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고려야구 동산유지 공동제공.
(음악)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여섯 번째.
(음악)
- 자세하게 얘길 해봐요. 7호실 환자가 어쨌다고?
- 저, 이걸 보세요. 환자가 윗도리를 다 찢었어요. 죽으려구요.
- 죽으려고?
- 보세요. 끈처럼 길게만 찢어놨잖아요. 선생님.
- 어디.
- 아, 이 가느다란 팔로 어떻게 이렇게 찢었는지 모르겠어요. 점심 가져갔더니 이렇게 찢고 있지 뭐예요.
- 정말 다 찢어놨군.
- 죽으려고 한 게 아니야.
- 어머, 그럼 왜 그랬을까요?
- 깊고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는 거야. 죽음만큼이나 깊은 좌절감...
(음악)
- 죽음만큼이나 깊은 좌절감이라구요?
- 그보다도 형부를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 형부는 일본으로 출장 가셨대요.
- 출장을?
- 며칠 걸린다고 하더군요.
- 형부가 하는 일은 뭐죠?
- 태양실업 상무로 계세요.
- 세인 양.
- 네?
- 언니가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는 없었어요?
- 언니는 외모가 빼어나서 주위에 맴도는 남자가 많았어요. 하지만 특별히 가깝게 지내던 남자는 없었어요.
전 저 나름대로 남자들이 쉽게 접근을 못해서 그런 걸 거라고 생각했어요.
- 예... 그럼, 형부가 언니에게 첫 남자였나요?
- 그런 셈이죠.
- 언니와 형부는 어떻게 만났죠?
- 언니는 졸업하고 사립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는데 그때 마침 재단으로 태양그룹으로 넘어가고 유학에서 갓 돌아온 형부가 재단이사장이 됐어요. 그래서---
- 네... 결혼할 때 반대는 없었구요?
- 네, 없었어요. 경제적으로는 천지차이지만 별 어려움 없이 결혼했어요.
- 세인 양의 아버지는 뭘 하시는--
- 아버지는 교육자셨는데 작년에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 그랬군요.
- 사실은 저보다는 수연 언니가 언니를 더 잘 알고 있는데, 선생님. 형부 모르게 수연 언니를 만나보시면 어떨까요?
- 때가 되면 수연 씨한테 도움을 청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수연 씨도 별로 아는 게 없는 거 같더군요.
- 예... 그런데 어쩜 수연 언니를 여기서 만나게 됐을까요?
- 우연치고는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 네.
- 그럼 그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겠죠. 후후후.
-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저, 그보다 언니 언제쯤이면 볼 수 있을까요? 선생님.
- 글쎄요...
- 하아.
- 너무 걱정 말아요. 그리고 형부가 돌아오는 대로 좀 와주십사 하고 전해주시구요.
- 네.
- 눈이 오려나.
- 어머, 정말 눈이 오려나 봐요. 아아. 언니는 겨울을 참 좋아하는데.
- 겨울을?
- 언니는 겨울이 온 줄도 모르겠죠?
- 그렇지 않아요. 다 느끼고 있어요.
- 그런가요. 정말?
- 그런데 왜 딴 가족들은 아무도 안 오죠?
- 어머니는 아직 모르고 계세요. 어머니 심장병 있으세요. 그래서 알리지를 못했어요.
- 네... 세인 양이 혼자 힘들겠군요.
- 어머니가 아시게 될까봐 겁나요.
- 그렇겠군요. 난 어머니보다도 시어머니 되시는 분을 만나고 싶은데.
- 글쎄요. 형부가 오시면 얘기해보세요. 제가 알기로는 고부간의 문제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결혼하자마자 파리로 가서 2년을 있었고 돌아와서도 따로 살았고 그분 예의바르고 좋으신 분이에요.
- 그렇더라도 며느리가 입원을 했는데 어쩌면 한 번도 안 와 보시죠?
- 형부가 못 오시게 하는 걸 거예요. 아마.
- 음...
- 저, 그만 가보겠어요. 선생님.
- 그러세요.
- 안녕히 계세요.
- 잘 가요.
(문 여닫는 소리)
- 음....
- 오, 구경서 씨.
- 들어가도 돼요?
- 들어와요.
( 문 여닫는 소리)
- 왜 그러세요?
- 나, 3호실로 보내주세요. 9호실은 싫어요.
- 3호실로 가시면 또 학수 군하고 싸울 텐데요.
- 다시는 안 싸울게요. 선생님.
- 하지만 구경서 씨는 아직도 학수 군을 미워하죠? 거보세요.
- 하지만 안 싸우면 되잖아요.
- 구경서 씨.
- 3호실로 보내주시는 거죠?
- 구경서 씨, 탁구 칠 줄 아세요?
-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벌어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런 거 할 새가 어딨어요.
- 그럼 심심한데 이참에 한번 배워보겠어요?
- 선생님이 가르쳐주실래요?
- 하하, 난 칠 줄을 몰라요.
- 어, 그럼 누구한테 배우죠?
- 학수 군한테 배우죠, 뭐. 학수 군이 탁구를 잘 치거든요.
- 칫, 그놈...
- 자, 날 따라와요. 구경서 씨.
- 아, 어디로 가시는데요? 난 병실엔 안 갈 거예요.
- 아, 탁구 치러 가는 거예요.
- 난 그깟 놈한테 안 배운다구요!
- 나랑 치는 거예요.
- 선생님하구요?
- 하하하. 그러니 걱정 말고 따라와요.
- 네, 선생님.
(음악)
- 아니, 무슨 생각하고 있어? 차 갖다 논 것도 모르고.
- 으음?
- 차 마시라고.
- 어, 응.
(차 마시는 소리)
- 7호실 환자 말야.
- 그 여자가 왜?
- 피곤이 너무 짙어. 너무 짙어서 조금만 건드려도 바스라질 것만 같애.
- 음, 뭣이 그 여자를 그렇게 피곤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을까.
- 오늘로 입원 보름짼데 아직도 피곤이 가시질 않아. 요 며칠 인터뷰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뒀는데 여전해.
- (문 밖에서 나는 소리) 눈이 오네. 눈이 와요!
- 며칠씩 잔뜩 찌푸리고 있더니 드디어 오는군.
- 제법인데.
- 왜? 또 여자들처럼 뒤숭숭해지나?
- 원, 사람.
- 대학 때 생각나?
- 대학 때?
- 그때가 예과 2학년 때였지? 시험공부하다 말고 눈이 오니까 슬며시 도서관을 빠져나가 고향집엘 갔다오는 그런 친구가 어찌 시인이 안 되고 의사가 됐나 몰라. 그렇게 슬며시 나섰다가 밤차 타고 올라와서 눈이 새빨개가지고 시험 보는 꼬락서니라니. 으하하하.
- 하하하, 그땐 어렸지. 자넨 몰라. 공부한다고 객지에 오래 나와 있으면 때때로 목이 마르게 어머니 생각이 날 때가 있는 거라구. 난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있었어. 난 서울에서, 어머니는 고향집에서 똑같이 목이 말랐지. 결국은 어머니하고 이렇다하게 살아보지도 못했지만.
- 지금은 어떤가? 고향에 어머니는 안 계시고 고향 뒷산 어머니 산소에 덮힌 눈을 쓸러 달려가고 싶지 않아?
- 그럴 수만 있다면야.
- 하하하, 어때. 나도 귀신 다됐지?
- 대학 때부터 13년이야. 같이 붙어 다닌 게.
- 군대 3년은 떨어져 있었으니 정확히 10년이지.
- 허, 그렇게 되는군.
- 흐흐흠, 참 우리처럼 오래 붙어 다니는 친구들도 없을 거야.
- 왜, 지겨운가?
- 그래, 지겹다. 지겨워.
- 그럼 냉큼 사라져주겠어.
- 아니, 차 마시다 말고 어디 가는 거야? 아니, 또 가슴에 바람이 이는 거야 뭐야.
- 사람, 난 이제 학생이 아니고 의사야. 그것도 근무 중인.
- 그럼 어딜 가겠다는 거야? 차 마시다 말고.
- 볼일 생겼어. 갑자기.
- 뭐어어, 갑자기?
(음악)
박웅, 김규식, 설영범, 안경진, 정경애.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석. 주제가 작곡 노래 최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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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여섯 번째로 동산유지, 고려야구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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