어 다니는 겁니다. 참 무서운 나라죠.
- 장미자, 김수희, 오세홍, 설영범, 김한진, 이기전, 안경진, 신성호, 유해무, 서지원, 장춘순, 나레이터 고은정,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섭.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 파크의 저녁놀 여덟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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