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다섯번째
- 그럭저럭 수화네가 미국 생활을 시작 한지도 한달이 됐죠. 이젠 낮밤이 바뀌어서 하품을 참는거 같은 일도 없게 되구요. 주방에서 남편을 거들어 접시를 닦는 일도 얼마쯤은 익숙해졌데나요? 내외는 주방에서 일하고 학교에 들어간 두 아이는 교대로 홀에서 접시를 날라 용돈벌이를 하고, 한 가족이 전부 한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된 셈이죠. 미국은 나와서 먹으나 집에서 먹으나 거의 값이 맞먹어서 그렇게 외식들을 한다고 그러더군요. 근데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웨이트리스 거의가 모두 뚱보 마나님들이에요. 뭐 카운터나 혹 가다가 날씬하고 젊은 아가씨들 볼 수 있는데요 두 세시간 후면은 그 모습이 안보이는걸로 봐서 아르바이트 나오는 학생들임에 틀림이 없을것 같습니다. 수화가 한국에서는 중년의 나이였지만요 그곳의 그 비계낀 마나님들 틈에서는 새파란 처녀로 봐도 과장이 아닙니다. 중국집 챠우챠우 에서도 물론 홀에 나와 음식 주문을 받는 웨이트리스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했죠. 하지만.
- 왜 안된다고 해나. 스톤이 당신 쿡으로 올려 해주면 월급 많이 해지지. 색시 홀에서 일해 하면 월급 더 많아진다. 돈 빨리빨리 벌어 해서 자동차 사고, 집 사 해고, 여행 하고 해야지.
- 아 글쎄 뜻은 고마운데요. 집사람이 아직 말도 익숙하지 못하고 또 이...
- 또 뭐야.
- 아이들이 홀에 나와 가끔 일하게 되면 부모자식간에 같이 왔다갔다 하는게.
- 아하 잠꼬대 하고 있어. 어머니 하고 자식이 같이 일해 하면 누가 팁이라도 안 내고 가 해나?
- 어떻든 좀더 생각을 해보고 난 뒤에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겠어요. 그동안 아무 말씀 마세요.
- 우연찮게 남편하고 리차드 얘기를 듣게 된 수화는 미리 마음을 작정했다는 거에요. 남편이 의사를 물으면은 웨이트리스를 사양하고 주방에 접시 닦기를 하겠다고 말이에요. 아무리 기계로 다 한다고 그러지만 몇십개나 되는 접시를 펄펄 끓이고 소독하고 말리는 일을 하루 왠종일 한다는거 보통은 상상이 안되는 중노동이죠. 하지만 남편이 왜 홀에서 일하는걸 꺼리는가 이상하면서도 남편 뜻을 따르기로 했다는군요.
- 두 다리 이불 위에 좀 높이 올려놓고 있어봐. 그럼 부기가 좀 가라앉을테니.
- 여보, 이 손좀 보세요. 두드러긴가? 왜 이렇게 불긋불긋 하지요?
- 아퍼?
- 아프진 않은데 근질 거려요. 고무장갑에서 무슨 독이 옮은 걸까요?
- 그럴리가 있나. 가만있어. 내 리키한테 가서 약을 좀 얻어올게.
- 아니, 손에 뭣이 나 했어? 하하 이거 큰일 나 했다. 이거 어떡하지? 이 밤중에 병원에 가 해면 의사 자 핼텐데.
- 병원은 무슨 병원이에요. 낫겠죠.
- 연고 같은거 바르면 가라앉지 않겠어요?
- 아이 아무 연고 발라 했다가 부작용 나 해거나 손이 피부 다쳐 해면 어떡하려고 그래. 스톤이 정말 스톤이다 이거.
- 스톤도 아주 순종 스톤 입니다.
- 뭐라구?
- 제 머리가 정말 스톤 이라구요.
- 맞아 핸다. 스톤이 아니면 예쁜 와이프 이렇게 안 만들어 핸다. 접시 닦아 핼 사람 얼마든지 있어 하는데 와이프를 왜 이 고생시켜 해나. 옆에 있지 아니하면 누가 주머니에 넣고 가 해나?
- 왜들 이러세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전 말도 자신없고 아직 홀에서 일 못해요.
- 아하하하. 미세스 변, 남편 사랑해서 거짓말 하는거 내 다 알아 해. 하늘이 알아 핸다.
- 아니 저게.
- 자, 이거 소독하는 약이다. 이거 발라 해구 스톤이 내일 물건 사러갈 때 색시 같이 데리고 가서 병원에 가 해. 내 돈의 줘 핸다.
- 아니 저게 사람을 어떻게 보고.
- 여보, 당신 정말 왜 그렇게 야해 졌어요?
- 야해져?
- 그깟일에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 야, 넌 싸고 도니까 기분이 괜찮은지 모르지만 난 편치 못해. 으이그 내 정말 별 인간한테 괄세를 다 받고.
- 그래요. 그러려니 해버리지 왜 똑같은 사람이 되려고 그래요.
- 뭐? 똑같은 사람? 너까지 날 아주 같이 봐 버리는거니? 너까지 말이야?
- 왜 이렇게 밤중에 악을 써요. 여보, 우리 이럴려고 여기 온거 아니잖아요. 이렇게 죽도록 일하고 세끼 밥 먹으려면 뭐 할려고 와요. 처음 당신 여기 오자 그럴 때 제가 뭐랬어요. 모자라고 아쉬운데로 아이들 키우면서 그냥 살자고 그랬죠. 그랬더니.
- 아니야. 땅은 어디나 마찬가지야. 이왕이면 넓은데 가서 한번 시원하게 살아 보자고. 그리고 거기엔 누이가 있잖아. 전쟁나고 피난통에 행방불명이 됐던 누이가 말이야. 부모님은 기왕에 가셨지만은 아무도 없다는게 얼마나 외로운건지 당신도 알잖아. 우리 건너가서 오누이 한데 모여 서로 의지 하면서 살잖말이야.
- 그런 누님의 남편이잖아요. 왜그렇게 호의를 나쁘게만 받으려고 해요.
- 미안해. 여기와서 일년동안 자나깨나 당신 생각만 했거든. 당신이 도착하기 일주일 전부터 난 통 잠도 잘 수 없었어. 그렇게 고단한데도 말이야. 그런데 막상 도착한 당신을 보니까 별안간 후회가 되더군. 괜히 오라그랬나 보다.
- 후회가 돼요?
- 한국에 두어두고 나 혼자서만 생각을 할걸. 이 막돼먹은 땅에 와서 누가 독수리 병아리 채 가듯 채 갈것만 같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릴것 같고. 당신은 너무 젊어. 너무 이쁘고.
- 당신, 너무 오랫동안 피로가 쌓여서 신경이 약해졌나 봐요. 괜한 걱정 말고 쉬세요.
- 여보, 미안해. 미안해.
- 수화, 우리하고 다운타운에 안 가겠어? 브띠샵 하나가 세일 한다는데 구경도 할겸.
- 아이 제가 그런 고급 옷 집엔 가서 뭘 하게요.
- 어휴 구경만 하는것도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그런데는 일년에 한번 세일 하기가 어려워. 일년내내 그런집 세일 하기만 기다리는 여자도 있는데 뭐.
- 바람도 쐴겸 다녀와. 누이, 좋은거 있으면 뭐 하나 사주세요. 제가 갚을게요.
- 왜. 넌 안갈거야?
- 매형 가시죠?
- 아유 물론이지. 벌써 차에 나가 있는데?
- 운전사 노릇이나 하면 모를까 매형 가시니까 전 집에서 쉬겠어요.
- 그래라 그럼.
(빵빠앙~)
- 아유 저 성질. 수화, 빨리 나와.
- 아하. 아이구. 여자들이 개미같이 모였구나. 저 속에 혼자 쑤시고 들어가서 구경 해나.
- 괜히 또 슬그머니 꽁무니 빼시려구요? 안돼요. 한번 사주겠다 했으면 사 줘야죠.
- 아 아니 나 꽁무니 빼 하는거 아니야.
- 그럼 뭐에요?
- 저 사람 많이 하는데 들어가서 당신 구경하는거 기다리면 나 다리 다 빠져 헌다. 나 그럼 차 속에 있을테니 옷 골라 해서 와 해든지.
- 아이 싫어요. 당신 마음에 안드는 옷 나 입고싶지 않아요.
- 그만큼 살았으며 내가 어떤거 좋아 해는지 알만 해잖아.
- 아 그래도 당신이 딱 집어주는거 하고 어디 같아요? 나 혼자 사는건 아무리 비싼거라도 잘 안입게 되더라.
- 어머나. 그럼 누님께선 아직까지 고모부가 직접 골라주시는 옷만 입으셨어요?
- 거의 그렇다고 할수가 있지.
- 어머나...
- 미세스 변 옷도 오늘 내가 골라해 줄까. 미인이 입을 옷을 고르는거 우리 영광이다 이거. 옷 사 해고 오늘 우리 칵테일 한잔 할까?
- 오, 부라보!
- 곧장 집으로 가지요.
- 어머 어머. 여보, 저기 극단옆에 가발가게 하나 또 생겼네. 저 사람들도 한국사람 일까요?
- 글쎄. 잘 모르겠는데.
- 착각들 했지. 미국사람 부자 라니까 아무나 미국에 살면 가발 몇개씩 사고 속눈썹 수십개씩 사는 줄 아는 모양이지?
- 여기 사람들 그런거 통 안하나요?
- 아주 안하는건 아니지만 그런데 돈 쓰는 사람 아주 적어. 한때 검은종류 가발이 유행을 하긴 했었는데 그때 가게 냈던 사람이나 돈 좀 벌었을까 모두 뒤늦게 소문듣고 시작한 사람들은 겨우겨우지 뭐. 뭐 머리가 곱슬거리는 흑인이나 자기 손으로 머리 매만질 만큼도 기운이 없는 노인네들이나 사가는 정도야. 아 더구나 속눈썹 달 시간이 어딨겠어. 영화배우나 하면 모를까.
- 시누이 얘기를 듣는 동안 수화는 얼굴이 확확 달아 혼났데나요? 그렇듯 철없이 이민을 오는게 아니라고 생각을 했으면서도 자기 역시 친구가 선물한 속눈썹을 한 상자나 가지고 왔으니 말이에요. 가지가지 얘기 내일 또 하죠.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 파크의 저녁놀 다섯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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