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네번째.
- 아, 네!
- 어머나, 왜 그래요?
- 아, 당신이군. 화장실에 갔다 온거야?
- 네. 아이 참 긴의자에서 자는 영아를 좀 보고 오는 길이에요.
- 어.
- 무슨 꿈 꿨어요?
- 아니. 왜.
- 곤히 주무시는거 보고 나갔다 왔는데 별안간 깨시니 말이에요.
- 세시 반쯤 됐나?
- 네. 세시 이십분이요.
- 허허허. 이제 시계가 됐다구 내가. 아 당신 먼길 왔는데 피곤하지도 않아?
- 별로 모르겠어요.
- 하긴 낮밤이 바뀌었을테니 한동안 고생 해야지.
- 그래서 영아가 잠을 못 자나 봐요.
- 왜? 뭐라고 그래?
- 홀짝 홀짝 울고 있잖아요.
- 울어?
- 무서워서 못 자겠데요. 썰렁한 응접실에 혼자 있으니 그럴거 아니에요?
- 방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있나.
- 아이 참. 그냥 이 방에서 같이 데리고 자면 좋을텐데.
- 아이 참 사람 사는거 별거 아닌거 같으면서두요. 까다로운 일이 많죠. 수화네가 미국에 도착해서 첫 밤을 보내면서 벌써 작은 문제에 부닥친 겁니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부부 방에 아이를 같이 재우겠다니.
- 그럼, 저희가 응접실로 나가면 어떨까요?
- 허허 그거 안되는 말이다. 우리 리빙룸 소파 밑을 잡아당기면 좋은 침실 된다. 하지만 그거 싱글베드라서 어른이 두 사람 자 할수 없어. 영아가 남자 해면 영우 하고 주방에 찰리 하고 같이 자 핼텐데 이거 이거 유감이다.
- 으이구 그러길래 내 진작에 정원안에 있는 헛간을 방으로 만들자고 했잖아요.
- 리빙룸 침실 하는거 뭣이 이상해서 그래. 우리 언제든지 손님방 해 하는데.
- 그래서 할 수 없이 제일 어린 영아를 제일 넓은 응접실에 재우게 된거죠. 우리 같으면야 보통 아랫목에서 웃목까지 요만 깔면 한 방에 너댓 사람도 잘 수 있고 또 집이 옹색하면 그게 별로 큰 일도 아니잖아요. 제가 여행을 하는 중에도 여러 집에서 응접실 잠을 잤습니다만 한 집에 아들만 셋이면 아무리 부자라 그래도 방 둘 있는 집이나 아파트에 살 수 있지만 딸이 하나 더 있으면은 아무리 가난해도 방 셋 있는 집에 거주를 해야 합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 규칙이라 하는 군요.
- 우리는 자식 없어 해 하니까 방 하나 있어 해도 규칙 위반 아니다 이거. 하지만 우리 집이 좁은거 싫어서 세금 많이 내 하면서두 방 셋 있는 집에 살아 해잖아.
- 하하하. 리처드 왕. 이 왕 서방 뽑 낼만 하죠. 하지만 아무리 넓다고 해도 두 가족이 함께 살기에는 부족한 집이었죠. 그런식으로 방을 쓰자면 말이에요.
- 아~ 엄마, 나 엄마 방에 가서 자도 돼?
- 낮잠 자면 고모부 아저씨 흉 보실텐데 어쩌지?
- 어이 졸려 죽겠는걸.
- 여기 어디 낮잠자는 사람 있든? 조금만 참았다가 우리 저녁에 자자. 응?
- 치. 낮잠 자는 사람 있던데?
- 누가 낮잠을 자든?
- 우리 공항에서 오던 날 공원 같은데 흑인들이 앉아서 모두 낮잠 자고 있었잖아.
- 글쎄. 흑인 중에는 그렇게 게으른 사람이 있나보지 뭐. 여기서는 그렇게 게으르면 못 산다고 하지 않든?
- 엄마! 엄마!
- 어. 어딜 갔었니. 고모부 아저씨가 아까 찾으시던데.
- 나 지금 리처드 왕 하고 다운타운에 갔다 오는 길이에요.
-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고모부 보고 리처드 왕이 뭐야?
- 어. 그렇게 안해도 된데. 그냥 리키라고 하라던데?
- 고모부 하고 얘기 소통이 되든?
- 문제 없어. 나보고 영어 잘 한데. 리키가 선물 사줬어.
- 무슨 선물을.
- 자전거. 서울 있을 때 엄마보고 맨날 사달라고 했던거 있잖아요. 노란색 사이클 말이야.
- 아니 그게 꽤 비쌀텐데.
- 뭐 사고 싶으냐고 자꾸 말 하래. 그래서 말 했지 뭐.
- 고모부 아저씨 난 왜 안 사주지?
- 너도 사 주시겠지. 오빠만 사주실리가 있니?
- 영호야, 엄마 거깄니?
- 네. 왜요?
- 아 뭐해. 눈 좀 붙이라니까. 청소는 왜 하고 있어?
- 모두 일 하는데 저만 어떻게 낮잠을 자요.
- 당신에겐 지금이 밤이잖아. 제대로 낮밤이 바뀔 때 까지 눈치 볼거 없이 자 둬요. 내가 대신 일 하잖아.
- 아빠, 나도 자전거 사 줘.
- 뭐? 자전걸 사달라고?
- 고모부가 영호한테 사이클을 선물 했데요.
- 뭐야?
- 아휴, 미안해서 어쩌지요? 여기서도 그런거 비싸겠죠?
- 아니, 그 노랭이가 어떻게 된거야. 미쳤나?
- 여보, 당신 말씨가 왜그렇게 사나워 졌어요?
- 왜. 그래서 실망이야?
- 아이 참. 실망은 무슨. 일년도 안 된 사이에 말씨가 변한 것 같아서 그러지요.
- 사나운 새끼들 틈에서 살자니 나도 사나워 졌어. 미친놈.
- 아.. 네?
- 별 미친놈 다 보겠다구.
- 모처럼 선물을 사 주셨는데 빈 말이라도 왜 그렇게 해요.
- 스톤이 안에 있어 해나? 나 좀 봐 해지. 얘기 할거 있어 핸다.
- 또 무슨 얘기 할거 있어 하니. 이 짱게야.
- 여보.
(따르릉~)
- 헬로우. 네. 맞습니다. 누구? 영호 변? 네. 우리 조칸데요. 뭐요? 자전거를 도둑 맞아요? 아니 어디서. 파크? 아 네. 네. 알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어머, 저 순석아! 아이구 참, 나갔지. 수화! 수화!
- 아하 이거 왜 소리쳐 하구 이래.
- 아이구 큰일 났어요. 영호가 공원에서 자전거 도둑 맞았데요.
- 뭐, 뭐 뭣이?
- 수화! 수화! 수화 자나? 응? 수화 자?
- 아 아니에요.
- 아이구 저 저 빨리 좀 나하고 나가지.
- 어딜요?
- 아휴 글쎄 일이 좀 생겼어. 영호가 다쳤을런지도 몰라.
- 네?
- 하하. 울지마. 안 다쳤으니까 됐다.
- 아직 길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한테 자전거는 왜 사줘요?
- 내가 말이 했지? 새벽에 여기 공원에는 자전거 타면 안 된다고.
- 영호야, 이게 뭐냐.
- 참을 수가 없잖아.
- 뭘.
- 자꾸 타고 싶어서.
- 허허허허. 아이구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애구나. 아이구 참.
- 고모부 한테 미안해서 어쩌지요? 모처럼 사 주신걸 하루도 못가서.
- 하하 괜찮아 괜찮아. 자전거 또 사 하면 되지만 안 다친거 다행이다 이거. 영호가 내 말이 잘 들어 했어. 누가 자전거 달라고 하면 얼른 주라고. 그렇지 않으면 다리 맞아 핸다고.
- 이 새끼. 나보다 작은 녀석인데 칼을 갖고 있잖아.
- 어떻게 생겼어. 펀추리 칼이야?
- 좀 검은 놈인데 아주 까맣진 않아요.
- 맞아 했다. 이 에즈베리파크엔 그런 불량배 많아 핸다.
- 그래서.
- 그래 자전거를 주고는 분해서 울고 있는데 순차 순경이 지나가다 영호를 봤데요. 그러고는 집으로 연락을 해준거지요.
- 오자마자 공부 잘 했군. 어쩐지 자전거가 거저 생기더라니. 이 나라에서 거저가 어딨어?
(따르릉~)
- 헬로우. 네. 2015449878 맞는데요. 네? 자전거를 잃은 동양 소년이요? 네. 있어요. 누구세요? 뭐 뭐라구요? 자전걸 선물 하겠다구요? 감사 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네? 벌써요? 감사 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오션타워에 네네. 감사 합니다. 이거 어떻게 된거야.
- 왜요?
- 새벽에 산책을 하다 목격한 사람인데 울고있던 소년이 하도 딱해 뵈 자전거를 하나 사주겠다는 거야.
-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요?
- 글쎄 그렇다니까. 전화번호 주소로 벌써 붙였데. 내 미국에 일년 살았어도 이런일은 또 처음인데.
- 수화가 미국에 닿자마자 겪었던 이 자전거 사건은 어쩌면 미국이 안고 있는 두 얼굴을 그대로 말해주는 걸 거라고 수화가 후에 말하더군요. 극과 극의 사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잦아지고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사느냐 또 살 수 있는냐 이게 미국 사람들의 숙제이자 또 이민 교포의 숙제 이기도 한거죠.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 장미자, 김수희, 오세홍, 설영범, 안경진, 신성호, 나레이터 고은정,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섭.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파크의 저녁놀 네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