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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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겨울나무 - 제8화 그리지 못할 까닭이 있어요. 분명히.
춤추는 겨울나무
제8화 그리지 못할 까닭이 있어요. 분명히.
1979.10.08 방송
(음악)

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고려야구 동산유지 공동제공.

(음악)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여덟 번째.

(음악)

(잔잔한 음악 소리)

- 왜 그렇게 보세요?

- 검정옷을 입으니까 인상이 달라보입니다.

- 아, 어떻게요?

- 뭐랄까... 인상이 강해보이고 차가워 보인다고나 할까요?

- 그래요? 전 우울한 날엔 색깔 있는 옷이 입기 싫어져요.

- 우울할 때 일부러 밝은 차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던데.

- 글쎄요. 전 그러고 싶지가 않대요.

- 우울하면 우울한 대로 내버려둔다는 거군요.

- 그렇죠. 어, 그러다보면은 저절로 기분이 가벼워지기도 하니까요.

- 그런데 왜 우울한지 물으면 안 될까요?

- 전 변덕쟁이거든요. 시시각각으로 감정이 변해요.

- 아까 선생님 전화 주셨을 때만 해도 별로 그렇질 않았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까닭도 없이 가라앉아버리지 뭐예요. 그래서 어쩔까 망설였어요. 괜히 무거운 얼굴로 나와서 선생님께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해서.

- 별로 무거운 표정이 아니신데요.

- 아하, 그러니까 변덕쟁이죠. 시내로 나오는 동안에 또 가벼워졌어요. 호호호. 우습죠? 저.

- 그렇게 예민하시니까 글을 쓰시죠.

- 꿈보다 해몽이네요. 호호호호.

- 하하하, 뭐 좀 시키죠. 수연씬 식사하세요. 저는 술을 마실 테니까.

- 부르셨습니까.

- 아, 나 스파게띠 하겠어요.

- 그리고 맥주하고 안주 적당히 줘요.

- 네.

- 왜... 식사 안 하세요? 술맛 안 날까봐서요?

- 아시는군요.

- 전 남자에 대해서 많이 알아요. 대학도 남녀공학을 다녔고 남자들 틈에 끼어 기자노릇 5년 했어요.

- 그럼 남자에 대해 꿈 같은 것도 없겠군요. 너무 잘 알아서.

- 아, 하지만 꿈은 꿈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꿈이 꿈으로 끝나버릴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 부디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이건 나한테도 해당되는 소립니다.

- 아하하하.( 둘 다)

- 꿈으로 끝난다 해도 도리 없죠. 뭐. 꿈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 그럴까요?

- 으흠.

(잔잔한 음악 소리)

- 길이 미끄럽죠?

- 제법 미끄럽군요.

- 아하하, 아유, 그새 눈이 거짓말처럼 그쳐버렸네요.

- 달까지 떴군요.

- 글쎄말이에요. 호호.

- 내 환자 중에 지독한 우울증에 걸린 젊은 여자가 있는데 눈 오는 걸 봐선지 입원 보름만에 처음으로 얘길 조금 했어요.

- 왜 젊은 여자가 지독한 우울증에 걸렸을까요?

- 글쎄요.

- 그 여자의 사연이 뭔지 제게 조금씩 얘기해 주실 수 없으세요?

- 작품소재가 될까 해서 그러시는 거죠?

- 아하하, 맞아요. 대신 환자의 신분 같은 건 절대로 알려고 하지 않겠어요. 알려주시지도 않으실 테고. 왜요? 역시 안 되나요?

-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케이스니까 얘기해 드리기로 하죠.

-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뇨?

- 그건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궁금하시더라도 조금 참으세요.

- 아, 그래요?

- 어쩌면 수연 씨가 그 환자를 돕게 될지도 모릅니다.

- 제가요?

- 네.

- 제가 어떻게요?

- 그건 저도 아직 잘 모릅니다.

- 어머, 그새 다 왔군요.

- 빨리 왔군요. 길도 미끄러웠는데.

(차 지나가는 소리)

- 오늘 즐거웠습니다.

- 커피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 늦었는데 괜찮을까요?

- 아하하, 전 10시면 초저녁이에요. 제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 그러시면은 염치불구하고 한 잔 얻어마시고 가겠습니다.

- 하하하하.(둘 다)

- 들어가세요.

(문 여닫는 소리)

(음악)

- 아하하, 앉으세요.

- 네.

- 저, 차 준비부터 하겠어요.

- 책이 굉장히 많군요.

(찻잔 꺼내는 소리)

- 그게 제 재산이에요. 으흠.

- 수연 씬 혼자 사세요?

- 네.

- 가족들은요?

- 어, 부모님들이 3년 사이에 다 돌아가셨어요. 전 막내거든요. 형제들이 있긴 하지만 결혼해서 다들 자기네 울타리를 만들고 사는데 거기 끼어들고 싶지 않더군요. 하하, 그래서 독립해버렸어요.

- 막내는 손해군요. 그럴 땐.

- 아직은 더 사실 나인데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시니까 어머니도 시름시름 하시더니 돌아가시더군요. 두 분은 아주 사이가 좋으셨거든요.

- 흠, 그런데 이상합니다.

- 뭐가요?

- 처음 와보는 방인데 낯설지가 않군요. 전혀. 웬일이죠?

- 아...하하하, 그러세요?

- 더구나 전 혼자 사는 여자의 방엔 처음 와보는데.

- 어색하세요? 그래서?

- 전혀. 이건 순전히 수연 씨의 성품 탓일 거예요.

- 아하하하, 전 제가 하고 싶은 다해요. 예의니 형식이니 하는 건 상관하지 않아요. 10시 아니라 11시라도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대접해요. 전. 그래서 딴 여자가 하면 오해사기 딱 알맞은 일도 전 별 무리없이 해내죠. 제가 남보다 좀 잘하는 게 있다면 바로 그거예요. 오호호.

- 사물에 대한, 생활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건.

- 글쎄...요.

- 수연 씨 같은 여자는 처음입니다.

- 당연하죠. 서수연은 하나뿐이니까요.

- 아하하하.(둘 다)

(물 따르는 소리)

- 아, 드세요.

- 네.

(커피 마시는 소리)

- 앞으로 이 방에 초대도 없는데 주책없이 오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땐 어떡하죠?

- 그땐 스스럼없이 오세요. 이미 그렇게 하실 것 같은데요. 뭐.

- 맞았습니다. 하하하하.

- 오시면 언제고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해드릴 용의가 있어요.

- 그 말씀 기억해 두겠습니다.

- 네. 하하.

(커피 마시는 소리)

- 원고 안 쓰실 땐 뭘 하세요?

- 번역을 조금씩 해요.

- 아, 참. 불문학 전공이시죠. 지숙이랑 같이.

- 시간이 남아돌면 곤란하거든요. 좀 빡빡한 게 나요. 잡념도 안 생기고.

- 그렇죠...

- 뭘 보고 계세요?

- 저 그림...

- 아, 참. 저 그림 어떠세요?

- 그림 볼 줄 모릅니다.

- 아, 볼 줄 아는 사람이 따로 있나요. 그냥 보고 느끼는 거죠. 뭐. 하하, 저도 그렇게밖엔 볼 줄 몰라요.

- 누구 작품입니까? 아마추어 이상인 것 같은데요.

- 제 친구가 그린 거예요.

- 아... 인사도 없이 파리로 가버렸다는...

- 네. 결혼 전에 그린 거예요. 색감이 굉장히 부드럽죠? 파스텔화를 보는 것 같지 않아요?

- 그렇군요.

- 아주 여자답고 부드러운 감성을 가진 아이거든요.

- 네...

- 결혼하고 파리 유학까지 하고 나서 꽤 기대를 했었는데 웬일인지 통 작업을 못 했어요. 파리에선 뭘 했는지 공부하러 간 아이가 빈 손으로 왔어요.

- 그림에 대한 정열이 결혼과 함께 사라져버린 걸까요?

- 그렇지도 않아요. 걘 그림에 대단한 정열을 가지고 있어요. 재능도 있구요. 대학 때도 꽤 촉망받았거든요?

- 그런 분이 왜...?

- 어... 뭔가 그리지 못할 까닭이 있어요. 분명히. 그런데도 통 말을 안 해요. 그냥 늘 빙긋이 웃기만 하고 왜 내게 그 얘길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그야말로 인사 한마디 없이 남편까지 두고 혼자 파리 다시 간 걸 보면은 대단한 각오가 있었던가 봐요. 역시 걘 그림을 잊지 못한 거예요.

강세경 씨는 그림 때문에 파리에 간 게 아니라 지금 내 환자가 돼 병원에 있습니다. 수연 씨. 바로 내 환자가 돼서 말입니다.

(음악)

박웅, 권희덕, 신성호,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석 주제가 작곡 노래 최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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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여덟 번째로 고려야구, 동산유지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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