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고려야구, 동산유지 공동제공.
(음악)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열두 번째.
(음악)
- 강세경 씨.
-...네.
- 웬일로 내 방을 다 오셨습니까.
- 무서워요, 선생님. 저 딴 방으로 옮겨주세요. 거긴 무서워요.
- 남편께서 또 오실까봐서요?
- 그인 또 올 거예요!
- 지금 저녁입니다. 이젠 누구도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약속했죠. 누구도 내 허락 없이 강세경 씨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 하지만 무서워요!
- 절 믿으세요. 전 약속을 지킵니다.
- 하아.
- 떨지 마세요. 병실로 가세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어요. 그리고 미스 리한테 이르겠어요.
강세경 씨랑 같이 있어드리라고요. 자, 가세요. 아무 걱정 마시고요.
- 네.
(음악)
(초인종 소리)
- 흐음, 이 선생님이세요?
- 예, 접니다.
- 아아
(문 여닫는 소리)
- 하아, 이거 늦었습니다.
- 아하하,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서 오르세요.
- 네.
(문 여닫는 소리)
- 막 나오려는데 일이 생겨서요.
- 그러신 줄 알았어요. 흐음.
-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참, 이거 받으세요. 포도주 한 병 사왔어요.
- 어엉, 성찬도 아닌데 포도주를?
-포도주를 곁들이면 성찬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 아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쪽으로 앉으세요.
- 네.
- 으흐흥.
(포도주 뚜껑 따는 소리)
- 제가 따르죠.
(포도주 따르는 소리)
-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식탁은 제법 호화롭네요. 포도주도 있고 손님도 계시구요.
선생님은 아시죠? 혼자 식탁에 앉은 사람의 참담한 마음을.
- 알구 말구요.
- 자, 드세요.
(잔 부딪치는 소리)
(포도주 마시는 소리)
- 그런데 눈이 부시는데요?
- 뭐가요?
- 이 식탁이요.
- 이 식탁이? 음, 김치찌개와 파래무침과 미나리생채가 전분데 이 식탁이 눈이 부셔요?
- 이 식탁에 앉으니까 여긴 따스한 온기가 스며있는 가정 같고 난 그 가정에 초대된 고아 같습니다. 아하하하하.
- 아하하하하.
- 아니, 왜 웃으십니까?
- 커다란 남자가 고아라고 하니까 우스워요. 호호호호호.
- 하하하하하, 듣고 보니 그렇군요.
- 아하하하, 남자에겐 확실히 여자가 있어야 할 것 같군요.
- 여자에겐 남자가 없어도 됩니까?
- 전 아직 고아처럼 느껴본 적은 없거든요. 으으으흥.
- 여자는 모성 그 자체니까.
- 바로 그거예요.
- 그러고 보면 확실히 약한 건 남자 쪽인가 봅니다.
- 남자는 다만 여자보다 완력이 셀뿐이죠. 오호호.
- 다만?
- 실망 마세요. 그렇다고. 남자에겐 여자가 상상도 못할 길이와 넓이와 무게가 있으니까요.
그걸 알기 때문에 전 남자에게 꿈을 가지고 있어요.
- 역시 아시는군요. 하하하하.
- 식사하세요. 밥은 많이 했으니까 얼마든지 달라고 하시구요. 대신 맛이 형편없으면 안 드셔도 섭섭해 하지 않을 테니까 안 드셔도 돼요. 전 제 실력을 알거든요.
- 어디 시식을 해보구요. 음...
- 어떠세요?
- 음... 생각보다는 훌륭한데요?
- 그럴 거예요. 이 식탁을 차리는데 두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 알 만합니다.
- 그래서 전 밥을 자주 하지 않아요.
- 그럼 실망인데요? 앞으로도 저녁시간에 맞춰 오며는 저녁은 얻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참인데요.
- 안됐군요? 아하하하하, 아하하.
- 밥을 안 하시면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시죠?
- 외출하는 날은 외식하고 빵으로 때울 때도 있고, 아, 이따금 이렇게 차리기도 해요.
- 그럼 오늘 제가 운이 좋았군요.
- 아, 참. 오늘 낮에 지숙이 만났어요.
- 그러세요? 자주 만납니까?
- 자주 만나진 못해요. 아, 그래도 지숙이는 행복한가 봐요? 아이도, 남편도 끔찍이 사랑하니까.
여자는 사랑만 있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나 봐요?
- 사랑만 있으면... 사랑하지 않는 부부는 어떨까요?
- 사랑하지 않는 부부?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부부로 남아있어야 하죠? 그건 위선일 거예요.
- 게다가 아내는 남편만 보면, 남편 얘기만 나오며는 가슴이 막혀서 쩔쩔 매고.
- 누구... 얘기예요?
- 그 여자 얘깁니다. 내 환자.
- 아니 왜 남편만 보면 숨이 막히죠?
- 그건 아직 모릅니다. 그 여자의 남편은 대재벌의 후계잔데 오늘 아내를 퇴원시키겠다고 왔었어요.
- 아직 나을 기미도 안 보인다면서요?
- 아내가 입을 열면 안 될 사정 있나 봅니다.
- 설마... 자기 신분이 알려질까 봐 그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죠?
- 글쎄요...
- 아, 그래서 데리고 갔나요?
- 부인이 기절을 했어요. 안 가겠다고.
- 어... 어쩌면...
- 그래, 못 데려가긴 했는데 환자는 또 올 거라고 벌벌 떨어요. 그래서 절대로 남편을 못 오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버렸어요. 가엾은 생각에서 말입니다. 아무 대책도 없이... 그래서 난감합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 그... 글쎄요. 제게 무슨 묘안이 있어야죠. 하지만 절대로 그 환자를 내보내서는 안 되겠군요. 네?
- 보내면 정말 어떻게 될지...
- 재벌2세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내와...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응? 아니, 웬일이야? 아하하하.
- 아, 그냥.
- 뭐? 그냥? 오호라, 나 당직하는 줄 심심할까봐 친구해주러 나왔군? 응?
- 틀렸어. 유감스럽게도 나 오늘 자네가 당직인 줄 모르고 나왔어.
- 이거, 입맛 가시는군.
- 어쨌든 왔지 않은가? 그래. 별일 없어?
- 오늘은 아주 조용해. 날씨가 추워선지 다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모양이야.
- 자네 편하라고 그러는가 보군.
- 아니, 웬일이야?
- 7호실 환자 때문에 나왔어.
- 음? 아이고, 쉬라는 일요일도 못 찾아 쉬고 이 추운 날 여기까지 기어 나오는 청승,
- 아하하하, 아하하.
- 웃지 말라구. 꼴도 보기 싫어.
- 그럴 일이 있어.
- 미스 리한테 얘기 들었어. 누가 그렇게 가라앉아 있는 거야? 착잡한 모양인데.
- 담배나 하나 줘.
- 응.
(담배에 불 붙이는 소리)
- 무슨 일 있었나?
- 알 수가 없어.
- 뭘?
- 내가 날.
- 자네답지 않은 소린데.
-휴우, 아무것도 정리할 게 없는데 뭔가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 뭐가 그리 복잡해.
- 복잡하긴.
- 그럼 뭔가?
- 난 다만 명료해지고 싶을 뿐이야.
- 아, 글쎄 뭘? 뭘 가지고 그래?
- 나 때문이라잖아.
- 소설가 때문이군. 끌려가면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야. 뭘 어렵게 생각해? 어렵게 생각할 게 뭐가 있어?
- ‘어렵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난 다만 수연 씨의 얼굴만을 보고 싶었으면 해. 그런데 수연 씨 얼굴 뒤엔 꼭 7호실 강세경 씨의 실루엣이 떠오르거든. 강세경 씨 때문에 수연 씨를 만난 건지 수연 씨 때문에 강세경 씨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 건지 그게 분명하지가 않아. 난 지금 명료해지고 싶어. 불투명한 건 질색이거든.’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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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열두 번째로 고려야구, 동산유지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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