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정 극본, 이규상 연출 세번째.
- 오필리아라고 별명이 붙은 나수화가, 우리끼리는 흉 허물 없이 나수화 나수화 부릅니다만 그냥 이름만을 부르기엔 너무 나이가 든 어른이죠. 지금은 말입니다. 하지만 친구 얘기 하면서요 뭐 수화 씨니 나여사니 존칭 붙이긴 뭐하겠죠? 아무튼 이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길을 떴습니다.
- 엄마, 공항에 아빠 나와 계시겠지? - 내일? - 우리 달력으로 치면 내일 나오시는거지. - 아이 그럼 내일까지 이 비행기 속에 있는거야? - 야, 미국이 우리 보다는 날짜가 하루 늦게 가잖아. 이 비보야. - 영호 너, 미국 가면 그런 말 못 써서 어쩌니? - 영어로 하죠, 뭐. 미국도 젊은 애들끼리만 지어서 쓰는 말이 있데요. - 저런, 그런 것 까지 배워서 쓰려면 우리 영호 한참 혼나야 겠다. - 벌써 알아요. - 뭐야? - 다는 모르지만요. 유 노 마미? 유 노? - 아하하. 참. 에이.
- 요즘은 역 이민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민 갔다 돌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만 수화네가 떠나던 74년만 해도 이민만 가면은 저마다 무슨 땡수가 날 것 같은 생각들을 했을 때죠. 하지만 앞뒤 생각없이 들떠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수화는 착잡했습니다. 물론 훨씬 후에 들은 얘깁니다만 그 때 그 모든걸 민감하게 예감 했어야 됐다는 거죠. 정신없이 출국 수속을 밟고 친구들의 전송을 받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뭐가 뭔지 얼떨떨 했데요. 그러다가 비행기가 뜨고 눈 깜짝 할 사이에 조그마한 한국 땅이 지나가고 망망한 바다 위에 떠 있고 보니까 참 막막 하더라나요.
- 그럴 수 밖에 더 있니? 당장 살러 가는 곳이 어떻게 생겼으면 얼굴도 못 본 시누는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야. - 그런데 불현듯 변순석, 지금의 남편이 된 그이 와의 학교시절이 생각나더래요. 새벽 4시에 차를 몰고 나가서 장을 봐 오고 도마질을 한다는 남편의 편지를 생각 했겠죠?
- 부원 여러분, 분장 지우지 마세요. 기념 촬영 있답니다. - 아우 촬영은 무슨. 시간 없는데 그냥 가지. - 아 대포 마실 시간 없잖아. - 야야, 그러니까 빨리 찍고 빨리 가야지. 자, 빨리빨리 나가자. - 옥희야, 수화야 빨리 나와. - 알았어. 지금 나가. - 아저씨, 빨리 찍어요. 다 모였어요. - 아저씨 빨리 박으세요. 뱃속에서 대포 소리가 펑펑 납니다. 하하하하. - 이야 대포집 우리 꽃순이 목 늘어지겠다. - 야 순석아, 주인공이 왜 그렇게 끝머리에 서 있니? 인마 여기 오필리아 옆으로 오라구. - 아무데면 뭐 어때. 빨리 찍기나 하자. - 오필리아 옆으로 가면은 사신이 떨려서 사진을 못 박으신덴다. 하하하하. - 자식, 웃기고 있어. - 순석 씨,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비켜드릴게요. - 아이 왜그래. 빨리빨리 찍죠. 집 먼 사람 어떡하라고. - 수화 씨 업어다 드릴 사람 많으니 걱정 말아요. - 야, 너 순석이 앞에서 실수했어.
- 그 무렵, K대학 연극은 일반극단 뺨치게 유명했죠. 햄릿의 변순석과 오필리아의 나수화는 같은 영문과 였습니다. 요즘두 그렇지만 같은 과의 남녀 학생이 조금 친하다고 그래서 특별히 소문 날 까닭 없죠. 근데 그 두 사람이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을 정도로 가까워진건 햄릿의 공연을 시작하고부터 였데요.
- 첫날 밤, 공연을 마치고 내가 맨 마지막으로 분장실을 나가는데 무대쪽에서 무슨 인기척이 나잖아.
- 어머나, 누구세요? - 납니다. - 여기서 뭐해요? - 그냥, 빈 객석을 보고 있어요. 어느 유명한 배우가 그런 말 했죠.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 후에 빈 객석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고독할 수가 없다구요. - 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연극 하실거에요? - 아직 그런거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 그런데 뭘. - 왠지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내가 무대 위에 먼지보다 나을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 햄릿을 하시더니 진짜 햄릿이 됐나보죠? - 흠 흐흐흐... - 나와요. 시간도 늦었는데.
- 집으로 가는 길에 둘은 다방에 들러 따끈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것 뿐이에요. 대학에 들어와서 3학년이 되도록 그렇게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신게 뭐 한두번 이었겠어요? 근데 생전 처음 함께 차를 마시는 것 같았다나요? 참 남녀관계라는거 우스운거에요. 어느 순간에 귀신에 홀린 것 처럼 미묘해지는 거죠. 버스에서 발을 밟힌 남자가 덜컥 화를 낼려다가 참는 얼굴을 보고 별안간에 가슴이 찡 했다던가요. 또 늘 같이 다니면서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던 남자가 어느 날 국수집에서 나무젓가락에 종이를 뜯어서 건네 주는데 그 깨끗한 손톱에 가슴이 철렁 했다던가. 뭐 이런일 참 많죠? 변순석이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싱긋이 웃는데 아랫입술이 옆으로 그렇게 실그러지는게 좋더래요. 생전 처음 그런 모습을 본거 같고 말이에요.
- 헬렌, 헬렌, 헬렌이 어디있어 해. - 내실에서 아직 안나오셨는데요. - 스톤이 옷 갈아입지 아니 해나? - 옷을 갈아 입어요? - 스톤이 색시 만나 해는데 그냥 나갈거야? - 어때요. 데이트 하러 가는것도 아닌데. - 무슨 소리야. 스톤이 색시 못봐 핸지 1년이 넘어 했다 이거. - 9개월 밖에 안됐는데 무슨 1년이에요? - 9개월은 짧아 해나. 난 그렇게 예쁜 색시 못봐 했구 9개월 혼자 놔둘 수 없다 이거. - 예쁘다니요. 보셨어요? - 어? 아니지. 말만 들어 했지만 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 해. - 네? - 왜 그러해나? 스톤이 색시 배우 핸거 나 다 안다. 얼굴 예뻐해야 배우 해지. - 아니 무슨 배울 해요? - 헬렌 한테 말 들어했어. 학교 다닐 때 뭐 연극하고 배우하고. - 하하하하하하하. 아 난 무슨 소린가 했네. 그건 옛날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에요. - 좋긴 좋은가 보다. 너 웃는 소리를 다 들어보니. - 아 그게 아니라. - 헬렌, 당신 색시 와 해나? 왜 당신이 새 옷 입고 그래? - 그럼, 당신 색시 와 해요? 왜 당신이 나비 넥타이를 다 메고 야단이에요? 고물장까지 말짱하게 닦아놓구. - 원래 저 귀한 손님 오는데 그냥 있어 해면 어떡해 해? - 손님은 무슨 손님 이에요? 정말 아이 너무 이러시면 이거. - 얘 얘 넌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야. 그것도 20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우리 아니니. 얼굴도 못 본 올케요 조카들인데 이게 어디 작은 경사니? - 자자 빨리 가 해자. 공항까지 멀어 핸다. - 얘 참 빨리 나가자.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면 얼마나 당황해 하겠니.
- 수화네가 뉴욕 캐네디 국제 공항에 내린 것은 그러니까 1974년 3월 15일 봄이라 그러지만 아직 날씨가 쌀쌀할 때죠. 새벽마다 변순석이 물건을 실어 나르던 시보레 외건 고물차에는 오래간만에 아이, 어른, 변씨네 혈족들이 꽉 찼습니다. 이 날만은 변순석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됐었죠.
- 미세스 변은 미국에 와 본적 있습니까? - 아니요. 처음 이에요. - 아유, 저 이는 글쎄 저렇다니까. 아니 한국에서 여기가 뭐 이웃집인줄 아세요? 호호호. - 아니 이웃집 아니지만 여행 하자면 하루에 오는데 뭣이 힘들어 해. - 아이구.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 헬렌, 무슨 말이 했어? - 아는 것도 많으시다구요. - 정말 운전 참 잘하시는것 같아요. - 운전? 예. 잘이 봅니다. 우리 동양의 미녀가 타셨는데 운전 잘 해야지. - 어머... - 저 이는 말이 아주 헤픈 사람이니까 미리 알아 둬요. - 흠...
- 변순석의 한숨과 나수화의 웃음소리. 참, 별 뜻이 없었죠. 그런데.
- 극본 고은정, 연출 이규상 인생극장 에즈베리 파크의 저녁놀 세번째로 고려식품, 삼성제약 공동제공 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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