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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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서른 번째로 마지막 회.
(음악)
- 왜 이렇게 가슴이 별안간에 텅 비어버리는지요. 이 병원이 왜 이렇게 별안간에
말도 못하게 넓어 보이는지요. 난 늘 집으로 돌아가는 환자들을 웃음으로 보냈는데 당신은,
당신만은 웃음으로 보낼 것 같지 않습니다. 당신이 떠나려는데 내가 기쁨을 느끼지 않고 슬픔을 느끼는 까닭이 뭐죠?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슬픔을 느끼는 까닭이...
(음악)
(발자국 소리 및 문 여닫는 소리)
- 세경 씨는?
- 올 거예요. 막상 떠나려니까 착잡한지 자꾸 병실을 맴돌아요. 곧 나올 거예요.
- 음...
- 세인이랑 어머니 어디 계세요?
- 먼저 나가셨어요. 차를 잡겠다고.
- 아... 네. 박영진 씨는 그새 새 신붓감 물색했다는군요.
- 그래요? 빠르기도 하군요.
- 세인이가 어디서 듣고 왔는지 펄펄 뛰더군요. 이번엔 줄리아드 출신의 피아니스트래요.
거기다 미인이고 돈도 많은 집 규수래요. 아마 지금쯤 그 사람 세경일 마음껏 비웃고 있을 거예요.
어디 세경이 뿐이겠어요? 선생님도, 나도 모두 다 비웃고 있을 거예요. 귓가에 윙윙거려요. 그 웃음소리가.
-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리석은 자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당신네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아암, 모르고말고. 흐흐흐흥! 지금 거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뭘 하고 있는 거지?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인생이 어쩌고 사랑이 어쩌고, 번지르르한 소리나 늘어놓고 앉아 있겠지.
한심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으으흐! 으하하하하하하하하!
- 선생님, 들리죠. 박영진 씨의 웃음소리.
- 네, 들리구 말구요.
- 그런데도 왜 그가 밉지 않죠? 그때는 그렇게도 밉더니만.
- 가엾은 사람이기 때문이죠.
- 가엾다는 말, 그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가엾은 건 세경이죠.
- 하지만 세경 씬 잃을 줄 알기 때문에 얻을 줄도 알아요.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뜨거워질 줄도,
깊어질 줄도 모릅니다. 지금 세경 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앞으로 잃은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박영진 씨가 뭘 얻을 수 있겠어요? 그는 허상의 생을 살 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엾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난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어요. 역시 그래서 그가 밉지 않았던가 보군요.
(문 여닫는 소리)
- 오, 왔구나.
- 여태 뭘 했니?
- 어... 그냥...
- 왜요, 서운하십니까?
- 그새 정들었던가 봐요. 여기.
- 하지만 여긴 정 붙일 곳이 아닙니다. 다신 여기 오지 마세요.
- 하지만 떠나려니 서운해요.
- 기뻐하세요.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자, 나가시죠. 밖에서 어머니가 기다리십니다.
(발자국 소리 및 문 여닫는 소리)
(바람 소리)
- 아.. 바람이 몹시 차군요.
(바람 소리)
- 깊은 겨울이니까요.
- 깊은 가을에 오셨다가 깊은 겨울에 떠나시는군요.
- 오, 정말 그렇군요. 처음 왔을 땐 정원이 온통 노랬는데 지금은 빈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군요.
- 하지만 겨울이 깊었다는 건 봄이 머지않았다는 얘기죠. 머지않아 또 꽃이 필 겁니다. 그렇죠?
- 하지만 지금 꽃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 너무 추워서 지금은...
- 음... 우선 찻잔이나 쥘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 꼭 그렇게 될 겁니다.
- 선생님... 잊지 못할 거예요. 늘 기억할 거예요. 저...
- 저도 세경 씨 잊지 않을 겁니다. 안녕히 가세요.
- 안녕히 계세요.
(바람 소리)
- 가세요, 어서. 춥습니다.
- 아... 선생님도 들어가세요.
- 음...
- 수연아... 왜 꼭 뭘 두고 가는 것처럼 허전할까.
- 세경아, 지금 니가 두고 가는 게 뭔지 나는 알아. 지금 니가 여기에 두고 가는 게
뭔지를 나는 알아. 하지만 넌 세월이 좀 더 흐른 다음에야 알 게 될 거야. 지금은 몰라. 니가 어떻게
그걸 알겠니? 하지만 지금은 모르는 채로 그냥 떠나는 거야.
- 그냥... 참, 수연아.
- 응?
- 혹시, 혹시 니가 사랑한다는 남자가 이 선생님 아니니?
- 으응? 뭐, 뭐라구?
- 아, 지금 문뜩 그런 생각이 들어. 그렇지?
- 아니야, 틀렸어.
- 그래...?
- 아니야.
- 아... 꼭 그럴 것만 같은데.
- 하지만 아니야. 이다음에, 이다음에 얘기해줄게. 그 사람이 누군지.
- 이다음에...?
- 응, 이다음에. 궁금하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려. 기다려, 그때까지.
- 니가 기다리라면 기다릴게.
- 춥지 않니?
- 어, 추워. 하지만 지금이 겨울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 그래, 지금이 겨울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세경이, 네게도. 내게도. 그리고 이 선생님에게도
지금이 겨울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 아, 세경아. 나 이 선생님에게 잠깐 다녀와야겠어. 너 먼저 가. 어, 저기 어머니가 차 잡아놓고 계시구나.
먼저 가, 곧 뒤따라갈게. 집으로.
- 왜?
- 잊은 게 있어서 그래.
- 아... 그래, 그럼. 먼저 갈게.
(바람 소리)
- 정말 지금이 겨울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 왜 도로 돌아오세요? 수연 씨.
- 오, 선생님은 왜 여태 거기 계세요?
- 아마 수연 씨가 도로 돌아올 줄 알았던 모양이죠?
- 여기 나무 등걸에 좀 걸터앉을까요?
- 그럴까요?
- 참 조용하군요.
- 추운 탓이겠죠. 수연 씨...
- 아무 말도 마시고 바람 소리 들어요. 아무 말도 마시고요.
- 그런데도 왜 도로 돌아왔습니까.
- 선생님이 추우실 것 같애서... 그래서...
- 수연 씨.
- 그런데 선생님은 왜 여태 여기 계셨어요?
- 아... 수연 씨 등이 시린 것 같애서... 내가 미워서...
- 미워하지 마세요. 이건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에요.
- 산다는 건 이렇게 끝없는 아픔인가 봐요.
- 하지만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살아있음을 진하게 느껴요.
아... 난 이제야 정말 괜찮은 소설을 쓸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이제야...
- 저 겨울나무들은 지금 떨고만 있는 게 아니군요. 떨면서도 춤을 추고 있군요.
봄을 예감하는 화려한 춤을 말입니다. 수연 씨는 한 그루 겨울나무군요.
- 그래요. 겨울나무예요. 한 그루 겨울나무... 나도, 세경이도, 선생님도 모두 다.
- 아... 바람이 차군요.
(바람 소리 및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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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서른 번째, 마지막 회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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